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여년간 싱싱한 햇대 찾아 '고품질 조리' 엮어...새 공방 만들어 제자들 양성 하는 것이 꿈

아아ㅏㅇ.jpg
▲ 화려하거나 대단하지 않지만 대(竹)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엮어 하나의 복조리를 완성해 가는 모습이 임건영 명장의 인생과 닮았다. 임 명장은 56년간 손에서 놓지 않았던 대(竹)로 앉은 자리에서 복조리 하나를 금세 만들어냈다.

20~30년 전만해도 집집마다 하나씩 있던 조리가 기술이 발달하며 어느새 사람들의 기억에서 희미해졌다.

쌀을 이는 데 사용되던 조리 본연의 임무는 사라지고 이제는 새해가 올 때마다 간간히 복조리를 파는 사람들의 모습만이 남아있다.

그러나 국산 조리의 명맥을 이어가며 이를 평생의 업으로 삼은 사람이 있다.

56년 동안 조리 하나만 만들어 온 임건영(69)씨는 복조리를 만드는 국내 유일의 명장이다.

국산 복조리를 알리고, 지키고 싶다는 그의 손에서는 반백년이 넘는 세월 동안 대나무가 떨어져 본 적이 없었다.

#손재주 좋던 소년, 조리를 만나다

충남 당진이 고향인 임 명장의 어린 시절은 여느 아이들과 같았다. 가끔 형님들을 쫓아 연을 만들기 위해 대(竹)를 까서 째는 정도였다. 작은 손으로 대를 만지는 것조차 어려워했던 소년은 2~3년이 지나자 대를 다루는 실력이 눈에 띄게 늘었다. 손재주가 좋았던 덕이다.

그런 임 명장이 본격적으로 조리를 배웠던 것은 아랫집 아저씨 때문이었다. 조리를 만들던 아저씨는 어린 임 명장이 대 껍질을 까서 갖다 줄 때마다 사탕을 하나씩 주곤 했다. 사탕을 받는 재미로 대를 깠던 어린 소년은 이후로 아저씨에게 조리 만드는 법을 배웠다.

4~5년 쯤 조리를 만들었을 때는 이미 동네에서 소문날 정도로 훌륭한 조리를 만들었다. 평생을 함께 하게 될 조리와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조리를 본격적으로 만들기 시작했던 56년 전, 임 명장은 누님에게 줄 조리 하나를 만들었다.

조카의 나이와도 같은 이 조리는 공방 한편에 고이 걸려 있다. 지금까지 조리를 만들며 살아온 임 명장의 인생을 보여주는 ‘가보’다.

“손으로 만드는 건 뭐든 자신이 있었어요. 조리를 만들어도 딴 사람들보다 섬세하게 만들어 비싸게 팔리기도 했어요. 튼튼하고 예쁜 조리로 인정을 받았죠.”

당시 55가구가 살고 있었던 임 명장의 마을에는 절반이 넘는 30가구가 조리를 만들어 팔 정도로 수요가 많았다.

그런 가운데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못했던 임 명장의 집에서 조리는 무시할 수 없는 수입원이었다.

땅과 거름이 좋지 않았던 그 시절 쌀이 많이 나지 않아 농사만으로는 겨우 먹고 살 정도로만 빠듯했기 때문이다. 이후 가족들이 함께 조리를 만들어 판 돈으로 땅을 조금씩 사서 늘려나갔으니 임 명장의 가족들에게 조리는 효자 중의 효자였다.

그랬던 조리가 30년 전부터 점점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고, 임 명장에게도 조리만으로 생계를 잇기 어려운 시간이 찾아왔다.

#악착같이 조리를 만들다

농사일이 기계화되기 전 낫으로 벼를 베어 땅에 두드려 쌀을 얻었다. 그런 쌀을 모으다보니 흙과 돌이 섞여있는 것은 당연했다. 쌀을 이는데 조리가 필요했던 것이다. 기술이 발달한 지금은 콤바인과 같이 수확 기계들이 발달하며 쌀에 흙과 돌이 들어갈 일이 없어졌다. 조리 본연의 역할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임 명장의 고향에서도 조리를 만드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사라졌다.

