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천년 고려시대의 경기문화]
(23) 고려 태조의 현릉(顯陵)과 왕건상(王建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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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 되살아난 왕건
고려 태조 왕건(877-943, 재위 918-943)은 삼국통일의 영주였던 문무왕에 이어 이 땅에 다시 한 번 통일된 국가를 이룩했던 인물이다. 건국 직후 그는 연호를 천수(天授)라 정하고, '정계(政誡)' 1권과 '계백료서(誡百寮書)' 8편을 반포하였다. 비록 그의 저술은 전하지는 않지만, 고려의 건국의 이념으로 추진했던 숭불정책, 북진정책, 호족연합정책처럼 통일된 나라의 규범과 원칙을 정한 것으로 이해된다.
 왕건은 송악(개성)을 중심으로 번영했던 해상세력 즉, 신라 말에 발흥했던 호족세력으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다. 그는 후백제와의 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이름을 날렸고, 이로 인해 무장(武將)으로 알려졌지만, 신라에 대한 다양한 정책과 견훤과의 관계를 보면 후덕한 인품을 지니고 있음도 알 수 있다.
 그런데, 통일된 나라의 영주였던 왕건이 사후 천여 년이 지난 시점에 역사의 전면에 그 실체를 드러내 눈길을 끈다. 1992년 9월에 진행된 현릉(왕건릉) 보수 과정에서 봉분으로부터 북쪽으로 약 5m 떨어진 지점의 지하 2m에서 확인된 청동제 좌상이 그것이다. 이 좌상은 사방 1.5m 규모의 화강암제 판석의 하면에서 수습되었다. 이 상과 함께 금동 띠고리 1점, 옥띠 장식 11점 등 장신구도 함께 출토되었다. 이 청동상은 한때 불상으로 인식되었지만, 그간의 연구 결과 왕건의 동상으로 견해가 모아지고 있다.
 
 #고려왕조와 함께했던 왕건
 역사는 늘 통치자의 모습을 기억한다. 때문에 그들이 시행했던 다양한 정책과 많은 사건들은 기록으로, 그들의 모습은 대부분 초상화로 전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서 왕건은 동상으로 그 모습을 조성했다. 동아시아의 역사 속에서 통치자의 모습을 동상으로 조성한 예는 아마도 왕건이 유일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동상이 10~11세기에 조성되었다고 추정한 연구결과는 왕건에 대한 고려 사람들의 숭모가 얼마나 지대했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척도라 생각된다. 대부분이 초상화로 전해지는 중국의 역대 황제와도 분명히 차별화되는 부분이다.
 동상에 대한 주목은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서도 확인된다. 먼저 '고려사'에 의하면 광종 2년(951)에 태조의 원당으로 건립한 대봉은사(大奉恩寺)의 진전(眞殿)에 봉안된 태조의 의자가 움직였다. 진전에는 주로 초상이 봉안되므로, 이 기사는 왕건상이 봉안되어 있었음을 암시하는 기록으로 추정된다. 더불어 최충헌이 봉은사의 진전에 제례하면서 의친을 바쳤다는 기사는 청동상과 함께 출토된 금동제 띠고리와 옥띠 장식으로 인해 실제 왕건의 동상에 의복을 입혔음을 알려준다. 이렇듯 고려와 함께했던 왕건의 동상은 조선이 건국되면서 마전현(麻田縣: 오늘의 연천)의 숭의전으로 옮겨 제사를 지냈고, 세종 대에 이르러 제례법의 개혁에 따라 1429년(세종 11)에 현릉의 주변에 매장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문헌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왕건의 동상은 조성된 이래 조선 세종 때까지 줄곧 국가의 제사를 받아왔음을 알 수 있다.
 사후 동상으로 부활한 왕건은 1429년 매장되기 전까지 고려시대 전반에 걸쳐 신과 같은 존재로 숭배를 받았고, 조선시대 초반에 이르기까지도 존숭의 대상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황제의 모습으로 조성된 왕건상(王建像)
 역사상 황제를 자처한 통치자로는 고려의 4대 임금인 광종이 있다. 그는 수도였던 개경(開京)을 '황제의 도읍인 황도(皇都)'라 불렀고, '준풍(峻豊)'과 '광덕(光德)'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해 고려의 천하관을 드러냈다. 물론 앞 시대에도 고구려의 광개토대왕, 신라의 진흥왕 등이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지만, '황제'라 호칭 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광종 대에 이루어진 황제의 나라는 과연 광종 개인의 치적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왕건 이래 구축된 황제국이라는 이미지가 광종 대에 이르러 극대화 된 것이 아닐까.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왕건상에서 확인되는 황제의 징표이다.
