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천년, 고려시대의 경기문화] (28)국도, 개경의 문화유산
⑧ 개경의 왕실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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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화사 칠층석탑
개성시 부산동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탑이다. 북한의 국보급문화재 제41호로 지정됐다가 국보 문화유물 제139호로 변경되었다. 1020년(고려 현종 11)에 화강암으로 조성된 석탑으로, 원래 장풍군 월고리 영추산 남쪽 기슭 현화사터에 있던 것을 고려박물관으로 옮겼다. 높이는 8.64m.

고려 태조는 ‘우리나라의 대업은 반드시 여러 부처의 도움에 힘입어야 한다. 그러므로 선·교의 사원들을 창건하여 주지를 파견하고 불도를 닦게 함으로써 각각 그 직책을 다하도록 하였다’라고 하여 훈요십조를 통해 불교의 역할을 인정하고 불교를 왕조 통치의 사상적 기반으로 삼았다.

고려시대 불교는 왕조의 체재에 편입되어 국가에 봉사하는 종교였다. 불교국가 고려의 국도 개경에는 국가나 왕실에서 중시하는 절이 수십 곳에 들어서 있었다고 하는데 그 숫자는 과연 얼마나 되었을까?

‘고려사’와 ‘고려도경’을 통해 확인되는 절이 51곳, ‘송사’에서는 70여 사원이 있었다고 한다. 개경에는 왕과 왕비의 초상조각이나 초상화를 봉안하고 명복을 빌던 원찰의 창건이 많았는데 이러한 원찰의 추가로 사원이 밀집되었고, 고려 말에는 개경에만 300여 사원이 있었다고 한다. 과연 개경은 불교중심 도시였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조선시대 15세기까지도 17곳의 절이 건재하였고, 19곳의 절터가 남아있었다. 개성에서 현재 그 위치와 창건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사찰은 34곳, 고려시대 사찰 이름만도 127개나 된다고 한다. 아쉬운 점은 그럼에도 현재 개성에 전하는 불교문화재는 그리 많은 편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고려시대 개경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찰의 대다수는 태조가 창건하였다. 태조는 재위 2년(919년) 수도를 철원에서 개경으로 옮기고 궁궐과 함께 불교사원을 창건하였다. ‘고려사’에 의하면 ‘송악 남쪽에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창건하고 3월에 법왕, 왕륜 등 십사(十寺)를 도내(都內)에 창건” 했다고 한다.

이 사찰 열 곳을 ‘삼국유사’ 에서는 법왕사, 자운사, 왕륜사, 내제석원, 사나사, 보제사, 신흥사, 문수사, 통사(원통사), 지장사로 열거하고 있다. 이후 태조는 후삼국을 통일하는 936년(태조 19년)까지 더 많은 절을 개경에 건립하였다. 대흥사(921년), 광명사·일월사(922년), 외제석원·구요당·신중원·흥국사(924년), 묘지사(927년), 구산사(929년), 안화선원(930년), 개국사(935년), 광흥사·내천왕사·현성사·미륵사(936년) 등이다.

통일까지 계속되었던 사찰 창건이 그 이후에는 이어지지 않기 때문에 태조의 사원 개창은 후삼국의 통일 정책과 병행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고려사’ 최응 열전에 나오는 다음의 대화는 불교를 통해 통일을 이루고자 했던 태조의 바람이 잘 드러나 있다.

‘태조가 최응에게 말하길, “옛날 신라가 구층탑을 만들어 마침내 통일의 일을 이루었으니 지금 개경에 칠층탑을 세우고 서경에는 구층탑을 세워서 그 공덕을 빌어 추한 무리를 제거하여 삼한을 합쳐 한 집으로 만들고자 한다.”

고려시대 중심 도성인 개경과 서경(현 평양), 강도(현 강화도)에는 궁궐을 둘러싼 궁성과 궁성을 둘러싼 황성 그리고 일반 거주지를 포괄하던 나성의 3중 성곽을 쌓아 황도의 상징적인 의미와 함께 수도 방위의 군사적인 목적을 추구하였다.

태조 때는 사찰의 대부분을 궁궐 주변과 궁궐 북쪽 송악산 기슭에 세웠다. 개경의 도시구조가 완성됨에 따라 사찰은 송악산 위쪽이나 외곽 지역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고려 제4대 국왕인 광종대(949년-975년)부터 8대 국왕인 현종(재위 1009년-1031년) 재위 20년(1029년) 나성이 축조되기 전까지 대부분의 절은 황성 밖에 세워졌다. 이 절들은 황성을 보호하는 방어선 형성의 중심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어 당시 개경 사찰의 기능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나성이 완성되자 개경의 영역이 확장되는데 이때 세워진 대부분의 사찰이 나성 외곽에 위치하면서 국방과 교통의 요지로서 기능하였다. 나성의 완성 후 세워진 사찰이 흥왕사·국청사·경천사·천수사 등이다. 1283년의 묘련사와 1309년의 민천사도 나성 밖에 세워졌다.

