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국도개경의 문화유산 - 고려사회의 대축제, 팔관회(八關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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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천년 고려시대의 경기문화

이재범 경기대교수

인류의 특성의 하나로 유희(遊戱)를 꼽는 학자도 있다. 인류 집단은 아주 오랜 기간 자신들의 독특한 형태의 유희를 행해 왔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어서 고대로부터 많은 유희 풍습이 있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등과 같은 풍속 등이 그 대표적 예이다. 현대에도 행사나 의식이 끝나면 뒷풀이를 하는 것도 일종의 인간과 유희와의 관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고려시대에 있어서 가장 큰 국가행사이자 일종의 유희라고 할 수 있는 것이 팔관회(八關會)이다.



#팔관회의 성격

팔관회는 고려시대의 가장 큰 국가행사로서 연등회와 쌍벽을 이루었다. 연등회는 그 성격이 불교행사로서 명확하게 규명되어 있는 데 비하여 팔관회는 그렇지 못하다. 일반적으로 팔관회는 불교적 성격과 함께 토속적, 도교적 성격(郭東珣, 八關會仙郞賀表)이 포함 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또한 시기적으로 성격이 변하기도 하였으며, 국왕의 정책에 따라 시행이 되지 않았던 시기도 있었다. 화랑도와 관련이 있는 선가의 영향도 받았다는 견해도 있다. 팔관회의 팔관은 불가의 팔관재계(八關齋戒)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데, 팔관재계는 재가(在家)의 신도가 하룻 밤낮 동안 살생(殺生)·도둑질·음행((음탕할 음) 行) 등의 여덟 가지 죄를송나라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서긍(徐兢)은 당시 고려의 여러 제도와 풍습을 견문한 내용을 담은 ‘고려도경(高麗圖經·1123년)’에서 ‘팔관회는 고구려 제천(祭天)행사인 동맹(東盟)을 계승한 것’이라 했다. 부여의 영고(迎鼓), 동예의 무천(舞天)도 동맹과 같은 제천행사다. 팔관회는 이같이 고대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민심과 사회를 결집시켜 온 국민이 하나가 되는 통합의 기능을 수행한 축제행사였다. 범하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가 있는 의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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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관회의 유래와 전개

팔관회의 유래는 신라에서 찾고 있다. 551년(진흥왕 12년) 거칠부(居柒夫)가 고구려의 혜량법사(慧亮法師)를 모셔와 승통(僧通)으로 삼고 처음으로 백좌강회(百座講會)와 팔관회법을 설치하였다는 것이 최초의 사례이다. 그 뒤로 572년(진흥왕 33년) 10월20일에 나라에서 전사 장병을 위한 팔관회를 개최하였고, 자장(慈藏)이 황룡사 구층탑을 세우고 팔관회를 개최(645년경)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궁예가 양길과의 비뇌성전투에서 승리한 다음 팔관회로 계승되기도 하였다.

팔관회가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던 시기는 고려시대였다. 팔관회는 때로 중단된 적도 있었으나. 고려 멸망기까지 지속되었던 국가적 행사였다. 고려 태조는 943년 임종에 즈음하여 남긴 ‘훈요(訓要)’ 제6조에서 “내가 지극히 원한 것은 연등과 팔관이었다.……팔관(八關)은 천령(天靈)과 오악(五嶽) 명산대천(名山大川)과 용신(龍神)을 섬기기 때문이다”라고 하여 불교 사상에 토속신앙과 도교 신앙까지를 포함한다고 천명하였다. 실제로 태조는 918년 11월에 팔관회를 위봉루(威鳳樓)에 올라가 관람하면서 ‘부처를 공양하고 신을 즐겁게 하는 모임(供佛樂神之會)’이라고 하였다.

팔관회는 개경에서는 11월 15일, 서경에서는 10월에 개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1083년(선종 즉위년)에는 문종의 국상(國喪)으로 12월, 1200년(신종 3년)과 1357년(공민왕 6년)에는 묘일(卯日)이 불길하다고 하여 11월 14일에 열기도 하였다.

팔관회에서는 포구락(抛毬樂)·구장기별기(九張機別技)·왕모대가무(王母隊歌舞) 등의 팔관가무를 공연하였다. 인종 10년(1132년)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예종이 김부일(金富佾)이 지은 팔관치어구호(八關致語口號)를 크게 기뻐하여 조서를 내려 상용(常用)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송나라 음악가인 기중립(夔中立)은 고려의 악관(樂官)으로 있다가 송나라로 귀국하여 황제 앞에서 팔관치어구호를 읊자 ‘참으로 아름다운 문장이다’라고 격찬하였다고도 한다.

