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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와 사막은 우리에게는 좀 더 생경할 수가 있다. 중동 근동에나 있을 법한 환경이기 때문이다. 광야는 그야말로 거의 풀조차 자랄 수 없는 척박한 땅이다. 사막 또한 낮과 밤의 온도차이가 60도나 되는 준극지라 부를만한 곳이다.

흔히 광야와 사막은 우리네 삶에서 역경의 정점으로 비유된다. 이런 고난이 없으면 좋으련만 누구에게든지 이 손님을 피할 길이 없다.

이런 폭풍이 있을 때마다 ‘제대로 된 매뉴얼이 부족했다. 무분별한 간병 및 병원 방문 관행, 의료쇼핑이 문제다. 병원 응급실이 경유지로 이용됐다’는 등 멘트들이 주요 이슈로 부각됐다.

과학적사고가 아닌 감성적사고에 접근하다보면 끊임없는 공포가 우리를 더욱 엄습하여 나약한 존재로 전락하게 한다. 다행히 많은 헌신적인 의료진들과 국민들의 성원덕택에 메르스가 점차 진정세로 접어들면서 온 국민들이 정상적으로 생업에 종사할 수 있어 한시름 놓인다. 무엇보다도 환자들의 생명을 위하여 사투를 벌이는 의료진들의 노고는 이 시대의 진정한 영웅상을 보여줬다. 가족과의 격리는 물론 5kg 무게의 보호장비를 입고 벗는데만 1시간이 넘는 고통도 마다않는 그분들의 수고가 희생이 무엇인가를 여실히 보여줬다.

또 하나. 병원이나 길거리에 ‘힘내세요. 응원합니다’라는 현수막의 슬로건은 잔잔한 감동을 자아냈다. 작은 이 외침들이 우리를 강건하게 하는 요체가 되길 빌어본다.

필자는 우리 국민들에게 큰 고통이었던 이런 질병을 보면서 두 가지가 머리에 떠오른다. 조선 세종 치세때 강무(講武)를 하던 얘기다. 강무란 임금이 주도하여 사냥을 하며 겸하여 무예(武藝)를 연습(練習)하는 것을 말하는데, 주간뿐만 아니라, 때로는 야간때도 실시를 했다. 많은 군사가 동원되다 보니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민폐를 이유로 생략하자는 신료들의 건의 또한 상당했다. “평안할 때 외침을 준비하라”는 세종의 이 한마디에 강무는 계속 실시됐다. 세종때는 결코 태평시대가 아니었다. 북으로는 오랑캐들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고, 남으로는 왜구의 출몰이 계속됐다. 주변상황을 정리해 볼 때 세종의 판단은 옳았다. 이런 정책들을 지혜롭게 했기 때문에 거란족과 왜구들이 귀화를 요청하여 조정에서는 식읍(食邑)과 가옥을 제공하기도 했고, 또한 4군6진을 설치하면서 평안도 절제사로 임명된 최윤덕은 큰 공을 세웠다. 비록 많은 학문을 섭렵하지 못했으나, 우의정 자리에 오르게 된다.

둘째로 충무공 이순신장군 또한 주도면밀한 일상이 23전 23승이라는 전후무후한 해전사에 빛나는 역사를 남겼다. 심지어는 군량미를 확보하기 위하여 둔전의 설치는 물론이고, 건어물과 구운 소금을 시장에 팔기도 했다. 충무공 휘하에 있으면 호구지책은 된다고 하는 신뢰가 백성들이 주둔지 부근으로 몰려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총포의 위력이 폭우처럼 쏟아지는 긴장속에서 배안에서 먹을 갈고 난중일기를 매일 같이 쓰다시피 했다. 나라가 존망하는 기로에서 그 분의 위기감은 상상을 불허했을 것이다. 상용한 위장약. 시도 때도 없는 구토와 불면은 그 분의 건강을 위협했다. 더군다나 노년에 들이닥친 전염병은 병석에서 거의 20여일 간이나 운신못하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독의 일상을 깨뜨리지 않았다. 한마디로 두 분의 삶은 유비무환이 삶의 모토였다. 세종의 백독백습, 충무공의 매일 활쏘기연마처럼 준비했던 일상이 미래의 담보책이 됐음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안승국 인천공항세관 관세행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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