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천년, 고려시대의 경기문화] (21) 국도, 개경의 문화유산
②개경의 고려 궁월터 '만월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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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궁궐, 지금 우리에게는 만월대(滿月臺)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하다. 고려왕조가 막을 내리고 조선왕조는 수도를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긴 뒤 터는 점차 황폐해지고 돌로 다듬은 초석과 높다란 축대만 남아서 만월대라 불렸다. 조선시대 여러 문인들은 옛 왕조를 회상하는 유적으로 기억했다. 조선중기 개성 출신의 뛰어난 문인 최립(崔笠)이 남긴 시에는 잊히지 않은 유적 고려 궁궐터의 단상을 실감나게 전해준다.

고도(故都)에 까마귀만 다투어 모여들고 / 故國鴉爭集

텅 빈 성에 학이 몇 번이나 맴돌았던가 / 空城鶴幾回

봄바람 맞으면서 흐르는 물을 굽어보다 / 東風臨逝水

황량한 누대 위로 해질 녘에 올라왔소 / 落日上荒臺

산천의 형승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건만 / 形勝不曾改

나라의 흥망을 있게 한 이 그 누군고 / 興亡誰使哉

그동안 지나 온 역사의 발자취 생각하며 / 從來多古意

떠나려다 다시금 발길 돌려 서성이네 / 欲去更徘徊

918년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은 이듬해에 수도를 철원에서 자신 집안의 근거지였던 개경으로 옮겼다. 이때부터 473년간 개경은 고려왕조의 수도로써 지위를 유지하였다. 개경의 지형은 높고 낮은 산에 둘러싸인 분지이다. 고려 궁궐은 송악산을 뒤로 두고 자리를 잡았다. 황제국을 표방했던 고려는 국왕이 머물던 궁궐에 이름을 짓지 않는 대신에 대내(大內)나 본궐(本闕) 등으로 불렀다. 외침이 잦았던 고려였던 만큼 궁궐 역시 부침이 심했다. 창건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왕실이 안정되고 중국과 외교관계가 원활해지며 전각을 늘리고 규모도 확장하였다. 대규모 법회나 격구놀이 같은 행사를 벌이면서 수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너른 마당인 구정(毬庭)을 두어 면모를 일신하였다.

크고 잦은 변화가 있었지만 고려 궁궐은 1011년(현종 2) 거란의 침입으로 소실이 되어 2년여에 달하는 시간을 들여 중건하였다. 송나라 사신으로 1123년(인종 1)에 고려에 온 서긍(徐兢)은 자신의 견문을 엮은 ‘고려도경’에 그가 본 고려 궁궐의 인상을 기록으로 남겼다. “꿩이 나는 듯한 화려함에 용마루는 잇달아 있고 붉고 푸른빛으로 장식하였다. 멀리서 보면 깊은 맛이 있으며 놓은 산등성이에 의지하고 있다”고 전체 인상을 피력하였다. 정전인 회경전을 두고는 “동서로 양쪽에 계단이 있으며, 난간을 붉게 옻칠한데다 구리 꽃으로 꾸며서 장식이 웅장하고 화려하니 여러 전각 가운데 최고이다”라고 평하였다. 고려 궁궐터에 남아있는 돌로 만든 초석과 장대한 축대만으로도 원래 위용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고려 궁궐은 서긍이 개성을 방문하던 시기를 전성기로 해서 서서히 내리막길을 갔다. 1126년(인종 4) 척신 이자겸이 일으킨 난으로 인해 궁궐 대부분을 잃었다. 인종은 궁궐을 중수하고 나서 전각의 이름을 모두 고쳐지었다. 몽골이 침입하자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여기에 개경을 본떠 궁궐을 조성하면서 개경의 궁궐은 황폐를 면치 못하였다. 난국을 타개하고자 고려는 원의 부마국이 되는 노선을 취하게 되고 몽골의 요구에 따라 개경으로 환도했다. 궁궐도 복구하였지만 고려왕실은 이궁을 짓고 주로 그곳에서 지냈다. 왕의 즉위식이나 나라의 큰 경사는 궁궐을 이용하였으나 왕이 상시로 거처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런 이용실태를 감안하면 궁궐의 주요부는 제 모습을 유지하였다고 추측되며, 이외 주변 시설은 전성기보다는 퇴락한 상태가 아닐까 한다. 실제 고려 궁궐에 끼친 더 큰 타격은 공민왕 때 홍건적이 쳐들어오면서 발생하였다. 이들로 인해 궁궐은 잿더미가 되었고 고려말로 들어서면서 복잡한 정세를 반영하듯 궁궐이 복구되는 일은 없었다. 이미 조선초기에 쇠락한 궁궐의 실상이 글로 나타났고, 사람들은 이때부터 고려 궁궐터를 만월대라 부르기 시작했다.

고려 궁궐은 입지조건과 주요 전각의 배치 방식에서 같은 시기 동아시아 다른 나라 궁궐에서 볼 수 없는 독창성이 돋보인다. 송나라의 수도 변경에 지은 궁궐은 사방이 평탄하고 물길이 발달한 위치에 네모반듯한 황성과 궁성을 갖추고 남북 일직선상에 주요 전각이 앞뒤로 늘어선 질서 있는 형태였다. 베트남 하노이의 궁궐은 전모는 명확하지 않으나 최근 부분 발굴조사를 통해 평탄한 지형 위에 궁터를 잡고 남북방향으로 주요 전각이 배치된 모습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본 교토는 당나라 수도 장안을 본보기로 삼아 축약한 방식으로 알려져 있으며 전각 또한 장안의 궁궐을 본 떠 남북 일직선상에 늘어세웠다.

