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천년, 고려시대의 경기문화] (22) 경기도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와 인물
공암허씨, 허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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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암허씨의 시조 허선문이 탄생한 허가바위의 공암. 현재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1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허씨의 본관은 양천(陽川: 孔巖), 하양(河陽), 김해(金海), 태인(太仁), 함창(咸昌), 수원(水原), 양주(楊州) 등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지금은 양천, 하양, 김해, 태인 4본(本)만이 전한다. 이들 각 본관의 시조는 가락국(駕洛國)이 신라에 병합되면서 각 지방으로 흩어진 가락국 왕조의 후손들이다. 허씨들은 가락국으로부터 시작하여 삼국,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많은 인재를 배출하는데, 특히 고려시대 공암허씨들은 지방호족-문벌귀족-권문세족-신흥사대부로 이어지는 정치세력의 변화에도 도태되지 않고 고려 전시기에 걸쳐 늘 당대를 대표하는 명문가를 유지한 가문이었으며, 경기 천년간 경기도를 대표하는 명문가의 하나이다.

#가락국의 후예, 공암을 본향으로 삼다

공암허씨의 시조는 허선문(許宣文)으로 가락국 허황옥의 30세손이다. 허선문은 공암촌에 살면서 농사에 힘써 많은 양곡을 비축하였는데,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을 정벌할 때 군량이 부족하여 사기가 떨어진 것을 보고 군량을 보급해 준 공으로 그를 공암촌주로 임명하고 식읍으로 삼았으며, 삼한공신이 되었다. 공암이 양천으로 고쳐짐에 따라 양천허씨(陽川許氏)로 불리게 되었다. 양천은 고구려 때의 제차파의현(齊次巴衣縣)을 신라 경덕왕 때 한식지명인 공암현으로 고쳤다가 1310년(충선왕 2)에 다시 양천현으로 개칭되어 계속 사용하다가 1895년(고종 32)에 양천군으로 승격되었으며, 1914년 경기도 김포군(金浦郡)에 편입되었다.

허선문이 농사를 지어 부를 축적하였다는 기록은 양천일대가 한강 하구지역으로 토지가 비옥하여 지금도 품질 좋은 쌀이 생산되고 있어 사실로 생각되며, 또한 개성과 양천은 서해안에 위치하고 있고, 두 지역은 해안선을 따라 남북으로 서로 매우 가깝기 때문에, 개성의 호족인 왕건과 양천의 부호인 허선문은 후삼국 통일전쟁 이전부터 상호 교류를 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왕건은 해상무역을 주로 하였으며, 허선문은 농사를 많이 지었기 때문에 허선문이 재배한 농산물을 왕건의 상단이 여러 지역을 다니며 판매했을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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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암바위의 위치와 설명을 적은 비석
#공암허씨, 천년 경기의 귀족이 되다

왕건이 후삼국 통일과정에서 도움을 줌으로써 고려를 개국할 수 있게 도와준 많은 군소호족과 향호들은 공신의 지위를 취득할 수 있었고, 공신들은 고려 초기 왕권을 견제할 수 있는 정치세력으로 성장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지방호족들은 광종의 중앙집권화 정책에 따라 대다수가 숙청을 당하게 되었으며, 광종은 지방호족을 대신할 인재를 선발하기 위해 과거제도를 실시하였다. 광종의 숙청정책에 살아남은 지방호족 출신들과 새롭게 실시하는 과거에 급제하여 관로에 진출함으로써 형성된 신흥관료집단들이 고려가 정치적으로 안정기에 접어드는 성종이후부터 차츰 세습화되니 문벌귀족(門閥貴族)이 그들이다.

공암허씨는 광종의 중앙집권화 정책-공신귀족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화를 입지 않았으며, 또한 과거제도에도 적극 참여함으로써 공신귀족에서 문벌귀족으로 자연스럽게 변화할 수가 있었다. 경기지역을 본관으로 한 귀족인 이천서씨(利川徐氏), 안산김씨(安山金氏), 파평윤씨(坡平尹氏), 인주이씨(仁州李氏), 황려민씨(黃驪閔氏), 남양홍씨(南陽洪氏), 서원염씨(瑞原廉氏) 등의 가문도 문벌귀족으로 재탄생하면서 고려 중기를 선도하는 정치세력이 되었다.

공암허씨도 꾸준히 관직에 진출하고 있는데, 허선문의 손자 허원(許元)은 과거에 급제하여 내사사인(內史舍人)·지제고(知制誥)·태자사의(太子司議) 등을 지냈으며, 증손 허정(許正)은 예부상서, 태자태보(太子太保 : 동궁의 종1품 벼슬)에 이르렀고, 정의 아들인 허재(許載)는 문하시중 평장사를 지냈다. 특히 허재는 병마사 재임 시 여진의 정세를 파악하여 변경 수비의 방책을 왕에게 올려 채택되었다.

