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천년 고려시대의 경기문화] (28) 국도, 개경의 문화유산
⑨ 개성 남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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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성 남대문 전경
18세기 문인화가 강세황은 45세 되던 1757년(영조 33)에 개성유수 오수채의 초청으로 개성을 찾았다. 여러 날을 묶으면서 개성 일대 명소를 들러 경치를 그렸다. 당시 그린 그림들은 ‘송도기행첩’이라는 제목의 화첩으로 꾸며져 지금까지 전한다. 그 화첩의 인상 깊은 장면은 송도 전경으로 알려진 개성의 남대문이었다. 강세황이 그린 남대문 장면은 구도가 독특하다. 하단에 바짝 붙여서 남대문을 그리고 뒤로는 곧바로 뻗은 대로, 그 좌우에는 지붕이 낮은 초가집이 길게 늘어서고 초가집 뒤는 번듯한 기와집들이 지붕을 잇대고 있는 개성의 모습을 그렸다. 가로변의 초가집들은 가게들로 추정된다. 대로 끝은 산세가 우뚝한 산이 서 있는데 이 산은 개성의 주산인 송악산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고려의 왕도였던 개성은 조선시대에 들어서 개성상인으로 널리 알려졌듯이 상업이 번성한 도시였고 그 상업의 중심지가 남대문 일대였다. 강세황이 그림에 묘사한대로 개성이란 도시는 남대문을 들어서면 대로변 좌우로 가게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고, 남대문은 개성 상점가의 중심이었다.

개성의 남대문은 고려시대가 거의 끝나가는 공양왕 때 공사를 시작했다. 공사가 마무리 된 시점은 왕조가 바뀌어 조선이 건국하고 태조 2년째 되던 1393년이었다. 고려 말에 들어서 고려는 잦은 왜구의 침입과 북쪽에서 홍건적이 쳐들어오는 전란을 겪었다. 대응책으로 제시된 방안이 내성(內城) 축조였다. 최영 장군은 ‘(개성 나성이) 지나치게 넓어 10만의 병력을 가지고도 지키기 어렵다고 지적하면서 성 안에 내성을 축조하여 우환에 대비해야 할 것’을 건의 하였다. 최영의 건의는 공양왕 때 받아들여져, 경기도와 서해도의 민정과 지방 승려들을 불러 내성 축조하는 일을 맡겼다. 이렇게 내성 축조의 필요성은 그 이전부터 거론되다가 실천에 옮기지 못한 숙제였는데, 이 때 와서 비로소 착수하기에 이른 것이다. 하지만 고려말의 정치적 변란 속에 내성 축성공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중단되고 말았다. 개성 수창궁에서 즉위하고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는 왕도인 개성을 정비하는 한편 마무리하지 못했던 내성 공사를 끝내고 그 정문인 남대문도 완성시켰다. 그 때가 1393년(태조 2)이었다.

내성이 축조되기 이전 고려의 도성 개성에는 세 겹의 성벽이 에워싸고 있었다. 가장 안쪽에 궁궐을 둘러싼 궁성이 있고 그 바깥에 황성이 있어서 궁궐과 관청을 감쌌으며 제일 외곽에 나성이 있었다. 나성은 개성을 둘러싼 산등성을 잇는 불규칙한 형태의 성벽으로 길이는 대략 17㎞에 달하는데 조선시대 한양 성곽과 엇비슷했다. 나성은 흙을 다져 쌓고 성문 주변만 돌로 쌓은 방식인데 오랫동안 손을 보지 않아 고려말 무렵에는 나성은 전체적으로 퇴락한 상태였다고 짐작된다. 최영장군이 도성을 지키기 어렵다고 지적한 데에는 나성이 넓은 점도 문제였지만 이미 성벽이 퇴락한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내성 남쪽에 정문 격인 남대문이 들어서면서 개성 시가지에는 이전과 다른 변화가 적지 않았다. 남대문이 자리한 지점은 고려시대에 개성의 중심대로가 교차하던 십자가로라 부르던 곳이었다. 개성은 동서 방향으로 간선도로가 열리고 북쪽 황성 정문에서 남쪽으로 뻗은 또 하나의 대로가 있어서 두 간선대로가 시가지 중심에서 교차했고 그 지점을 십자가로라고 불렀다. 남대문의 위치는 십자가로의 약간 남쪽에 자리 잡았다. 고려시대 개성 시가지 중심가로에는 장랑(長廊)이라고 하는 건물이 길게 도로변을 따라 설치되어 있었다. 장랑에는 상점들이 입점해서 개성 사람들의 일상 생활용품을 판매했다고 한다. 십자가로는 이런 장랑이 교차하는 중심부였다. 바로 이런 번화한 지역에 남대문이 들어선 것인데, 남대문이 지어지면서 십자가로 번화가의 남쪽 일부는 성문 바깥으로 나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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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기행첩'의 송도 전경
표암 강세황·국립중앙박물관·2013에서 전재

