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천년, 고려시대의 경기문화] (33) 천도, 강도의 문화유산
④ 참성단(塹城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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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성단의 모습
#단군이 하늘에 제사한 곳, 참성단

고가도. 17세기 중반 본격적인 간척사업으로 육지와 연결되기 이전에 참성단이 있던 섬이다. 고가도는 마니산 또는 마리산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정상에 참성단이 있다. 강화군 화도면 지역이다. 현재에는 조금 가파르지만, 계단으로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 등허리에 땀이 촉촉하게 내릴 쯤 정상에 오른다. 단바람을 껴안고 마주하는 툭 트인 사방은 오를 때마다 맛이 다르다. 맑은 날이면 눈에 걸린 아무 것도 없이 파란 하늘과 마주해서 좋고, 흐린 날이면 구름을 타고 하늘에 머무는 신선 같아 좋다. 눈이라도 맞는 행운을 얻으면 하얀 천지와 하나된 것 같아 좋다. 참성단에서 맛볼 수 있는 것들이다.

고조선 이후 고조선과 단군에 대한 역사인식에 관심이 있는 필자에게 참성단은 자연스럽게 글쓰기의 주요 주제 중에 하나가 되었다. 참성단에 대한 몇 편의 논문을 쓰면서 근 20년 동안 매년 개천절 새벽에 참성단을 오른다. 엊그제 개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별빛이 가시지 않은 어스름을 벗 삼아 턱밑의 숨을 짓누르며 정상에 오를 때면 접신한 무당과 다를 바 없는 이상스런 무모함(?)도 가지곤 했다. 그곳이 참성단이다.

“마리산 정상에 참성단이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단군이 하늘에 제사하던 제단이다”. ‘고려사’에 전하며 참성단과 단군의 관련성을 전하는 가장 오랜 기록이다. 이 짧은 기록은 두 가지 사실을 전제로 한다. 하나는 단군이 제천을 주관하던 존재라는 점, 다른 하나는 참성단은 제단이라는 점이다. ‘고려사’에서 전조선(고조선·단군조선)의 건국시조, 단군과 관련해서 전하는 기록이어서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고조선 건국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삼국유사’에서 천신(天神) 환인의 아들인 환웅이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온 곳과 곰과 호랑이가 사람 되기를 빌었던 신단수, 신정(神政)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알려진 단군과도 일정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마리산에 이궁(離宮)을 짓다

마리산은 서해 경기만을 거쳐 고려 개경의 관문이었던 예성강 벽란도를 오가던 모든 선박들이 반드시 지나야할 곳이었다. 여기를 통과하지 않으면 예성강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서해로 나갈 수도 없었다. 물론 고려의 서남해나 송나라로 갈 수 없었다. 경기만 연안이 이어지는 길목에 마리산이 있었다. 그 정상에는 해자가 설치된 요새 정도로 이해되는 참성이 있었다. 마리산이 육지와 가까우면서 바다로 둘러싸여 자연스럽게 해자를 두른 모양새가 갖추어졌기 때문이다. 고려가 건국되기 전에 태조의 아버지인 융(후에 세조로 추증)은 궁예에게 귀부하면서 “송악에 성을 쌓으면 조선·숙신·변한을 아우를 수 있는 큰 뜻을 이룰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발어참성을 쌓았다. 여기서의 참성도, 후에는 고려 궁성으로 확대되었겠지만, 요새 정도의 의미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마리산 정상에는 지나는 배들의 안전이나, 혹 모를 군사적 사고를 대비하기 위해 소수의 군사들을 주둔시키고 이를 경계하는 시설이 갖추어졌을 것이다. 또 멀고 가까운 뱃길의 안녕을 빌기 위한 제사시설도 마련되어 이를 위한 제의도 이루어졌을 것이다. 최소한 고려 건국 이후부터는 도읍인 개경의 바닷길을 옹위하는 역할을 했다. 기록에서 고려 전기에 마리산에는, 강화의 옛 명칭이었던 혈구와 함께, 왕실에 물고기를 공급하기 위한 어량이 설치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급한 물살을 가로막아 물이 한 곳으로만 흐르게 터놓고 거기에 통발이나 살을 놓아 물고기를 잡는 것을 어량이라고 한다. 개경과 멀지 않은 이곳에서는 급류를 활용한 조업이 있었다. 성종 때 최승로는 여기를 방생소로 삼자는 건의를 한 적도 있다.

