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천년, 고려시대의 경기문화] (32) 천도, 강도의 문화유적
③ 강화의 고려 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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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강종의 부인인 원덕태후 유씨의 무덤이다. 석물은 없어졌고 봉분과 무덤을 둘러싼 담도 무너졌던 것을 1974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손질해 고쳤다.
#한국사의 중심에 자리한 강화도

한반도의 서해안에는 수많은 섬이 있다. 이중에서 우리 역사의 중요했던 많은 순간을 함께 했던 곳이 바로 강화도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하점면 부근리 지석묘가 현존하는 최대 규모의 것임을 보더라도 청동기시대에 이 지역이 지닌 의미가 남달랐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삼국시대로부터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는 기간에는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지는 않고 있다. 하지만, 940년에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강화’로 개칭되면서 지정학적인 중요성이 주목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예성강 유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떨쳤던 왕건이 이 섬이 지닌 지리적 중요성을 인식한데서 비롯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후 강화도는 몽고의 2차 침략기인 1232년(고종 19)에 이곳으로 도읍을 옮김으로써 환도하는 1270년(원종 11)에 이르기까지 39년간 고려의 왕도로서 그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비록 무신정권 하에서 몽고병란을 피해 단행된 천도(遷都)라 하지만, 일국의 수도로서의 기능과 역할을 수행했을 만큼 전략적으로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러 정묘호란(1627년)의 발생으로 인해 인조가 일시 피난했던 곳이며, 병자호란(1636년) 때에는 왕실 인척들의 피난처로 활용되었다. 이와 더불어 효종에서 숙종에 이르는 동안 강화도에는 내성과 외성을 구비한 강화성의 축성(築城)을 비롯해 12진과 53돈대가 설치되는 등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기능을 수행했다. 또한 1849년에 왕위에 오른 강화도령 철종이 성장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처럼 조선시대에 이르러는 피난처, 유배지, 군사적 요충의 기능을 수행했던 섬이었다. 이후 병인양요(1866년)와 신미양요(1871년)에 이어 강화도 조약(1876년)의 체결에 이르기까지 한국 근대사의 획을 그었던 사건의 중심에 강화도가 자리하고 있다. 이같은 정황을 보면 강화도는 선사시대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바, 이는 섬이라는 지정학적 특수성이 시대와 정황에 따라 활용된데 기인한 것으로 판단된다.



#섬 안의 고려 왕릉들

한국사에서 강화도가 가장 주목을 받았던 시기는 무엇보다도 몽고의 침략을 피해 왕도로서의 기능을 수행했던 1232년에서 1270년에 이르는 시기일 것이다. 비록 섬이지만 강화는 고려가 지향했던 모든 일의 중심에 위치해 수도의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 조성된 역대 고려왕과 왕실의 무덤은 수도로서의 강화의 위상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천도 이전과 이후의 고려 왕릉이 개성 인근에 조성되고, 조선시대에 이르러 대부분의 왕릉이 한양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배치되었음과 같은 맥락이라 하겠다.

강화도에 조성된 고려시대의 왕릉은 모두 5기가 알려져 있다. 석릉(碩陵), 홍릉(洪陵), 곤릉(坤陵), 가릉(嘉陵)과 왕비의 능으로 추정된 능내리 고분이 그것인데,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석릉은 고려 제 21대 국왕인 희종(熙宗, 재위 1204-1211)의 능으로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에 있는 진강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1992년에 사적 제369호로 지정되었다. 희종은 당시 실권자였던 최충헌의 제거에 실패한 후 재위 7년인 1121년에 폐위되어 강화 교동에 유배되었는데, 1237년(고종 24년)에 승하한 후 이곳에 묻혔다. 석릉은 다른 왕릉과는 달리 ‘고려희종석능(高麗熙宗碩陵)’이라 적힌 묘비석과 석인상을 비롯해 봉분에 둘리어진 호석(護石) 등을 볼 때 다른 왕릉과는 달리 비교적 격식을 구비한 것으로 보인다. 2001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의해 발굴 조사되었을 때 다량의 청자가 출토되어 주목을 받은 바 있다.

홍릉은 고려 제 23대 국왕인 고종(高宗, 재위 1213-1259)의 능으로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 산 180번지에 자리하고 있다. 1971년에 사적 제224호로 지정되었다. 고종은 46년간 재위했지만, 최씨 무인정권과 몽고의 침략으로 인해 국정의 전반을 장악하지 못했다. 1232년 강화도로 천도를 단행한 후 28년에 걸쳐 대몽항쟁기를 보냈으며, 당시 재상이었던 유경(柳璥)의 집에서 1259년에 승하했다. 남향으로 조성된 묘역은 모두 4단의 석단으로 구성했는데, 가장 상단에 왕릉을 조성하고, 하단에는 혼유석과 문인상 4구가 배치되어 있다.

곤릉은 고려 제 22대 국왕인 강종(康宗)의 비(妃)인 원덕태후(元德太后, ?-1239)의 능이다.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에 소재한 덕정산의 가장 남쪽 능선에 위치하고 있는데, 1992년 사적 제 371호로 지정되었다. 남동향의 좌향을 지닌 묘역의 주변에는 사용한 곡장(曲墻)을 설치했고, 봉분의 전면에는 2단의 석열을 두었다. 2004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의해 발굴 조사되었는데, 난간석 부재 및 석인(石人)과 석양(石羊)을 비롯해 13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청자를 포함한 다양한 유물이 출토된 바 있다.