 먼저, 동상의 머리를 감싸고 있는 통천관(通天冠)을 꼽을 수 있다. 그간의 연구로 인해 왕건상의 관모는 일반적으로 왕이 착용했던 원유관(遠遊冠)과는 다르다는 점이 밝혀졌다. 더불어 관에는 금으로 도금한 흔적이 있을 뿐만 아니라, 외관의 정면에 오각형이 조각되었다. 이 오각 형상은 신성한 산을 상징하는 금박산(金博山)으로 본래는 통천관에만 조식되던 문양으로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관은 내관과 외관으로 구성되었는데, 내관 좌우에 둥글게 표현된 양(梁)이 좌우 12개씩인 점은 천자가 쓰던 24량의 통천관임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외관의 좌우에는 관을 고정시키기 위한 비녀가 두 개씩 부착되어 있다. 왕건의 사후에 만들어진 이 청동상이 통천관을 쓰고 있다는 점은 바로 광종 대에 이룩된 '황제국 고려'의 이상과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왕건상은 벌거벗은 나신(裸身)의 좌상(坐像)으로 조성되었는데, 의자에 앉아 양 다리를 내리고 있는 의상(倚像)의 형태이다. 출토 당시에는 몸 곳곳에서 부식된 비단천 조각들이 붙어 있었다는 사실을 보면, 본래는 옷을 입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더불어 얼굴의 일부와 손가락 등에 피부색과 같은 안료가 도포되어 있는 것을 보면, 노출된 신체부위는 채색을 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얼굴은 양 볼에 살이 올라 전체적으로 불상의 상호와 같이 원만(圓滿)하게 조성했다. 반원형의 눈썹과 길게 조성한 눈과 오뚝한 콧날 및 인중과 입술의 표현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같은 시기에 고려 전기에 조성한 불상과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고려사절요'에는 왕건의 모습에 대해 "용모는 용안(龍顔)과 일각(日角)이며 턱이 풍만하고 이마가 넓었다. 기우(氣宇)와 도량이 크고 깊었으며, 목소리가 우렁차고 컸으며, 너그럽고 후하여 세상을 구제할 도량이 있었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 기록은 양 옆으로 널찍한 이마와 살이 붙은 턱과 더불어 전체적으로 후덕하면서도 위엄이 서린 동상의 얼굴이 부합되는 일면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이 동상은 실재 왕건의 모습이 형상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넓은 어깨와 탄력감이 느껴지는 무릎에서는 건강미가 흐르고 있는데, 양 손은 가슴에 모아 깍지를 낀 형상이다.
 이상의 정황을 종합해 보면 왕건상은 머리에는 금으로 도금한 통천관을 쓰고, 비단옷을 입은 상태에서 옥으로 장식한 띠를 둘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더불어 노출된 부위 즉, 얼굴과 머리, 양 손과 발에는 채색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상에 투영된 불상(佛像)의 이미지
 왕건 동상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의자에 걸터앉은 의상의 모습이다. 우리나라의 불상에서 이러한 자세를 지닌 예를 신라시대에 조성한 삼화령 미륵세존과 고려시대에 새긴 법주사 마애여래좌상에서 볼 수 있다. 더불어 의상의 양식은 실크로드에 존재하는 유적에서도 확인되고, 북위시대에 조성된 운강석굴에서 많은 예를 볼 수 있다. 요컨대, 왕건상에서 확인되는 자세는 미륵불의 그것과 같은 양상임을 알 수 있다. 한편, 동상에 구현된 다양한 이미지를 볼 때 석가모니를 상징하는 전륜성왕의 이미지로 보는 견해도 제시되었다.
 왕건이 활동할 즈음 미륵신앙은 당시를 풍미했던 불교신앙이었다. 미륵은 석가모니 사후 56억7천만년 후에 도래하는 말법시대(末法時代)에 도솔천으로부터 하생해 도탄에 빠진 모든 중생을 구원하는 미래불이다. 때문에 미륵은 그 누구도 구원할 수 없는 중생을 제도할 '메시아'라는 이미지와 부합된다. 후삼국으로 분열되어 전국이 전쟁에 휘말리고, 잦은 재난으로 깊은 도탄에 빠진 대중이 가장 희구했던 부처는 바로 미륵불이었다. 이 같은 현실을 적시했던 궁예가 미륵을 자처했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견훤 역시 미륵과 연관을 맺고 있다. 즉, 미륵사지 석탑을 중수하고 있음을 보아 그 역시 미륵의 위대한 힘을 통해 후삼국의 혼란을 극복할 군주임을 자처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와 같은 시대상을 볼 때, 왕건의 행보 역시 그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왕건의 동상은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을 통틀어 유일한 군주의 동상으로, 그의 사후인 10-11세기경에 조성된 것이다. 때문에 이 상의 건립은 후대사람들의 왕건에 대한 인식과 평가가 반영된 결과물로서 해석할 수 있다. 이상의 관점에서 볼 때, 왕건 동상에 미륵불의 이미지가 투영되어 있음은, 문무왕에 이어 통일된 나라인 고려를 건국한 통일의 영주, 불가(佛家)에서 상정한 말법시대와 같았던 후삼국의 혼란을 종식시키고 민중을 평안케 한 왕건을 미륵불과 동일시했던 당시 사람들의 흠숭이 투영된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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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성시 개풍군 해선리에 있는 고려 태조 왕건의 무덤은 신혜왕후 유씨를 함께 묻은 단봉 합장릉으로, 송악산의 지맥인 만수산 등성이에 자리잡고 있다. 원래 이름은 현릉(顯陵)이며, 왕건릉이라고도 한다. 943년에 조성됐으나 역대 왕들의 보호가 각별해 전란이 있을 때마다 묘를 옮겼다. 현재의 능은 1992년 복원하면서 대대적으로 재정비됐다. 북한의 사적 제53호로 지정되었다가 국보 문화유물 제179호로 변경됐다.