1232년(고종 19) 7월 몽고의 침입에 왕실 수호를 명분으로 무인집정자였던 최우에 의해 진행된 강화도로의 천도는 모든 상황을 바꾸어 놓았다. 언제까지일지, 과연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 강화는 고려의 도읍이 되었다. 궁궐과 성곽 등 모든 시설이 개경을 본 따 이루어졌다. 종묘와 사직, 사찰 등도 마찬가지였다. 결과적으로 패전으로 1270년(원종 11) 개경으로 환도할 때까지 38년간 강화는 고려의 도읍이었다. 계속되는 몽고군과의 교전, 그리고 강화의 조건으로 내걸어진 고려 국왕의 원나라 직접적인 조회 요구, 거듭된 흉년으로 흉흉해진 민심에 따른 민란 등 모든 것은 고려 국왕을 더욱 초라하게 할 뿐이었다. 조정에서는 왕실의 평안을 기원하려고 모든 방법을 고민해야했고, 그 대책은 즉각 시행되어야만했다. 이런 측면에서 왕실에 복을 빌려는 이론으로 초기부터 막강한 영향을 가졌던 풍수도참의 영향력은 더욱 힘을 얻었다.

1259년(고종 46) 마리산 남쪽에 이궁을 지었다. ‘고려사’에서는 전교시라는 관청에 속한 정9품의 교서랑인 경유라는 사람이 그렇게 하면 왕실의 터전을 굳건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건의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때 마리산에 이궁을 지은 것은 풍수를 업으로 삼아 고종 말에 정5품의 무반직인 중낭장에 임명되었던 백승현이 주도했다. 그는 국가 운명을 부흥시킬 명당과 그 방법에 대한 고종의 물음에 “국왕이 혈구사에 행차하여 법화경을 암송하고 삼랑성에 궁궐을 지으면 효험이 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숙종 때 도참으로 남경 건설에 대해 국왕을 자문했던 김위제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고종은 재상들의 합좌회의를 명하고 백승현과 경유, 판사천사 안방열 등에게 이에 대한 이해득실을 논란하게 하였다. ‘고려사’에서는 그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백승현이 여러 마리의 말에 도교 경전과 부적·불교·풍수음양·도참 등의 서적을 싣고 와서 자유자재로 말하는데 그 궤변이 무궁무진했다. 경유 등은 그 말의 기세를 꺾을 수 없었다. 재상들이 이를 어찌해야하는지를 묻자, 경유 등이 당황해하며 백승현의 말을 비록 믿을 수 없지만 우선 시험해보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에 삼랑성과 신니동에 임시로 궁궐을 지으라는 왕명이 있었다.” 결국 1259년 마리산에 이궁을 지은 것은 백승현의 도참설을 내세운 고종의 뜻이었고, 그곳은 다름 아닌 신니동의 임시 궁궐이었다. 단군이 세 아들에게 쌓게했다는 삼랑성과 단군이 하늘에 제사했다는 참성단이 있는 마리산에 임시 궁궐을 지은 것은 백승현의 이론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신니동 가궐이 바로 마리산 이궁, 흥왕이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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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마니산 개천대제
#원종, 참성단에서 하늘에 제사하다

국왕이 묘지사에 갔다가 또 마리산 참성에서 직접 초제(醮祭)하였다.

1264년 6월 7일, 국왕 원종이 참성단에서 하늘에 제사했음을 전하는 ‘고려사’의 기록이다. 초제는 별을 제사하는 도교의 제사의례이다. 밖으로는 국왕을, 안에서는 황제를 칭하던 고려 국왕들은 초기부터 궁궐 곳곳에서 별을 제사하는 초제를 지내고 있었다. 이때 원종도 도교의례로 별을 제사했다. 이전의 국왕들이 모두 궁궐에서 초제를 했던 반면에, 원종은 궁궐이 아닌 야외 제단에서 했다. 그런데 이것도 백승현의 적극적인 주도에 따른 것이었다.

