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북에 남긴 정책 아이디어 400여건, 후배들 길잡이 되길"
모두가 만류하는 SNS정책 제안...공직경험 오롯이 담아 6년째 지속

20150916010157.jpeg
▲ 박수영 부지사는?
▶부산 출생(1964년) ▶서울대 법대 ▶하버드대(정책학석사) ▶버지니아폴리테크닉주립대(행정학박사) ▶행정고시 합격(29회) ▶대통령비서실 인사수석실 선임행정관 ▶행저안전부 혁신정책관 ▶경기도 기획조정실장·경제실장 ▶경기도 행정1부지사
그는 한 달전 ‘사표’를 썼다. 난생 처음이다. “사인할 때 손이 떨렸다”고 했다. 대통령은 ‘2015년 9월 30일’자로 그의 사표를 수리했다. (1급 공무원이 신청한 명예퇴직은 대통령이 재가한다) 30년 공무원이 30일에 퇴직한다. 공복(公服)을 벗는 박수영 경기도 행정1부지사를 지난 16일 오전 집무실에서 만났다. 후배 차를 얻어타고 경기도청으로 가는 동안 스피커에서 피아졸라의 ‘사계’(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사계)가 흘러나왔다. 그의 삶은 비발디의 ‘사계’보다는 피아졸라 쪽에 가깝다. 물 흐르듯 안정적인 비발디 바이올린의 현과 활처럼 클래식하진 않다. 불협화음처럼 들리는 열정적인 피아졸라 반도네온(손풍금)의 건반과 울림통처럼 탱고스럽다. 자신의 페이스북에 남긴 400여 건의 정책 제안은 ‘공무원 박수영’의 30년 소신, ‘사람 박수영’의 51년 철학을 웅변해 주는 흔적중 하나다.

―시원 섭섭하실 것 같다.

“처음에는 많이 섭섭했다. 사표라는 것을 처음 써 봤다. 박수 받을 때 떠나라는 말이 있다. 밀려서 나가는 것은…. 자존심의 문제다. (남경필)지사의 업무 습득 속도가 매우 빠르다. 1년만에 도정은 물론이고 직원들도 다 파악했더라. 이제는 하산해도 되겠다는 판단이 섰다.”

―10월 1일 아침에 눈을 뜨면 낯설 것 같다.

“아마도 습관적으로 세수하고 출근하려고 하지 않을까. 새벽 1시에 자고 아침 6시 일어나는 습관이 중학교때부터 몸에 배어 있다.”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첫 날 계획은 세웠나.

“아버지와 할아버지 산소에 가려고 한다.”

―퇴임식은?

“안 하기로 했다. 우선 울 것 같다. 그리고 국정감사를 준비하는 직원들 시간을 빼앗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폐 끼치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아침에 수원역 노숙자센터에 들러 봉사하려고 한다. 점심시간에는 도청 구내식당에서 배식을 하면서 눈을 마주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 할 생각이다.”

―경기도청에서 6년이나 근무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 세가지만 꼽아달라.

“판교테크노밸리 조성, 판교 환풍구 사고 수습, 사전컨설팅감사 제도가 떠오른다. 공직에는 큰 변화를, 경기도정과 국정에는 임팩트를 줬다. 판교테크노밸리는 기업 본사가 경기도로 옮겨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경기도가 경제 심장이 되는 역할을 했다. 판교 환풍구 사고는 세월호 참사로 멍든 대한민국에 새로운 모델로 갈등 해결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사전컨설팅감사 제도는 복지부동의 근본적인 원인을 뒤집었다.”

―공무원 30년, 짧게 정리해달라.

“공인이라는 생각을 단 하루도 잊은 적이 없다. 반듯하게 생활하려고 했다. 남들이 어렵다고 하는 자리, 힘들다고 하는 자리, 바쁘다고 하는 자리만 골라 다닌 것 같다. 지지리 복도 없다. 사무관(5급)때부터 중앙공무원교육원에 보내달라고 했는데 결국 못 가봤다. 본부의 바쁜 자리, 힘든 자리에서 원 없이 일 했다. 50년쯤 일 한 것 같다.”