이런 주변 나라 궁궐과 달리 고려의 궁궐은 우선 입지조건에서 남다르다. 궁궐은 송악산 아래 경사지고 굴곡이 발달한 지형을 채택하였다. 다음은 송악산 아래 서북쪽에서 발원한 광명천 물줄기를 따라 주요 전각을 배치한 점을 꼽을 수 있다. 이렇듯이 지형과 물줄기를 수용하면서 전각을 배치하게 되자 동남쪽에 정문을 내고 한 차례 이상 방향을 틀어서 진입하는 형태가 되었다. 이런 방식은 동아시아 다른 나라 궁궐에서도 유사한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고, 더욱이 고려의 직전 왕조였던 궁예가 세운 태봉국의 궁궐과도 다르다.

고려 궁궐의 이런 독특한 모습은 어디에서 기인했을까. 일차 단서는 발어참성에서 찾을 수 있다. 발어참성은 왕건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쌓은 성인데 고려 궁궐은 이곳을 토대로 형태를 갖춰나갔기 때문에 지형조건에 따른 독특한 결과를 얻었다. 이보다 더 근원적인 이유는 신라말 이래로 자리 잡은 지형의 특성을 존중하는 건축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 중국건축에서 중요하게 여겨졌던 중심을 살린 배치나 남북직선축을 강조하는 건물 배치와 다른 우리나라 지형특성을 살린 방식이 정착된 것이다. 이런 성향이 궁궐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이 송악산 아래 고려 궁궐이었던 셈이다.

고려 궁궐은 안쪽에 궁성을 두고 바깥쪽에 황성을 갖춘 2중 성벽 구조였는데, 황성의 정문인 광화문은 광명천이 황성과 만나는 동남쪽 모서리에 동향해서 자리 잡았다. 광화문을 들어서면 앞에서부터 승평문, 신봉문, 창합문을 차례로 지나 궁궐 중심부에 도달한다. 승평문과 신봉문 사이에 마련된 구정에서는 팔관회, 노인 연회, 대규모 사면, 강무(講武)를 포함한 군대사열이 열렸다. 신봉문의 문루는 이런 행사를 관람하는데 최적의 장소였다. 궁궐의 마당 이름을 구정이라 부를 정도로 고려에서는 격구(擊毬)를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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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궁궐의 특색 가운데는 기능별로 정전을 구분, 운영한 점을 빼놓을 수 없다. 정전인 건덕전(뒤의 대관전)은 여러 신하들과 조회나 하례, 책봉이 이뤄졌다. 사신 접대에 있어서도 송나라보다 낮춰봤던 요나라와 금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장소로 쓰고 있어 여러모로 회경전보다는 기능과 위상이 낮았다. 고려 궁궐을 상징하는 정전인 회경전(뒤의 선경전)은 송나라 사신 접대가 잦아지고 궁궐 안에서 불교행사를 베풀면서 이런 기능을 수용하기 위해 현종 무렵에 새로 지은 의례용 장소였다. 승평문 북쪽 가파른 경사지 위에 지었기 때문에 여기를 오르내리기 위해 장대한 돌계단이 축조되었고 이 계단은 지금도 잘 남아있어서 당시의 번성했던 궁궐의 실상을 증명해준다. 이밖에도 ‘고려사’에는 편전과 내전, 동궁전으로 쓰였던 전각은 물론 제례와 강학, 연회시설 등이 파악되는데 대략 100여개에 달하는 전각 명칭이 파악된다.

정전답게 회경전 앞쪽 축대에 마련된 네 개의 계단은 각각 폭이 7.5m나 되지만 2014년에 드러난 중심건축군(회경전-장화전-원덕전)과 서부건축군을 연결하는 대형계단은 폭이 13.4m, 길이는 10.7m에 이른다. 현 왕의 직계조상의 진영(眞影·초상화)을 모셨던 경령전터와 일상 생활공간으로서의 편전이나 내전으로 추정되는 건물터도 속속 드러나고 있다. 고려시대 전시기에 걸쳐 사용된 궁궐인 만큼 출토된 전각의 지붕을 덮었던 막새기와는 연화문·당초문→일휘문→범자문으로 대표되는 일반적인 고려시대 막새문양의 변천이 확인된다고 한다. 고려 궁궐의 외관은 어떠하였을까. 아쉽지만 금동대탑(국보 제213호), 고려시대 불화에 그려진 전각도를 통해 유추해볼 따름이다.

고려 궁궐의 건축에 담겼던 정신은 사라지지는 않았다. 집을 짓는 방식과 자세는 조선으로 계승되었고, 우리나라 건축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로 굳게 자리 잡았다. 조선초기에 지은 경복궁은 비교적 평탄한 대지를 선택하여 정문에서 정전, 침전까지 남북축에 두면서 어느 정도 중국식 원칙을 따르려 한 경향이 보이지만 창덕궁은 경복궁과 달리 지형이 허락하는 대로 건물을 배치하였다. 정문에서 정전까지 몇 차례 꺾어 들어가는 진입방식도 고려 궁궐에서 보였던 특징을 그대로 계승한 점이다.

한동안 중단되었던 개성 만월대 유적에 대한 남북 공동발굴조사가 올해 재개되었다. 2007년부터 추진해온 발굴조사 결과는 문헌에만 의존했던 기존의 한계를 딛고 고려 궁궐의 실체를 향해 성큼 발걸음을 내딛는 계기가 되고 있다. 여러 차례 발굴조사를 실시했어도 지금까지 발굴된 고려 궁궐의 면적은 전체의 1/5에 불과하다고 한다. 송악산 아래에 펼쳐졌던 고려 궁궐의 웅대한 전모를 다시 보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땅속에 묻혀있던 흔적에서라도 고려건축이 지녔던 기상을 확인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경미 (재)역사건축기술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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