집에 걸어놓으면 그 해의 복을 조리와 같이 일어 얻는다는 복조리만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어려운 상황에도 대와 조리만큼은 손에서 놓지 않겠다 생각하며 복조리를 만들어 팔던 임 명장도 결국 생계를 위해 다른 일을 병행해야 했다.

임 명장은 구두 가게 제단 일을 10년간 하고, 이후 아내와 함께 냉면가게를 차려 20여년간 운영해오고 있다.

냉면가게를 시작하고 나서는 새벽 5시에 공방에 나와 복조리를 만들고, 또 가게가 마치는 시간에 짬을 내 복조리를 만든다.

“겨울에는 먹고살 수 있어요. 새해쯤에 복조리를 찾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하지만 복조리를 1년 내내 많이 찾지는 않죠. 특히 여름 같은 경우에는 날도 덥고, 복조리도 많이 나가지 않으니 생계를 위해 다른 일을 함께 할 수밖에 없었죠.”

국산 복조리가 중국산에 밀려 설자리를 잃어가는 것도 임 명장에겐 안타까운 일이었다.

국산 복조리가 진짜 대를 이용해 만드는 반면, 중국산은 나무껍질에 물을 들여 만드는 것이 많단다. 그러다보니 주문생산으로 가격이 상대적으로 높은 국산 복조리가 밀리고 있다는 것이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조리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람도 많을 겁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국산 조리를 알아주면 좋은데 상황이 그렇지 않아요. 이 추세대로라면 국산 조리는 설자리를 잃게 될 겁니다. 그래서 더 악착같이 조리를 만들려고 합니다.”

#복조리는 내 인생

냉면가게와 함께 자리하고 있는 임 명장의 공방. 그가 가게 안쪽에서 째 놓은 대 한묶음을 갖고 왔다.

조리는 무엇보다 뒤쪽에 우기는 것을 잘해야 예쁜 모양이 나온다며 대 하나하나를 엮어나가던 임 명장은 그 자리에서 작은 복조리 하나를 뚝딱 만들어냈다. 섬세하고 단단하면서 자유자재로 대를 엮어내는 모습이 과연 우리나라 복조리 명장다웠다.

“조리를 만들 때는 어떻게 하면 조리가 예쁘게 나올까 하는 생각으로 만듭니다. 무작정 만드는 게 아니라 연구하고 궁리하면서 나오는 결과물인거죠. 지금의 실력에 자만하지 않고 더 나은 복조리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임 명장의 ‘복조리부심’은 대단하다.

항상 좋은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50여년간 매년 거르지 않고 대밭을 찾아 싱싱한 햇대를 베어 왔다. 대를 까고 다듬어 째고, 이를 조리로 엮어내기까지 매순간 집중하고 최선을 다했다. 자신의 조리를 가지고 가 일이 잘 풀린다는 사람을 만나면 그렇게 마음이 뿌듯할 수가 없었다.

임 명장의 일편단심 복조리 사랑은 수많은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입상한 훌륭한 작품으로 탄생하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지금껏 단 한 번도 복조리 만들기를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에게 복조리는 대단하지 않지만 성실하게 살아온 자신의 인생과도 같았다.

“우연한 기회에 배우게 된 조리였지만, 계속 어설프고 엉성하게 만들었으면 그대로 그만뒀을 겁니다. 예쁘고 튼튼한 조리를 만들어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다보니 자부심이 생겼고, 아직도 조리를 만드는 게 재미있습니다.”

임 명장은 아주 소박한 미래를 꿈꾸고 있다.

언젠가 냉면가게를 그만두게 되는 날, 새로 공방을 꾸려 꾸준히 작품을 만들고, 제자들을 양성하는 것이다.

“나에게 조리를 배운 한 분이 그러더군요. ‘선생님 돌아가시면 조리를 누가 만드냐’고요. 저희 세대에서 조리의 명맥이 끊기지는 않을까 걱정되긴 합니다. 그래서 그저 다른 것 없이 죽는 날까지 조리를 알리고, 남기고 싶은 것이 저의 마음입니다. 이왕이면 젊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배웠으면 좋겠네요.”

구민주기자/kmj@joongboo.com

저작권자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