조선시대에 들어와 개성은 종2품 수령이 근무하는 유수부가 되었다. 비록 도성인 한양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경기도 안에서 도성 다음으로 번화하고 인구가 많은 고을이었다. 개성이 번화한 만큼 그 남문인 남대문의 위상도 더불어 높았다. 개성 내성에는 동문과 서문도 있었지만 남문은 가장 사람들의 왕래가 많고 문 주변이 상업으로 번성하였다. 강세황의 그림에는 문 북쪽으로 넓은 대로가 있고 도로 좌우에 지붕이 낮은 건물이 도로를 따라 길게 이어진 모습인데 이 집들이 도로변 가게들이었다고 짐작된다. 고려 때 설치된 장랑의 가게들은 강세황이 개성을 구경하던 18세기까지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던 셈이다.

개성 남대문은 조선시대 임금들도 종종 지나는 관문이었다. 개성 인근에는 조선 태조의 첫 번째 비인 신의왕후의 제릉과 제2대 임금인 정종이 묻힌 후릉이 있었는데, 이 제릉과 후릉에 직접 전배하기 위해 거둥하는 일이 심심치 않게 있었다. 제9대 성종은 1474년(성종 5) 9월에 제릉 참배를 목적으로 한양을 떠나 7일 정도 개성에 묶었으며, 제11대 중종은 1535년(중종 30) 9월에 제릉 친제를 목적으로 개성에 와서 목청전(穆淸殿)에도 들르고 성균관 명륜당에서 문과시험과 만월대에서는 무과시험도 치렀다. 당시 왕은 박연폭포까지 구경하였는데, 왕이 폭포까지 행차하게 되면 연도 백성들이 힘이 들것을 우려해서 반대하는 의견들이 많았지만 왕은 이를 묵살하고 폭포에 가서 종실과 재상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이렇듯이 왕이 개성에 들르게 되면 반드시 남대문을 거쳐 지나갔다.

개성 남대문은 주변이 평탄해서 문루에 올라서면 사방을 조망하기에 알맞았다. 서남쪽으로 제법 멀리 있던 연복사 5층탑까지도 잘 보였다고 전한다. 앞서 말한 강세황의 개성 시가 장면에는 남대문 서쪽에 남대문보다 작은 건물 하나를 그렸는데 안에는 종이 걸려 있다. 남대문 옆에 종루가 있었던 사실을 전해주는 증거이다. 남대문에 종이 걸린 연유는 이렇다. 1563년(명종 18) 연복사에 화재가 발생하여 절이 타버리자 연복사 종을 남대문에 옮겨 달았는데 종을 걸기 위해 남대문 문루 서쪽에 따로 종루를 짓게 된 것이다. 남대문에서는 시각에 맞추어 종을 쳤고, 개성 주민들은 이 종소리에 맞추어 하루 일과를 이어갔다고 한다.

