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천년, 고려시대의 경기문화] (34) 경기 남부의 문화 유적
① 고려의 3경 운영과 남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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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중식, 백악춘효도
#우리 역사에서의 다경제(多京制)

대한민국의 유일한 도읍은 서울이다. 서울은 국도(國都), 특별시이다. 그리고 부산·인천·대구·대전·광주·울산 등의 광역시가 있다. 특별자치도인 제주도, 특별자치시인 세종시도 있다. 이 도시 또는 도(道)는 경기도·강원도 등의 광역자치단체와 비교하여 다른 위상을 가지고 있다. 현재 실시되고 있는 지방자치제도의 한 특성이다. 이런 유래는 동아시아의 오랜 전통이었다. 중앙과 지방, 지방 군현에서의 위계를 기본으로 계서적인 통치체제를 운영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부도(副都)·배도(陪都)·별도(別都)·별경(別京) 제도는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국도 버금의 위상이다.

중국에서 수나라와 당나라는 서경과 동경, 한나라는 동경과 서경·북경, 후주는 동경과 서경, 후량은 동도(東都)와 서도(西都), 후당은 동경과 서경·북경, 후진은 동경과 북경이 있었다. 송나라는 변경((물 이름 변)京, 동경)과 서경·북경·남경, 요나라는 상경과 남경·중경·동경·서경, 금나라는 중도(中都)와 남경·북경·동경·서경이 있었다. 이중에서 앞에 언급한 것이 국도, 나중의 것이 부도 또는 배도의 위치에 있었다.

우리 역사에서도 이런 도시 운영의 특성을 찾을 수 있다. 고구려의 국도인 평양성과 별도인 국내성 그리고 한성(漢城)의 3경, 신라의 국도인 금성과 5소경(小京), 발해의 국도인 상경을 포함한 5경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국도와 배도의 관계는 지방제도 측면을 넘어 황제국 체제의 운영과 관련되어 있었다. 국도와 배도의 관계가 황제국 체제를 위한 필수조건은 아니었지만, 그 운영의 충분조건 중에 하나였다.

#고려의 국도와 배도(陪都), 부도(副都)

고려의 국도와 배도 역시 이런 측면에서 파악할 수 있다. 외왕내제(外王內帝, 고려는 대외관계에서 국왕, 국내에서는 황제를 칭하였다)는 고려 왕실의 운영원리였다. 그 유일의 국도는 개경(開京)이었다. 황도(皇都)·상경·상도(上都)·중경으로도 불렸다. 개경은 고려의 근본, 즉 중심 ‘一國之本’이었다. 송나라의 역사책인 ‘송사’에서는 그곳을 개주(開州) 촉막군(蜀莫郡)으로 기록하고 있다. ‘촉막군’은 개경의 별칭이 아니라, ‘송악군’을 중국어 발음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그렇게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몽고의 침입으로 사직을 옮겼던 피난 도읍인 강도(江都, 강화도)를 제외하고, 고려에는 서경과 동경, 남경의 또 다른 배도가 있었다. 그렇지만 이들이 모든 시기에 똑같은 기능을 한 것은 아니다. 서경‘평양]의 경우에는 태조 왕건의 명으로 고려 건국과 거의 동시에 성립되어 개경과 함께 양경(兩京) 체제의 한 축이었다. 10세기 후반 성종 때 신라의 왕도였던 경주를 동경으로 정해 삼경 체제를 운영하면서 개경을 중심으로 서경과 동경은 황제국 고려를 지지하는 중심축이 되었다. 그리고 11세기 중반 문종을 거쳐 11세기 후반부터 12세기 초반의 숙종 때 동경을 남경으로 대체하면서 양주를 중심으로 하는 현재의 경기도 일원은 고려의 수도권역으로 등장했다. 고려의 부도 역할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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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윤겸, 백악산
#저울추에 비유되었던 목멱양(木覓壤), 남경