몽고에서 국왕이 직접 그들의 도읍인 북경으로 와서 황제에게 신하의 예를 표할 것을 재촉하는 사신이 왔다. 이런 요구는 고종 때부터 있었고, 원종은 태자로 있을 때 부왕을 대신하여 다녀온 바 있었지만, 더 이상 미룰 수 있는 명분이 없었다. 고려 조정에서는 이에 대한 대책 수립에 골몰하였다. 그럼에도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국왕을 순순히 몽고에 보낼 수도 없었다. 고작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무언가에 기대어 비는 것밖에, 백승현은 당시의 무인집정자였던 김준을 앞세워 국왕에게 다음과 같은 비책을 아뢰었다. “만약에 마리산 참성단에 행차하여 직접 초제를 하고 또 삼랑성과 신니동에 임시 궁궐을 지어 대불정오성도량이라는 법회를 직접 열면, 8월이 못되어 반드시 감응이 있어 직접 원나라에 가는 일을 막을 것이고 삼한이 변하여 진단이 되어 큰 나라가 오히려 와서 조공을 바칠 것입니다” 원종은 이 말을 믿고 백승현에게 내시대장군 조문주·국자좨주 김구·장군 송송례 등과 함께 임시 궁궐을 짓도록 했다.

그는 이때에는 김준을 통한 간접적인 방법으로 원종에게 대책을 말하고 있다. 앞서의 예언이 징험을 보지 못하고 고종 승하라는 최악의 결과로 나타나 6년이 지난 그때까지도 그를 배척하는 분위기가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부시랑이었던 김궤가 우복야 박송비를 통해 김준에게 고종 때 가궐 창건에 대한 일의 사정을 말했으나, 김준은 오히려 백승현의 말에 깊이 현혹되어 있어 오히려 죽임을 당할 위험에서 겨우 목숨을 건졌다. 원종을 직접 대면한 백승현은 또 원종의 이름을 바꿀 것을 직접 요청했다. “도참에 희룡의 후손이 중흥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마땅히 주나라 강왕의 이름인 쇠(釗)로 왕의 이름을 고쳐야 합니다” 원종도 처음에 이 말을 따랐지만, 고구려왕 ‘쇠’가 제명에 죽지 못한 것을 꺼려 곧 옛날 이름으로 바꾸었다. 그의 말을 들은 부왕이 징험을 보지 못하고 승하한 일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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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수비
#삼한이 변해 진단(震旦)이 되다

도참을 토대로 한 백승현의 요청으로 원종은 참성단에 올라 하늘에 제사했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삼한이 변하여 진단이 된다”고 했다. 고려 건국의 이념은 삼한(마한·진한·변한)에서 출발하여 삼국까지 이어져온 것을 통합하는 것이었다. 이른바 ‘삼한일통’ ‘일통삼한’이다. 그런데 이제 이를 넘어 ‘진단’이 된다는 것이다. 세계관의 변화, 역사인식의 변화를 의미한다. 여기서 진단이란 고조선을 뜻한다. 건국 이후 삼한에 머물던 고려의 역사인식체계가 고조선으로 확대된다는 것이다. 백승현은 원종에게 고조선의 시조 단군의 통치행위를 따르도록 요청한 것이다. 이때 고조선의 건국사실을 기록한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의 저자인 일연과 이승휴도 강화에 머물면서 백승현의 건의를 용납한 원종의 조치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후 ‘삼국유사’와 ‘제왕운기’가 편찬되었다.

참성단은 고조선 시조 단군의 통치행위를 전하는 유적이다. 탄생의 전하는 묘향산, 도읍지로서의 평양, 산신이 된 구월산의 유적과는 성격이 다르다. 원종의 참성단 초제는 이후 조선후기까지 국가제사로서 국왕을 대신하는 제관들이 파견되어 매년 봄가을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재까지 매년 개천절에 그 전통은 계승되고 있다. 물론 그 내용과 형식에서 많은 변형이 이루어져 원형을 찾아보기 어렵다. 참성단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조선 숙종 때 중수의 기록은 참성단 아래의 암벽에 새겨져 있다. 특별한 사정이 아니면, 개천절마다 이곳을 찾는 이유는 민족주의와 관계가 없다. 그렇다고 학문적 관심만도 아니다. 그 중간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참성단은 고조선 건국시조 단군의 통치유적으로 유일하게 전해지는 것이라는 점이다.

김성환 경기도박물관 전시교육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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