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천년, 고려시대의 경기문화] (31) 천도, 강도의 문화유적
② 인쇄술 발달과 고려대장경의 인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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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륵사 대장각기비(보물 제230호)
목은 이색이 공민왕과 돌아가신 부모님의 명복을 빌고자 대장경을 인출하고 대장각을 지어 봉안한 사실을 기록한 비이다. 본래 신륵사에는 경·율·소 삼장을 인출하여 이를 수장하던 대장각이 극락보전 서쪽에 있었다고 전해지나 현재는 자취를 찾을 수 없다.
유네스코는 인류의 문화 계승과 발전에 대한 기록으로, 과거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미래사회를 조망할 수 있도록 해주는 소중한 인류의 유산들을 대상으로 세계기록유산을 선정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문화재의 수는 총 11개이다. 세계에서는 네번째로, 아시아에서는 가장 많다. 훈민정음, 조선왕조실록, 직지심체요절, 승정원일기, 해인사 대장경판 및 제경판, 조선왕조의궤, 동의보감, 일성록, 5.18 민주화운동 기록물, 난중일기, 새마을운동 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문화유산이다. 이처럼 우리나라에 많은 기록문화유산이 존재하는 것은 고려대장경, 세계최고의 금속활자본인 직지 등을 만들어낸 우수한 인쇄기술을 보유하였기 때문이다.

#불교, 인쇄술의 발달을 촉진시키다

우리나라 인쇄의 시작은 목판인쇄로부터 시작되었다. 현재 전하는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본은 경주 불국사 석가탑에서 나온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으로, 751년(신라 경덕왕 10)에 제작된 것이다. 초기의 목판인쇄는 불교의 경전 중 짧은 다라니경과 같은 불경을 소형판에 새겨 다량으로 찍어 납탑공양(納塔供養)한 데에서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 뒤 9세기 후반기인 신라 말기가 되면 목판인쇄는 시문(詩文) 등의 일반 학문서적을 판각해내는 단계에 이를 정도로 많이 보급되었고, 고려에서도 불교 서적의 판각이 성행하였다. 1007년(목종 10) 간행한 개성 총지사판(摠持寺板) ‘일체여래심비밀전신사리보협인다라니경’을 비롯하여 11세기에 인출한 ‘초조대장경’과 ‘속장경’, 그리고 13세기 전반기에 다시 판각한 ‘재조대장경’과 같이 대규모 판각사업은 목판인쇄의 발달이 최고조에 달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려조의 목판인쇄술의 발달은 조선조에 들어와 숭유억불정책을 국시로 삼아 주로 경사(경사) 중심의 책의 간행으로 옮겨지게 되었지만, 중앙관서에서 제작한 인쇄는 매우 정교하여 고려에 뒤지지 않았다.

그러나 목판인쇄는 한 책의 출판으로 국한되었기에 효용성이 떨어져서 시간과 비용을 절감하고 필요한 책을 간편하게 찍어내어 공급할 수 있는 방법으로 활자인쇄가 시작되었다. 최초의 활자로는 11세기 중반 북송의 필승(畢昇)이 제작한 교니활자(膠泥活字)이나, 교니는 재료가 흙이고 조판이 어려워 실용화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고려에서는 금속활자를 발명함으로써 주자(鑄字) 인쇄를 성공시킨다. 기록으로 전하는 자료인 13세기 주자로 인쇄한 ‘상정예문(詳定禮文)’과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가 있는데, 특히 ‘남명천화상송증도가’의 금속활자가 최근 발견되면서 그 진위에 대한 논란이 진행 중이다. 주자인쇄의 발달은 지방의 사찰에까지 보급되어 1377년(우왕 3)에 청주목의 흥덕사에서 주자를 만들어 찍어낸 ‘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이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전하고 있는데, 이 책은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보다도 78년이나 앞서 제작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이다.

#금속활자, 국민의 문화수준을 높이는 역할

이러한 고려의 주자인쇄는 조선조로 계승되어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눈부신 발전을 하였다. 활자의 재료도 동·연·철·찱흙 등과 같이 그 종류가 다양하며, 글자체가 다양해지고 활자가 정교하며 우아하다. 활자인쇄는 경사자집(經史子集)의 여러 분야에 걸쳐 필요한 책을 고루 찍어 널리 반포하여 학문을 발전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특히 민간에서까지 활자를 다양하게 만들어 인쇄하게 되어 서민문화의 저변을 확대하는데 이바지함으로써 문화사적인 면에서 그 의의가 크게 평가된다.

한편 우리의 전통 한지와 우수한 먹도 인쇄발달에 크게 기여하였다. 종이는 중국 후한시대의 채륜에 의해 105년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우리나라에서는 담징이 610년에 일본에 채색, 종이, 먹, 연자방아 등을 전해준 것과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간행시기로 보아 상당히 이른 시기에 종이를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조의 활발한 불경 편찬사업은 제지업의 발달을 촉진시켰고, 종이의 질도 좋아 송나라 손목(孫穆)이 지은 계림지(鷄林志)에는 ‘고려의 닥종이는 윤택이 나고 흰빛이 아름다워서 백추지(白錘紙)라 부른다’라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 우리가 현재 부르고 있는 종이라는 이름도 닥을 가르키는 저피(楮皮)가 조비, 조해, 종이로 변천하여 생겨난 것이다. 한지는 재료가 닥뿐만 아니라 뽕나무, 황마, 짚, 율무잎과 줄기, 이끼 등으로 그 종류가 100여종이 넘을 정도로 다양하다.