피아졸라의 ‘사계’는 하나의 완성된 곡이 아니었다. 원제는 ‘네 계절의 포르테냐(아르헨티나 민속음악)’다. 후대 바이올리니스트와 작곡가가 그의 작품 속에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찾아내서 편곡한 명반이다. 남반구(아르헨티나)와 북반구(이탈리아)의 계절이 어긋나는 문제는 피아졸라의 여름에 비발디의 겨울 악장을 녹이는 방법으로 해결했다. 불가항력적이지만, 그는 자신이 목표했던 공무원 삶에 방점을 찍지는 못했다. 내 관점에서 본 박수영은 국정 컨트롤타워(국무조정실장) 역할을 했더라면, 문제의 답을 찾기 위해 계절을 바꾸는 발상까지 했을 레알 공무원이다.

―대형 갈등을 풀어냈다. 경기도청 광교신청사 갈등 조정자 역할도 맡았는데 시간이 없어 보인다.

“잘 될 것 같다.”(박 부지사는 이틀 뒤인 18일 합의를 이끌어냈고, 그 결과는 남경필 경기지사와 염태영 수원시장이 21일 발표했다)

―광교신청사 건립 필요성에 대한 논란은 두고두고 계속될 것 같다.

“광교신청사는 오로지 도민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행정적인 차원에서 진행한 것이다. 김문수 전 지사는 여러 번 안 하겠다는 선언을 하려고 했다. 계속 막았다. 도민과의 신뢰를 깨트리고, 약속을 깨는 것은 안된다고 했다.”

―페이스북에 많은 정책과 아이디어를 남겼다.

“(현직 관료에게는)상당히 위험한 일이다. 많은 친구와 동료, 심지어 기자들까지 쓰지 말라고 하더라. 윗선에서 보면 찍혀서 차관, 장관 못하게 된다고 걱정해줬다. 하지만, 꿋꿋하게 6년 동안 쓰고 있다. 30년 공직 경험이 녹아 들어간 정책을 남겨놓고 떠나면 후배들은 거기서 출발할 수 있다. 아무 것도 남겨놓지 않고 떠나버리면 후배들은 다시 맨 땅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대한민국 발전은 없다. 차관, 장관 못해도 대한민국은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20150916010153.jpeg
―미국의 해리티지, 브루킹스 같은 민간 연구소를 만들겠다는 꿈은 현재 진행중인가.

“그렇다. 대한민국 바꾸는 생활을 연구하는 생활정책연구소를 만들고 싶다.”

파아졸라의 여름에 갈무리 된 비발디의 겨울은 원래 한 곡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럽다. 타의든, 자의든 박 부지사의 정치인 변신은 남미의 여름에 녹아 든 유럽의 겨울처럼 낯설지 않다. 최근 경기도의회에서 그의 내년 총선 출마를 기정사실화하면서 번외 이슈로 삼았던 것이 단적인 예다.

―도의회에서 거취에 관련된 질문이 나왔다. 남경필 지사가 대신 답변했는데, 기회가 있었더라면 어떻게 대답했을까 궁금했다.(부지사는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도의원의 질문에 직접 답변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

“부지사는 정치와 행정이 만나는 자리다. 1급 공무원은 신분 보장이 안된다. 정치와 행정의 중간에 있기 때문이다. 국회, 도의회, 이익단체, 시위하는 분들, 시민모임 등 다 만나야 한다. 반쯤 정치인이 될 수 밖에 없는 자리다.”

―가족들이 반대하지 않았나.

“어머니가 반대하신다. 아내는 반대하지 않는다. 운명 같은 것이 있는 게 아닌가 느낀다.”

―이유가 뭔가.

“30년 전 사무관때는 내 시간의 3분의 1 가량을 국회, 감사원 등 외부기관에 빼앗겼다. 지금은 3분의 2다. 권력의 축이 행정에서 국회로 많이 넘어갔다. 대한민국에 산적한 문제가 많다. 행정만으로 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대한민국에 살면서 이런 정책, 저런 정책 해보고 싶은 욕구, 욕망도 있다.”