1393년(태조 2)에 창건한 남대문은 이후 여러 차례 소소한 수리를 거치며 유지해 오다가 1816년(순조 16)에 개성유수 김선이 주도하여 크게 수리를 했다. 당시 공사를 기록한 ‘남대문중수기’에 의하면 문루가 낡아 수리했는데, 누각의 제도는 옛 방식을 그대로 따랐고 현판과 편액들은 칠을 다시 했다고 적었다. 이를 볼 때 비록 여러 차례 수리를 했지만 건물의 형태는 창건 당초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고 판단된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개성 남대문은 큰 수난을 겪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와 읍성 성벽을 철거하는 일이 전국에서 벌어졌다. 철거된 성벽 주변의 토지는 한반도로 이주해 온 일본인들 차지가 되곤 했다. 개성에서도 성벽을 철거하면서 남대문도 파괴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를 전해들은 개성 주민들은 맹렬한 반대를 펼쳤다. 결국 일제는 서쪽 종루만 헐어내고 문루는 손대지 못했다. 하지만 내성이 사라지고 내성의 동문과 서문도 철거되었다. 이제 성벽의 흔적은 모두 사라지고 단지 남대문만이 옛 십자가로에 남게 되었다. 남대문의 수난은 광복 후에도 이어져서 6.25전쟁 때는 폭격을 맞아 건물이 전소되고 말았다. 건물에 걸려있던 연복사 종은 석축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고 전한다. 다행히 전쟁이 끝나고 복구하였는데 1954년에 옛 모습대로 문루를 짓고 그 안에 종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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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성 남대문 '다포식' 공포
개성 남대문은 남북한을 통 털어 얼마 안 되는 고려말조선초에 지은 목조건물이다. 물론 6.25 때 소실된 아픔이 있지만 소실되기 전의 본래 모습을 충실히 계승하여 다시 지었으니 본래의 건축 가치는 남아있는 셈이다. 이 건물의 의미는 개성의 남쪽 출입문이라는 점 말고도 우리나라 건축사 전개의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우리나라 목조건물은 고려후기에 와서 중국의 신경향을 받아들여 처마를 지지하는 공포부분에서 새로운 방식을 만들어냈다. 보통 다포식이라고 부르는 방식이다. 당시까지는 주심포 즉 공포를 기둥 머리 위에만 짜던 방식이 주류였는데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인 주간포(柱間包)를 설치하는 방식이 유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포식은 지붕의 힘을 분산시키는 효과를 내서 결과적으로는 건물을 더 안정적으로 지지할 수 있다. 또한 공포를 처마 밑에 가득 짜는 동시에 끝 부분을 장식적으로 처리해서 집을 한층 화려하게 꾸미는 장식효과도 발휘한다. 이런 다포식은 고려말 원나라 장인들과 접촉하면서 고려에 확산되기 시작했다고 보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현재 고려시대 다포식 건물은 잔존하는 사례가 많지 않다. 특히 개성 남대문 공포는 간결하면서 부재 크기를 조절해서 힘을 지탱하는 효과를 높일 뿐 아니라 끝부분은 힘찬 곡선 형태를 갖추고 있어 장식에 치우친 후대의 다포식과 다른 조선초기의 특징을 잘 드러낸다고 평가할 수 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붓과 종이를 들고 경승지를 찾아다니며 화폭에 경치를 담았다. 요즘 우리들은 붓과 종이 대신에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남녘 땅 곳곳을 누비고 다니며 빼어난 경치를 담아낸다. 18세기에 강세황은 개성에 들러 남대문을 비롯해서 화담, 대흥사, 박연폭포 등 주변의 경승지를 두루 다니며 마음에 드는 곳을 골라서 화폭에 옮겼다. 언젠가 우리도 가방 하나 메고 카메라를 어깨에 두르고 자유롭게 강세황이 누볐던 개성 코스를 뒤따라 멋진 풍경을 마음에 담을 수 있는 그날이 오기를 바란다.

이경미 (재)역사건축기술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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