서경·동경·남경은 고구려·신라·백제의 도읍이었다. ‘송사’에서는 고려가 국도를 제외하고 삼경을 설치한 것에 대해 삼국을 역사적으로 계승하려는 측면에서 그곳을 부도로 삼았다고 기록했다. 고려 건국 초부터 대내외에 선포했던 “삼한을 통일했다는 의식”과도 관련이 있다. 또 15세기 후반 양성지(1415∼1482)는 고려에 사경(四京)이 있었던 반면에 조선에는 한성과 개성의 양경뿐이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경도(京都)를 상경한성부로, 개성부를 중경, 경주를 동경, 전주를 남경, 평양을 서경, 함흥을 북경으로 삼을 것을 건의했다. 고려의 국도와 부도의 관계를 계승하여 조선도 상경 한성부를 국도로, 나머지 동·서·남·북·중부의 5경을 부도로 하자는 것이다. 천자만 하늘에 제사하고 제후는 산천 제사에 그친다는 화이론 중심의 관념에서 벗어나, 세조 때 하늘을 제사하는 원구단((둥글 원)丘壇)의 설치와도 관련이 있다.

고려 전기에 전해지던 ‘신지비사(神誌秘詞)’라는 풍수도참 관련서적에서는 개경과 서경, 남경의 관계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신지비사’는 단군시대에 신지(神誌)라는 사람이 지은 비방(秘方)을 담은 책으로 알려져 있다.

저울에 비유하면 저울대는 부소(扶(트일 소))요, 저울추는 오덕(五德)을 갖춘 땅이며, 극기(極器)는 백아강(百牙岡)이다. 위 세 곳에 도읍하면 70개국이 항복해서 조공할 것이고 그 지덕 (地德)에 힘입어 신기(神氣)를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저울의 머리와 꼬리를 정밀하게 하여 수평을 잘 잡으면 나라가 흥하고 태평성대를 보장받을 것이요, 가르쳐 준 세 곳에 도읍하지 않는다면 왕업이 쇠퇴하리라.(‘고려사’)

이 예언은 1096년(숙종 1)에 위위승동정이란 벼슬에 있었던 김위제(金謂검은 돌 제)가 남경 건설의 이론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위위승은 국가 의장(儀仗)에 사용하는 물건과 기구에 관련된 업무를 담당했던 관청인 위위시(衛尉寺)에 속했던 종6품의 관직이고, 동정은 실직이 아닌 명예직이었다. 즉 그는 국왕의 순행 등에서 의장과 관련한 위위시의 종6품 명예직을 가졌었다. 또 그는 예종 때 주부동정에 있었는데, 이 역시 실직이 아니었다. 그런 위치의 김위제가 숙종에게 ‘신지비사’를 인용하여 남경 설치를 적극 주청한 것은 풍수도참에 해박한 이론을 겸비하여 왕의 측근에서 국사의 제반 운영에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고 자문했음을 뜻한다. 당나라 일행(一行)에게서 지리법을 배운 도선(道詵)의 비기(秘記)가 그에게 전해졌다고 ‘고려사’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은 이런 사정을 반영한다. 한편으로 남경 건설은 부왕인 문종 때와 달리 국왕의 순행을 전제로 진행한다는 포석도 읽을 수 있다. 순행 준비는 위위시에서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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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득신, 북악산도
#‘신지비사’에서 기록한 남경의 지세

김위제는 ‘신지비사’의 기록을 인용하여 남경의 지세를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저울로써 삼경을 비유한 것입니다. 극기는 머리, 저울추는 꼬리, 저울대는 저울의 균형을 잡는 곳입니다. 송악은 부소로서 저울대에 비유되고, 서경은 백아강으로 저울머리에 비유되며, 삼각산의 남쪽은 오덕을 갖춘 곳으로 저울추에 비유됩니다. 오덕이란 가운데 있는 면악(面嶽)이 둥근 형태로 토덕, 북쪽에 있는 감악(紺嶽)은 굽은 형태로 수덕, 남쪽에 있는 관악(冠嶽)은 뾰족한 형태로 화덕, 동쪽에 있는 양주 남행산(南行山)은 곧은 형태로 목덕, 서쪽에 있는 수원 북악(北嶽)은 네모진 형태로 금덕을 나타냅니다. 이 역시 도선이 말한 삼경의 뜻에 부합합니다. 현재 우리나라에 중경과 서경이 있으나, 남경은 빠져 있습니다. 엎드려 바라오니 삼각산 남쪽 목멱산 북쪽의 편편한 땅에 도성(都城)을 건립하여 수시로 순행하고 머물도록 하소서. 이는 실로 사직의 흥망성쇠에 관련되는 것으로 신은 감히 배척받을 것을 무릅쓰고 삼가 기록하여 아뢰나이다.” 요점은 저울에 비교하여 추 역할을 하는 목멱산에 도성을 건립하여 순행하면 고려의 사직이 흥성할 것이라는 해석이다.

