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천년, 고려시대의 경기문화] (25) 국도, 개경의 문화유산
(3) 개성 첨성대
첨성대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바로 경주에 있는 첨성대(국보31호)를 연상하게 된다. 경주 첨성대를 두고도 그 기능을 다르게 해석하는 편이지만 대체로는 관측하던 시설로 의견이 모인다. ‘삼국유사’에 점성대(占星臺)로 기록하고 있어 신라시대에는 점성대로 불렀을 여지도 남아있다. 첨성대의 진위 여부는 일단 미뤄두더라도 신라에는 누각전(漏刻典)이란 관청이, 고구려는 일자(日者), 백제는 일관부(日官府) 같은 부서가 있어 천체 관측업무를 담당했다. 평양에는 고구려의 첨성대가 있었다는 기록이 ‘세종실록’ 지리지에 남아있고, 근래 들어 북한에서 고구려 첨성대를 발굴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백제의 첨성대는 문헌이나 유구는 보이지 않지만 일본과의 천문역법 교류사실로 미뤄 첨성대가 존재했을 가능성은 크다고 본다.
고려시대 관직 중에도 천문(天文)·역수(曆數)·측후(測候)·누각(刻漏)을 담당하던 서운관(書雲觀)이 있었다. 천문(天文)은 말 그대로 천체에서 일어나는 온갖 현상을 살피는 일을 말한다. 역수(曆數)는 천체의 운행과 기후의 변화가 철을 따라 돌아가는 순서를, 측후(測候)는 기상을 관측하고, 누각(刻漏)은 시간을 측정하는 일을 말한다. 한마디로는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는 일인데 지금 우리가 과학으로 분류하는 분야의 업무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고대로 올라갈수록 하늘을 살피는 일은 국가의 길흉을 점치는 점성학에 가까웠다. 시대가 내려오면서 점차 과학에 기반을 둔 분야로 업무를 확장해 나갔다.
‘고려사‘를 보면 국초부터 태복감(太卜監)·태사국(太史局)으로 나뉘어 천문과 기상관측 업무를 맡아왔다. 1024년(현종 14)에 들어 태복감은 사천대(司天臺)로 이름을 고쳤다. 사천대와 태사국의 업무분장은 명확치 않으나 사천대는 천문 관계의 일을, 태사국은 기상관측을 맡았다고 본다. 이후 몇 차례 관제개편을 거쳤으며 1308년(충렬왕 34)에 사천대와 태사감을 합쳐서 서운관(書雲觀)으로 만들었다. 서운관은 조선초까지 이어지다가 1425년(세종 7) 관상감(觀象監)으로 개칭하였다. 옛 관상감 터인 종로구 원서동 현대사옥 앞에는 관천대(보물1740호)가 남아있다. 돌로 높게 대를 쌓고 계단을 두어 오르내리며 관측을 하였으며 속칭 첨성대라 불렸다. 관천대 상면에 관측기구인 소간의(小簡儀)를 올려놓고 천제를 관측하였다.
고려시대 서운관에는 정3품인 제점(提點)을 두어 업무를 총괄하다가 나중에 판사로 개칭하였다. 제점 밑으로는 19명의 인원을 두었다. 뒤에 판사가 업무를 총괄하면서 전에 비해 구체적인 관측업무로 변화하는 양상이 발견된다고 한다. 이처럼 고려초기부터 말까지 천문과 기상관측을 전담한 중앙부서가 있었던 점은 곧 고려시대 내내 하늘을 살피는 일이 꾸준하게 지속되었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고려시대에 첨성대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의심할 필요가 없는 증거이기도 하다.
아직 실견하지 못한 탓에 개성 첨성대를 가장 상세하게 다룬 ‘조선기술발전사’를 중심으로 개성 첨성대의 실태를 우선 살펴보기로 한다.
이와 더불어 3m 너비에 불과한 1칸짜리 간살임에도 한 가운데에 돌기둥을 받친 점도 눈에 띤다. 바닥과 평면 가운데 세운 돌기둥을 감안하면 잔존하는 개성 첨성대의 단층 석조 구조체 위에 무언가를 더 지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인정된다.
구조의 장대함 외에도 개성 첨성대는 굵직하고 높은 돌기둥 모서리를 접어 장식한 섬세함이 있다. 돌기둥 상부에 놓인 보와 보의 연결은 나비장을 하듯 홈을 파서 철편을 끼우게 돌을 다듬었다. 맞닿은 석재가 벌어지지 않도록 보강한 조치한 것이다. 이처럼 남아있는 석재만으로도 개성 첨성대는 돌을 다루는 고려 석조술의 대범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렇다면 개성 첨성대는 언제 축조하였을까. 여기에 대해서도 의견이 나뉜다. 강도(江都)에서 환도한 뒤 개경을 복구하던 시기에 조성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반면 ‘조선기술발전사’에서 북한 연구자들은 개성 첨성대의 방위를 측정한 결과치를 토대로 적어도 국초인 919년에 기초공사를 하였다고 추정하면서 기존의 919년 축조설과 일치한다고 밝혔다. ‘고려사’에는 1281년(충렬왕 7) 원나라의 곽수경이 만든 달력 수시력이 들어오자 후속조치로서 영대(靈臺)를 만들고 의상(儀象, 관측기기)을 제작하여 일월을 관측함으로써 각도나 광도의 크기가 적절한가를 상세하게 고려하였다고 한다. 영대를 짓고 그 위에 관측기기를 설치하여 하늘을 관측하였던 것이다.
개성 첨성대 외에 고려시대 첨성대로 꼽히는 유적이 또 한 군데 있다. 고려의 임시수도였던 강화도이다. 마니산 정상의 참성단(塹星壇)은 돌로 만든 유적인데 위는 네모로 밑은 둥글게 만든 형태와 제천행사를 펼친 기능면에서 강화도읍기의 고려 첨성대로 추측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마니산에서 천문관측을 했다는 기록도 참성단의 첨성대설을 뒷받침해준다.
천문대로서의 개성 첨성대설을 부인하는 최근의 견해는 앞으로 더 고민할 문제지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서울여자대학교 정연식교수는 ‘王建 탄생의 落星 설화와 개성 첨성대’에서 부인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전개하였다. ‘구릉 사면에 자리한 개성 첨성대의 위치는 사방이 트인 위치가 아니어서 관측하기에 부적합하다’ ‘첨성대로 오르내리는 시설이 없다’ ‘통상 북쪽을 등지고 남쪽 하늘을 관측하던 관습과 달리 서쪽이 개방된 관측공간’ ‘진북(眞北)에서 동쪽으로 15°정도 틀어진 방위’ 등을 들었다. 천문대가 아니라면 개성 첨성대는 어떤 용도였을까. 주장은 이렇다. 고려 태조 왕건의 신성한 탄생을 알리기 위한 상징물이란 것이다. 하늘을 살피는 관측시설로 널리 인정되고 온 개성 첨성대, 이를 보는 시각도 하나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개성 첨성대가 천문대인가 아닌가, 아직 더 풀어야 할 숙제로 남겨두기로 한다. 설사 개성 첨성대가 천문대가 아니라 해도 고려시대의 천문업무를 담당한 관제가 존재했고, 천문 관측 관련한 기록들, 그리고 조선시대로 계승된 천문업무의 전통을 고려하자면 고려시대에, 수도인 개성에 천문대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경미(재)역사건축기술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