#무인집권기 행정 전문가로 성공한 문신 허공

고려 전기 문신들에게 억압받던 무신들이 ‘무신난’을 일으키자 문벌귀족들은 몰락하게 되고 새롭게 무신 계통의 귀족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학문적 소양과 정치적·행정적 능력이 부족한 그들은 과거제를 통하여 배출된 젊고 유능한 문신들을 관직에 배치하였고, 문음(門蔭), 천거(薦擧) 등을 통해 관직에 나온 젊은 지식인들을 대거 관직에 등용함으로써 부족한 국정경험을 메우고자 하였다. 또한 원 간섭기에 이르면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駙馬國)이 되어, 몽골어에 능숙한 역관, 원에 매를 진공하는 응방(鷹坊) 출신 자, 원 황실의 신임을 받은 환관, 원에 입조하는 고려왕을 수행한 친종공신(親從功臣), 일본정벌에 참여한 무신들이 신흥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이들 친원세력들은 미천한 신분에서 출세하였지만 문벌귀족의 후예와 무신정권기에 집권층으로 부상된 부류와 더불어 고려 후기 새로운 정치적 지배세력인 권문세족(權門勢族)으로 등장한다.

무신난 때 많은 문신들이 화를 입었으나 공암허씨는 무신난 이후에도 더욱 많은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고 있으며, 문벌귀족에서 권문세족으로 그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고 있는데 이렇게 거듭 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 시기에 활동한 허공(1233~1291)이 있었기 때문이다.

허공의 초명은 의(儀), 자는 온궤(밀국수 온, 상자 궤)이며 추밀원부사 수(遂)의 아들이다. 최자(崔滋)의 문하생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승선 유경(柳璥)의 추천을 받아 최녕(崔寧) · 원공식(元公植)과 함께 내시(內侍)에 속하여 정사점필원(政事點筆員)이 되고 그들과 더불어 정방3걸(政房三傑)이라 불렸다. 당시 권신이었던 임연(林衍)이 그의 딸을 며느리로 삼고자 청혼했으나 거절하여 미움을 받았으며, 임연이 정권을 잡고 많은 조신들을 살해했으나, 그는 전선(銓選 : 인사행정)을 맡을 적격자여서 중용되어 첨서추밀원사에 올랐다. 1275년(충렬왕 1) 지추밀원사로 성절사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왔고 이듬해 밀직사사로서 지공거를 겸임,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를 지내고, 원부(元傅) 등과 함께 ‘고금록 古今錄’을 찬술하였다. 1291년 원나라와 함께 합단(哈丹) 공격에 출전했다가 감기로 병사하였다. 청렴하기로 이름이 높았으며 충렬왕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허공은 당시 최고의 권력자의 혼인 청탁을 거절하여 미움을 받았지만 임연이 허공을 중용한 것은 그의 행정적·정치적 능력을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고려사절요’에서도 ‘성품이 공손 검소하여 자기의 재산 증식에는 관심이 없고 비록 높은 자리에 올랐으나 먹는 것이 한 그릇에 불과하였으며 베 이불과 부들자리에 만족하고 지냈다. 여러 사람과 같이 있어도 말을 삼갔다. 젊었을 때 항상 종 하나를 데리고 죽은 사람의 해골이나 뼈를 묻어주는 일을 하루도 빠짐없이 하였고 버린 시체를 발견하면 몸소 져다가 묻어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어 그는 최고의 지위에 올랐음에도 매우 겸손, 검소하였으며,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고 어려운 일도 마다하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그는 정치적·행정적 능력으로 정치권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에게도 신망이 매우 컷던 것으로 여겨지며 이러한 개인적 능력과 국민의 신망은 향후 공암허씨 자제들의 관로 진출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허공의 손자인 허종(許悰)은 충선왕의 부마가 되었고, 증손인 허백(許伯)은 동지밀직사사로 이제현(李齊賢)과 더불어 서연(書筵)에서 시독하였고, 벼슬이 평장사에까지 이르렀다.

한편 고려말에 이르면 공암허씨들도 새로운 정치체제로의 전환을 준비하게 된다. 물론 공암허씨가문은 권문세족으로서의 지위를 계속 유지하고 있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성리학적인 소양을 갖춘 인물들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왕조로의 전환을 유연하게 준비함으로써 오래도록 유지된 귀족가문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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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의 공암충탑
#양천허씨 인재배출의 요람, 공암

서울 강서구 가양동 영등포공고 정문 앞에는 허가(許家) 바위가 있다. 이 바위 아래에는 약 6m×2m×5m의 천연동굴이 있는데, 동굴 안에는 10여명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있기 때문에 ‘공암’이라고도 한다. 또한 시조 허선문이 이 동굴에서 태어났다는 설화에 따라 공암(양천)허씨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이 지역은 고구려때의 지명이 ‘제차파의현’이었는데 ‘구멍뚫린 바위’란 뜻이며, 바위의 생김새에 따라 그 지명이 생긴 것인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도 ‘바위가 물 복판에 세워져 있고 구멍이 있으므로 이것이 이름으로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 세조때 북병사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허종(許琮), 의성(醫聖) 허준(許浚), 허옹(許邕), 허침(許琛)과 같은 많은 인물이 이 바위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고 전해지며, 허준도 이 동굴에서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저술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결국 이곳은 고려를 거치면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공암허씨가 본향으로서 많은 인재를 배출한 길처이다.

장덕호 실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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