광종은 재위 2년(951년) 부왕의 원찰 봉은사와 모후의 원찰 불일사를 창건했다. 봉은사는 진전사원으로 태조의 영정을 봉안하였으며 고려 전 기간에 걸쳐 태조신앙의 근거지가 되었다. 광종대 이후에 창건된 사찰은 대부분 원찰이라는 점에 특징이 있다. 현종 때 세워진 현화사, 11대 국왕 문종(재위 1046년-1083년)이 자신의 원찰로 창건한 흥왕사, 15대 국왕 숙종(재위 1095년-1105년)의 원찰로 창건되어 후에 16대 국왕 예종(1105년-1122년) 부부의 진전사원이 된 안화사 등이 대표적이다. 흥왕사는 13대 국왕 선종대(1083년-1094년)에 문종의 진전사원이 되는데 진전의 설치는 그 사원의 격을 높이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왕실과 귀족들이 자신의 원찰에 보시함으로써 중요한 후원자가 되면서 원찰은 정치세력과 긴밀하게 연결되었다. 이점 또한 개경 불교계의 특징적인 일면이라 할 수 있다.

개경 사찰에서는 국가적인 대규모의 정규 의례와 불교 행사가 거행되었고, 승려와 일반민에 대한 종교적인 교육활동 그리고 소원을 빌거나 조상숭배를 위한 장례와 제사 등의 개인 의례가 행해졌다. 사찰은 중요한 모임 장소로도 이용되었으며 사색과 휴식의 공간이 되기도 하였다. 궁궐이나 일반 관청의 업무를 보는 공간으로 사용되기도 했다는 점 또한 개경 사찰의 특징이다.

개경의 사찰은 당시 정치의 중심지이자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이는 문화의 중심지였다. 이 때문에 사찰은 불교 세력을 수용할 수 있는 기반시설로서 사회적 통제 거점으로도 운영할 수 있었다. 또한 개경의 도시 구조를 완성하는 개발 과정에서 사찰이 수행한 거점 역할은 고려 개경 사원의 중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태조가 개경에 많은 사찰을 창건하여 불교 세력을 흡수하고, 고려 국왕들이 불교계의 동향을 중시하며 그로부터 통치의 기반을 유지하고자 노력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개경에는 또한 고려시대의 대표적 불교종단인 화엄종·법상종·천태종·선종의 중심사찰이 자리하고 있었다. 화엄종 사찰 영통사와 흥왕사, 법상종 사찰 현화사, 천태종 사찰 국청사 그리고 선종 사찰 보제사와 광명사 등이다.

영통사는 고려 태조 왕건이 건립한 숭복원 자리에 새로 창건한 사찰로 숭복원 자체가 태조의 증조부가 기거하던 암자를 확장한 사찰인 만큼 영통사는 왕실과 관련이 깊은 사찰이었다. 왕실 주관 불교행사를 자주 거행하였고, 역대 왕들의 행차가 잦았으며 왕들의 초상을 봉안한 진영각도 있었다고 한다. 대각국사 의천은 이 절에서 출가하였다.

흥왕사는 문종의 대대적인 지원을 통해 1067년(문종 21년) 세운 화엄종 사찰로 상주승려가 1,000명이었고 완공시 건물 규모는 2,800칸이었다. 1070년 성을 쌓았는데, 이는 흥왕사를 궁궐 남쪽의 이궁 역할을 하도록 계획했기 때문이다. 성터는 지금도 남아 있다. 현화사에서는 ‘초조대장경’이, 흥왕사에서는 ‘속장경’이 간행되기도 하였다.

현 개성주변의 사찰유적으로는 고려 광종 21년(970) 창건한 관음사(국보유적 제125호)와 현종 18년(1027) 창건한 영통사(국보유적 제192호)가 있다. 관음사의 고려시대 유물로는 칠층석탑(보존유적 제540호)과 관음굴이 있다. 관음사 뒤편에 자리한 관음굴에는 대리석제 관음보살좌상 두 구가 봉안되어 있었는데 이중 한 구는 현재 평양의 조선중앙력사박물관으로 옮겨져 보관되고 있다.

영통사는 16세기경의 화재로 주요 전각이 모두 소실되었는데 2005년 남측의 대한불교 천태종과 북측의 조선경제협력위원회 공동사업으로 29개 동의 건물을 복원하였다. 현재 영통사에는 오층석탑(국보유적 제135호)과 함께 당간지주, 대각국사비(국보유적 제155호), 영통사 동·서삼층석탑(동 삼층석탑 보존유적 제541호), 영통사 경선원 대각국사부도 등의 문화재가 전하고 있다.

2013년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열린 제 37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는 개성의 중요 유적군 12곳을 포함하여 ‘개성역사유적지구’를 세계유산으로 등재했다. 이때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고려 성균관(국보유적 제127호) 일부는 현재 고려박물관으로 운영 중이다. 박물관 야외에는 다음의 사찰 문화재들이 전시되어 있다.

고려 태조 18년(935년) 창건된 개국사의 석등, 현종 12년(1021년)에 건립된 흥국사석탑(국보유적 제132호)과 현종 11년(1020년)과 12년(1021년)에 각기 건립된 현화사 칠층석탑(국보유적 제139호)화 현화사비(국보유적 제151호), 현화사 당간지주, 그리고 광종 2년(951년)에 세운 불일사오층석탑(국보유적 제135호), 원통사 부도 등이다. 개국사에 속했던 남계원의 칠층탑은 일제 강점기에 서울로 옮겨와 현재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개성 남대문(국보유적 제124호) 누각에는 연복사(보제사) 종이 있다. 보제사는 개경 환도 이전 선종의 중심사찰이었다. 종은 1563년 화재로 절이 소실된 이후 남대문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종의 몸통 상부에는 ‘황제만세(皇帝萬歲) 국왕천추(國王千秋)’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광종은 즉위 원년인 950년 ‘황제’를 칭하였고 다음 해 개경을 ‘황도(皇都)’로 칭하였다.

심영신 경기도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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