 #왕건의 안식처 현릉(顯陵)
 왕건의 임종은 '고려사절요'에 "왕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덧없는 인생은 예로부터 그러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고 잠시 후에 훙서(薨逝)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더불어 "시호(諡號)를 올려 신성대왕(神聖大王)이라 하였으며, 묘호(廟號)는 태조(太祖)라고 하였다. 현릉(顯陵)에 장사지냈는데, 유명에 따라 상장(喪葬)과 원릉(園陵)의 제도는 한나라와 위(魏)나라 두 문제(文帝)의 고사에 의거하여 모두 검약하게 하였으며, 신혜왕후(神惠王后) 유씨(柳氏)와 합장(合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보면 개성시 해선리에 위치한 현릉은 태조 왕건과 신혜황후가 합장된 능침임은 물론, 장례는 그의 유언대로 검소하게 치러졌음도 알 수 있다.
 현재의 현릉은 1993년 사회과학원고고학연구소에 의해 발굴 조사된 이후 정비를 거친 탓에 완벽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렇지만 '조선고적도보'에 게재되어 있는 사진에는 정자각과 비각이 능의 전면에 위치하고 있고, 이로부터 높직한 둔덕 위에 능침이 마련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봉분의 전면에는 문관석과 망주석, 석수(石獸)가 있고, 중앙에는 장명등과 장방형의 상석이 배치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더불어 봉분의 주변에는 석재 난간이 조성되어 있고, 봉분의 하단에는 판석형의 석재를 돌려 호석을 삼았다. 수록된 사진이 상세하지 않아 정확한 현상을 파악하기에 어려움이 있지만, 정자각과 비각, 장명등, 망주석 등의 양식을 볼 때, 현릉의 정비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단행된 것으로 판단된다. 아마도 왕건의 동상이 매납된 1429년에 현릉에 대대적인 정비가 진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더불어 봉분이 위치한 지점이 정자각 뒤편의 높직한 둔덕이라는 점에서는,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왕릉과 차별성을 보이고 있지만, 호석과 난간을 배치한 점에서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이 같은 상황을 볼 때, 현릉은 통일신라시대 왕릉의 구조를 채용하면서도, 봉분의 위치에 변화를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93년의 발굴조사 결과 무덤의 구조는 연도가 없는 단실의 석실분임이 밝혀졌다. 더불어 석실의 내부에서는 청룡과 백호, 소나무와 매화나무 등의 벽화가 확인되었다고 한다.
 
 #황제의 모습으로 부활한 왕건
 왕건은 후삼국의 혼란을 평정하고, 고려를 건국한 통일의 영주이다. 때문에 그 자신이 가졌을 자부심은 물론, 그와 함께 삶을 영위했던 당시 사람들에게도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음은 자명하다. 한국사상에서 통일을 이룬 통치자는 문무왕과 왕건이 유일하다. 문무왕은 죽어서 신라를 지키는 호국용으로 승화되었지만, 왕건은 황제의 모습으로 되살아났다. 물론 광종 대에 이룩된 황제국이라는 위상과도 연관성을 맺을 수 있지만, 보다 주목해야 할 점은 후세 사람들에 의해 황제의 모습으로 부활했다는 점이다. 이는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일 수도 있겠지만, 고려인들은 왕건의 모습을 동상으로 재현해 지속적으로 추모와 존숭을 했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고려사절요'에 사신(史臣)이 말하기를 '태조(太祖)는 너그러움으로써 아랫사람들을 다루었으니 어질고 지혜로운 자들이 호응하였고, 성심으로써 남을 대하였으니 멀고 가까운 이들이 모두 따랐으며, 살리기를 좋아하는 인덕(仁德)은 타고난 성품에서부터 나왔고, 백성들을 가엽게 여기는 마음은 지극한 정성에서부터 일어난 것이다. 왕업을 처음 일으켜 고쳐 시작할 때에 비록 미처 예악(禮樂)에 힘쓸 겨를이 없었지만 그 도량과 심오한 지략, 깊은 인덕과 후한 은택은 진실로 이미 500년 나라의 명맥을 배양시킨 것이다'라고 왕건을 평가하고 있다.
 왕건이 지녔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과 도량, 후삼국의 혼란을 종식시키고 통일을 이룩한 심오한 지략, 성심으로 아랫사람을 대했던 깊은 인덕과 모두에게 베푼 후한 은택'은 바로 고려 왕조를 버티게 한 원동력이었다. 국가의 지도자가 지녀야 할 모든 덕목을 갖추었으니, 이 얼마나 존경받고, 추앙될 만한 통치자의 모습인가.
박경식 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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