―많은 선배 공무원들이 정치인 변신에 실패했다.

“가장 공무원답지 않는 공무원이란 소리를 많이 들었다. 복장부터 일하는 방식 등등. 틀을 깨려고 노력했다. 가능하면 큰 틀에서 나라를 보려고 했다. 일자리·복지·건축·외교·조세 등 넒은 분야를 보려고 노력해왔다.”

―나중에 실패한 이유를 물어보면 기름을 빼지 못한 것이 패인이라고 하더라.

“쉽지 않겠지만 각오는 하고 있다. 빼야 한다. 김문수 전 지사가 도지사 그만두기 전날 저녁, 맥주 3병 사들고 공관으로 찾아갔다. 서울 동작 보궐선거에 나가지 않는 이유를 설명해줬다. 국회의원 3번, 지사 2번 하면서 관료의 기름이 (몸에)꽉꽉 배었다고 하더라. 바닥으로, 낮은 곳으로 가서 기름을 빼지 않으면 좋은 정치인이 될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소록도로 떠나고, 꽃동네로 가고… 그런 자세를 보면서 많이 생각하고 많이 배우고 있다.”

―관료 출신은 헝그리 정신이 없다고들 한다.

“갑으로 살았기 때문에 그렇다.”

―정치적 이벤트를 한다는 가정아래 던지는 질문이다. 원희룡 제주도지사, 나경원 국회의원, 김난도·조국 서울대 교수를 초대하면 와줄 것 같은가.(이들은 서울대 법대 동기동창생들이다)

“나경원은 올 것이다. 원희룡은 현직 도지사니까 정치 중립성 때문에 못 올 것 같다. 남경필 지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선거법, 정치의 중립성 문제에 걸리지 않은 이상 와주실 것이라고 믿는다. 원희룡 지사도 법적인 문제만 아니면 얼마든지 올 친구다.”

피아졸라의 겨울은 비발디보다는 덜 춥고, 봄은 조금 더 따뜻하다. 철이 바뀌는 변화는 밋밋하지만, 색깔 만큼은 분명하다. 겨울과 봄의 갈림길에 선 박 부지사는 수원에서 인생 2막 1장을 시작한다. 민간인 첫날(10월 1일) 아주대학교 강단에 선다. 노후 대책으로 구입한 수원 광교신도시 상가형 주택으로 이사도 한다. 부산에서 태어나고 서울에서 성장한 박 부지사는 수원에서 새로운 계절을 맞는다.

―이사 날짜는 잡았나.

“10월 15일에 한다.”

―길일인가?

“그렇다고 한다.”

―이제 정말 수원시민이 됐다.

“수원시민이 된지는 오래됐다. 관사에서 계속 살았다.”

―후배 공무원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 많을 것 같다.

“대한민국이 매우 어렵다. 경제적으로도, 외교적으로도 쉬운 일이 하나도 없다. 문제도 산적해있다. 그런데 사건사고가 많다 보니 높은 곳에서부터 낮은 곳까지 발등의 불을 끄기도 바쁘다. 이래서는 큰 문제들이 장기적으로 해결이 안된다. 공무원은 정치상황이 흔들리고 사건사고가 발생해도 뚜벅뚜벅 장기적인 시각으로 나라를 끌어가는 유일한 존재라는 생각을 잊지 말아야 한다. 뚜벅뚜벅 혼을 바쳐서 자기 몫을 해야 한다.”

피아졸라의 네 계절은 박 부지사와 닮았다. 담대하고 열정적이면서도 낭만적이다. 공무원의 삶은 고독하지만, 민간인의 삶은 외롭다. 경기도청은 우연한 기회에 얻은 큰 인재를 잃게 됐다. 올 겨울은 유난히 춥고 길게 느껴질 것 같다.

한동훈기자/donghun@joongboo.com

사진=노민규기자 




저작권자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