팔관회는 982년(성종 1년) 3월에 최승로(崔承老)가 노역이 많고 우인(偶人)을 만드는 데 많은 경비가 소모된다는 폐지 요구를 성종이 받아 들여 중단된 적이 있다.

987년에는 서경의 팔관회도 폐지하였다. 그러나 993년(성종 12년), 고려가 거란의 1차 침입을 당하자 이지백이 연등(燃燈)·팔관(八關)·선랑(仙郞) 등의 행사 부활을 주장한 바가 있었고, 1010년(현종 1년) 11월 15일에는 개경에서 다시 개최되었다. 이 날은 거란의 성종이 40만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기 하루 전으로 팔관회가 30년만에 부활한 것이다. 이때 팔관회가 부활한 의미는 호국행사로서 결전을 앞둔 고려인들에게 최후의 항전을 다짐하는 의식으로서 거행되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팔관회는 강화천도시에도 행해졌고, 고려 멸망기까지 성대히 거행되었던 고려 최대의 국가행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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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관회장의 모습

팔관회장의 모습은 둥근모양(圓形)의 정원에 윤등(輪燈)을 설치하고 향등(香燈)을 밤이 새도록 걸어 두었으며 높이 50척이 되는 연화대(蓮華臺) 모양의 채색된 누각도 설치하였다고 한다.

팔관회 행사에는 여러 유희(노래와 춤)를 벌였다. 신라의 고사(故事)에서 유래한 사선악부(四仙樂部)의 용(龍)·봉(鳳)·코끼리(象)·말(馬)·수레(車)·배(船)를 표현하였다고 한다. 관원들은 도포를 입고 홀(笏)을 들고 예(禮)를 행하였으며, 구경꾼들은 밤낮으로 즐겼는데 때로는 노래하고 춤추기를 삼경(三更)까지 하였다고 하니 고려인의 흥취를 알만하다. 심지어 어사대에서 사치함과 화려함이 너무 지나치니 엄하게 금지하자는 주장이 나올 정도였다. 그 밖에도 팔관회의 임금 앞에서 행하는 여악(女樂)의 금지, 팔관회 경비의 과도함 등을 이유로 금지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예는 팔관회가 고려인들이 즐겨했던 행사라는 사실을 반등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팔관회는 고려인이라면 누구라도 함께 한다는 의미에서 대사면(大赦免)이 이루어지기도 하였고, 예종이 신숭겸(申崇謙)과 김락(金樂) 두 장군의 충성을 애도하는 도이장가(悼二將歌)를 읊은 장소도 팔관회였다.



#팔관회 무역과 우리의 미래

팔관회는 비단 고려인만의 행사가 아니었다. 팔관회는 당시 고려의 무역이 활성화되는 이벤트의 하나로서 송나라, 동남아시아, 여진, 일본, 아라비아 등지에서 토산물을 바치거나 많은 상인들이 와서 일종의 엑스포와 같은 교역의 현장이 이루어졌다. 1034년(덕종 3년)의 기록은 그들도 함께 팔관회에 참관하였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고려에서는 관계가 원만치 않은 인접국에 대해서는 팔관회 참여를 제지하기도 할 정도로 팔관회의 국제적 위상이 정해져 있었다. 팔관회는 고려가 추구하는 송과 거란에 대해서는 제후국이면서 자국과 기타 국가에 대해서는 황제국의 위치를 갖고자 했던 국가 위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행사였다.

이와 같이 팔관회는 고려인만이 아니라 세계인이 함께 소통하는 자리였다. 고려의 팔관회는 세계와의 소통의 시간이자 공간이었다. 고려는 팔관회를 통하여 국제적 위상을 확보하는 정신적 세계를 나타냈고, 국제관계와 무역에서도 실리적인 이득을 취하는 기회로 삼았다.

팔관회는 우리의 미래라고 할 수 있다. 세계인과 소통하는 고려인의 고유한 행사였던 팔관회는 이를 통하여 세계에 고려를 알리고 세계의 문화를 수용하는 기회였던 것처럼 현재의 우리에게도 이러한 행사의 절실함을 갖게 한다. 최근 대구 등지의 지자체 중심의 팔관회 재현 행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팔관회의 진수는 개경이라는 공간이었다. 지역적인 편협성을 강조한 주장이라고도 할 수 있으나, 2018년의 ‘경기 천년’이 되는 해에 경기도의 행사로서 성대한 잔치를 거행하는 것도 기대해 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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