먹의 주성분은 그을음, 아교와 향료이다. 주성분인 그을음에는 소나무를 태워서 얻는 그을음인 송연(松煙)과 기름을 태워서 얻는 유연(油煙)이 있다. BC 1세기경 유적인 경남 다호리 유적에서 붓자루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당시에 이미 먹을 사용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명나라의 도종의(陶宗儀)가 쓴 철경록(輟耕錄)에도‘고구려에서 송연먹을 당나라에 세공으로 바쳤다’고 기록하고 있고, 일본의 정창원(正倉院)에는 신라양가상묵(新羅楊家上墨) 또는 신라무가상묵(新羅武家上墨)이라고 양각되어 있는 먹을 소장하고 있어 고구려와 신라에서도 좋은 먹이 생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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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반야바라밀다심경 판본(고려대장경 판본)-고려시대에 불경(佛經)과 장소(章疏)를 집대성해 인간(印刊)한 불경으로 해인사의 법보전 동서간고 수다라장에 보관돼 있다.
#인쇄문화의 백미, 고려대장경

우리나라 인쇄발달의 백미는 고려 때 모두 3차례에 걸쳐 제작된 대장경이다. 고려의 대장경은 현재 해인사에 보관된 ‘팔만대장경’만 남아있지만, 고려 현종 때 거란의 침입을 불력으로 퇴치하기 위해 처음으로 제작된 것이 ‘초조대장경’이고, 그 후 의천이 ‘속장경’을, 고종 때 몽골의 침입으로 ‘초조대장경’이 소실되자 다시 제작한 것이 ‘재조대장경(팔만대장경)’으로 이미 두 차례 대장경 판각의 경험을 바탕으로 제작된 것이 ‘팔만대장경’이다.

한문으로 번역된 최초의 대장경은 중국 송(宋)나라 때 완성된 ‘송판대장경(宋版大藏經)’이며, 그 이후 대장경이 완간한 것은 고려이다. 거란의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되자 이를 부처의 힘으로 극복하고자 시작한 대장경은 만18년 만인 1011년(현종 2)에 제작되었다. 이를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이라 하는데 ‘송판대장경’의 내용과 체재를 토대로 하여 복각하였다. 그 뒤 초조본의 보완작업은 계속되었고, 그 판본은 처음에는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 나중에는 팔공산 부인사(符仁寺)에 봉안·보존되어왔으나 몽골의 침입으로 불타버렸다. 그러나 인본(印本)의 일부가 일본의 쓰시마섬(對馬島)과 국내에 남아 있어서 ‘초조대장경’의 모습을 알 수 있다.

문종의 넷째아들인 의천(義天)은 ‘속장경(續藏經)’을 간행한다. 1085년(선종 2) 송나라에 가서 3,000여 권에 달하는 불교 장서를 수집하여 귀국 후 흥왕사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고 1092년부터 속장경을 제작하기 시작하여 1,010부, 4,740여 권의 불전을 9년에 걸쳐 경판으로 새겼다. 그러나 속장경도 병화로 소실되어 전하지 않지만, 의천이 지은 불경목록집인‘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을 통해서 속장경 안에 어떠한 문헌들이 들어 있었는가를 알 수 있다. 현재 속장경 판본의 일부는 송광사(松廣寺)와 일본 도다이사(東大寺)에 남아 있다.

국보 제32호로 지정된 ‘재조대장경’은 1011년에 새긴 초조대장경이 1232년 몽골의 침입으로 소실되자 불력으로 물리치고자 하는 호국불교적인 의미에서 당시의 임시 수도였던 강화도에 1236년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1251년에 완성하였다. 강화도성 서문 밖의 대장경판당에서 보관하다가 1398년 5월에 해인사로 옮겨진 것으로 보이며, 현재 남아있는 경판은 1,516종 81,258판(최근 문화재청 조사에서 대장경의 판수는 81,352판으로 확인되었으며, 그중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것이 36판으로, 고려때 제작된 것은 총 81,136판이다)인데 고려시대에 판각하였다고 해서 ‘고려대장경’이라고도 하며, 판수가 8만여 개에 달하고 8만 4천 법문을 실었다고 하여 ‘팔만대장경’이라 부르고 있다. 현전하는 세계의 대장경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고 체재와 내용도 가장 완벽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불교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을 뿐 아니라 고려시대 목판 인쇄술의 발달 수준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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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박물관소장, 우리나라에 전해지는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중 유일한 권 제1로 11세기경에 찍어낸 초조대장경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일본소재 대장경 판본, 약탈이 아닌 조선정부의 선물

이 대장경은 지금까지 5차례 간행·유포하였다는 역사기록이 있는데, 일본의 왜구들의 요구에 의해 간행하거나 전국의 유명 사찰에 봉안하기 위해 간행하였다는 기록으로 남아있다. 특히 고려말 1381년(우왕 7)에 목은 이색의 주도하에 간행한 대장경 판본은 여주 신륵사에 보관하다 1414년(태종 14)에 태종이 일본왕에게 선물로 보낸 것으로 ‘태종실록’에 전하고 있는데 일본의 오타니(大谷)대학교 박물관에 이 대장경 판본이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대장경 연구 전문가인 박상국 선생에 따르면 “오래된 대장경 판본은 모두 일본에 남아있는데 이는 숭유배불정책을 쓴 조선왕조가 일본 사신들의 끊임없는 요구로 고려대장경 판본을 선물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에 있는 고려대장경 판본들은 일본이 약탈한 것이 아니라 숭유억불책을 쓴 조선이 썼던 외교적 흥정거리였다”고 발표하였다. 주로 승려들로 구성된 일본 사신들은 고려대장경 판본은 물론 원판까지 달라고 요구하면서 단식투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하니, 대장경 판본은 일본에서 최초의 한류스타였던 것이다.

장덕호 실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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