또 ‘신지비사’보다 일찍 유통되었던 ‘도선기’ ‘도선답산가’ ‘삼각산명당기’ 등의 풍수도참 자료도 있었다. 여기에서도 한강 일대의 중요성을 거론하며 남경을 도읍지로 주목하고 있었다. 모두 한강 지역의 목멱양에 도성 건설의 타당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도선기’에서는 고려의 삼경제(三京制)를 전제하고 1년을 3분기로 나누어 국왕이 11·12·1·2월은 중경에, 3·4·5·6월은 남경에, 7·8·9·10월은 서경에 머물면 천하의 나라가 고려의 번국(蕃國, 조공하는 나라)이 될 것이라는 예언과 개국 160여년 후, 즉 1077~1078년 언저리에 목멱양(남경)으로 도읍할 것임을 당위하고 있다. 이 자료는 남경 건설과 관련한 초창기 이론적 근거였다. 그리고 ‘도선답산가’에서는 ‘도선기’에서의 예언보다 그 내용이 보다 적극적으로 전개되었다. 건국 백 년 만에 쇠멸할 국도 개경 이후의 길지로 한강 일대가 주목되고 있다. 이곳에 도읍하면 태평성대를 이룰 것이고, 도성 위치에 대해서도 한강 이북으로 구체적인 지목을 하고 있다. 한강 이북이면 만세의 위풍을 이룰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나라가 찢어져 한강이 국경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고려왕실에서 적극 유통되었던 도참 자료에서 왕조 멸망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이 자료가 과연 고려시대에 유통이 가능했을까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그만큼 남경 설치와 운영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삼각산명당기’에서는 남경의 위치가 삼각산 아래로 구체적으로 지정된다. 그리고 그곳을 중국의 삼신산에 비교하며 지세를 풍수지리적인 측면에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특히 남경 건설부터 그 효험이 나타나는 시기까지를 예언하고 있다. 도읍의 기초를 닦아야 할 때로 예언한 임자년은 1072년(문종 26), 그 결과로 성스러운 왕자(王者)를 얻는 때는 6년 후인 1077년(문종 31)으로 비정되었다. 또 천하가 경배하러 오는 때는 그보다 9년 후인 1086년(선종 3)으로 보았다. 이것은 앞서 고려가 개국한 지 160여 년 후에 목멱양에 도읍할 것이라는 ‘도선기’의 내용과도 일치한다. 고려 건국 918년의 160년 후는 1077~1078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지비사’에서는 예언 내용은 ‘도선답산가’ ‘삼각산명당기’보다 ‘도선기’와 유사하다. 남경 건설의 정당성이 남경 한 곳에 국한되어 있지 않고 개경·서경과 함께 삼경제 운영으로 설명되고 있다는 점이 그렇다. ‘도선답산가’ ‘삼각산명당기’에서 남경 건설의 유력한 논거로 사용되었던 왕조 멸망이라는 극단적인 참설은 후퇴하고, ‘도선기’ 수준의 것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면서도 고려의 번국이 될 범위는 36개에서 70개의 나라로 확대되고 있다. 이런 숫자적인 변화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현재로서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고려의 천하관의 미세한 변동과 관련되어 있지 않을까· 결국 이 네 가지 도참서들은 김위제에 의해 전체적인 측면에서 기승전결의 구조로 사용되었다. 이 이론을 근거로 양주에 남경의 건설과 국왕의 행차에 대해서는 다음 이야기로 미룬다.

김성환 경기도박물관 전시교육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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