가릉은 고려 제 24대 국왕인 원종(元宗)의 비(妃)인 순경태후(順敬太后, ?-1236)의 능이다. 강화군 양도면 능내리에 있는 진강산의 서남단 구릉지대에 자리하고 있는데, 1992년 사적 제370호로 지정되었다. 남향을 취하고 있는 묘역은 1916년 조선총독부에 의한 조사 당시에 이미 도굴된 상태였고, 2004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의해 발굴조사 되었다. 조사 결과 8각으로 이루어진 호석과 더불어 석수 및 13세기 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청자와 원풍통보(元豊通寶. 1078-1085 주조)가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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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 덕정산에 소재한 고려 제22대 국왕인 강종의 비인 원덕태후(?~1239)의 능에서 나온 청자의 모습.

능내리 고분은 강화군 양도면 능내리에 소재한 퇴모산(退帽山)의 남쪽 구릉에 위치하고 있는데, 가릉과는 70m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다. 2004년 지표조사를 통해 이미 도굴에 의해 석실입구가 드러난 상태로 확인되었고, 2006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의해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결과 피장자의 신분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석릉, 곤릉, 가릉에서 출토된 것과 동일한 양식의 청자가 출토되어 왕비의 능으로 추정된 바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홍릉을 제외한 네 개의 능은 발굴조사가 진행되어 강도시기(江都時期)에 조성된 고려 왕릉의 면면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대체로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있다.

첫째, 무덤은 모두 남향이나 남동향의 좌향(坐向)이며, 대부분이 해발 300-400m 정도의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이같은 지형을 볼 때 개성 인근의 고려왕릉이나 조선시대의 그것과 같이 묘역의 전면이 개방된 자연조건을 채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둘째, 석실은 모두 입구가 전면(前面)에 개설된 횡구식(橫口式) 석실분이다. 평평한 천장 양식을 구비하고 있으며, 석실내부 중앙에는 정방형의 관대(棺臺)를 설치하고 있다. 이러한 무덤의 양상은 삼국시대 이래 축조되었던 전통적인 양식으로 그 계보가 고려시대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셋째, 봉분의 주변에는 8각 또는 12각으로 조성된 호석을 배치하고 있다. 무덤에 호석을 배치함은 봉분의 훼손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라 판단된다. 더불어 봉분의 둘레에는 난간석을 설치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넷째, 봉분의 전면에는 대체로 석인상과 석수들을 배치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먼저 왕릉에 설치되었던 석조물에 대해서는 고려와 그 이전의 왕릉에 대한 서적인 ‘려조왕릉등록(麗朝王陵謄錄. 1638-1690 편찬)’에 “홍릉에는 난간은 죽석(竹石) 여덟 개, 석수 세 쌍, 장군석 4기가 남아있다. (중략) 가릉은 석수 한 쌍, 난간죽석 1개, 대석(臺石) 2개가 남아 있다. 그 나머지는 석물은 각양각색으로 흩어져 묻혀있다.(후략)”라고 기록된 점으로 보아 본래는 난간석과 더불어 석인상이 조성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현존하는 석인상들은 조각기법으로 보아 대부분 후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곤릉에서 확인된 석양과 가릉에서 출토된 석수 등을 근거로 추정할 때 봉분을 두른 호석과 난간석을 비롯해 다양한 석물이 조성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왕릉의 출토품 ‘고려청자’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유산 중 청자는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아이콘이다. 중국 청자와는 다른 비색이라는 고려만의 색감과 다양한 기형, 그리고 기법에서 단연 고려문화의 특수성을 대변한다. 실제 청자는 고려시대의 왕과 왕실 및 귀족의 무덤에서 모두 출토되는 보편성을 띤다. 그리고 이러한 측면은 몽고침략기에 임시수도였던 강화도에 조성된 왕릉에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앞서 언급한 5기의 왕릉 중 발굴조사가 진행되지 않은 홍릉을 제외한 나머지 4기의 왕릉에서 모두 청자가 출토된 바 있다. 이중에서도 가장 주목되는 왕릉은 희종의 능침인 석릉이다. 석릉에서 출토된 청자들은 대접과 접시 위주의 생활용기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대체로 13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비색의 색감을 지니고 있음은 물론 연꽃, 국화, 넝쿨, 모란, 구름, 학 등의 문양이 장식되었다. 뿐만 아니라 장식기법은 음각과 양각, 상감과 퇴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구사되었다. 더욱이 국화넝쿨 무늬 대접에서는 압출양각 기법으로 조성된 문양과 함께 구연부에 금속 테를 둘렀던 흔적이 확인되어 당시로서는 최상급 청자가 부장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과 같은 양식과 제작 기법이 동원된 석릉 출토 청자들은 당시 최고급 청자의 공급처인 강진 사당리와 부안 유천리 가마에서 생산된 것으로 추정된 바 있다. 이와 더불어 능내리 고분에서 출토된 용이 압출양각된 원통형 향로 역시 주목되는 유물이다. 한편, 가릉에서는 북송(北宋)때의 가마였던 요주요(耀州窯)에서 생산된 청자 접시편이 출토된 바 있다.

이처럼 비록 몽고의 침략을 피해 천도한 강화도에 조영된 왕릉이지만, 출토된 유물의 양상을 보면 왕릉의 부장품으로 당시 최고품의 청자를 선택했음을 알 수 있다. 더불어 전시임에도 불구하고 장진과 부안에서 생산된 최고급 자기들이 강화도에까지 실제로 수급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실례이기도 하다. 이들 부장품들은 각 왕릉의 조성연대가 정확하다는 점에서 고려청자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박경식 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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