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천년, 고려시대의 경기문화] (35) 경기 남부의 문화 유적
③ 남경으로 가는길, 혜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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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혜음원지 전경
지금도 남북한이 공동 발굴작업을 하고 있는 만월대는 고려시대의 왕궁유적이다. 그런데 남한지역에도 이와 같은 양식과 기법으로 지어진 건축유구가 확인된 바 있다. 바로 혜음원(惠陰院)이 그 곳이다. 이 유적은 고양시 고양동에서 혜음령 고개를 넘으면 도달하는 파주시 용미리에 위치하고 있다. 혜음원에 대해서는 동문선(東文選)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의 사료에 김부식이 찬(撰)한 혜음사신창기(惠陰寺新創記)라는 기록이 있어 일찍부터 그 존재가 알려져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적의 위치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던 유적지였다. 문헌에는 존재하지만 실체를 알 수 없었던 혜음원은 1999년에 이르러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게 되었다. 당시 주민의 제보를 접한 동국대학교 학술조사단에 의해 ‘惠蔭院’이라 새겨진 암막새기와가 수습됨으로써 처음으로 그 위치가 파악되었다. 이후 한양대학교 박물관이 실시한 ‘파주시 문화유적 지표조사’ 등의 기초 조사가 진행되어 대략적인 규모가 파악된바 있다. 이같은 조사자료를 바탕으로 2001년부터 2014년에 이르기 까지 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와 한백문화재연구원에 의해 모두 9차례의 발굴조사 진행되어 유적의 전모가 확인되고 있다. 발굴조사 결과 혜음원은 동서 100m, 남북 129m의 면적에 전체 11단의 기단을 구축하고, 35동의 건물이 있던 유적임이 확인되었다. 

 앞서 거론한 혜음사신창기에는 혜음원의 창건 배경 및 그 과정, 운영의 주체, 왕실과의 관계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혜음원은 개경과 남경 사이를 왕래하는 행인을 보호함은 물론 빈민을 구휼하기 위해 창건된 사찰이자 국립숙박기관이었다. 더불어 국왕의 행차에 대비하여 별원(別院)이 건립되었던 행궁이기도 했다. 전체적인 시설은 1120년(高麗 睿宗 15)년 2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동왕(同王) 17(1122)년 2월에 완공되었다. 이같은 기록과 발굴조사 결과를 볼 때 혜음원은 혜음사라는 사찰, 혜음원이라 여행자의 숙박과 구휼을 전담했던 혜음원, 국왕의 행차를 대비한 행궁(별원)이 건립되었던 복합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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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궁지 중심구역
 혜음령(惠陰嶺)

 고양시 고양동과 파주시 용미리를 연결하는 혜음령은 고려시대에 개경에서 남경(서울)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서 사람의 왕래가 빈번한 지역이었다. 고려 전기에 개성에서 서울 방향으로 향하는 길은 개성-장단-적성(파주)-양주-의정부-서울로 통하는 길과 장단-임진나루-파주-고양-서울로 통하는 두 가지 길이 있었다. 이후 문종 22(1068)년 남경(현재의 서울지역)에 신궁(新宮)이 세워지고 숙종 4년부터 남경 건설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어 숙종 6(1101)년에 본격적으로 남경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이처럼 고려왕실의 남경에 대한 주목은 기왕에 확보된 교통로보다 빠르게 도달할 수 있는 길의 확보가 요청되었고, 이에 따라 혜음령에 대한 주목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렇지만 혜음령을 이용한 직로의 정비는 만만한 공역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혜음사 신창기에는 “봉성현에서 남쪽으로 20리쯤 되는 곳에 조그마한 절이 있었는데, 허물어진지 벌써 오래였으나 지방 사람들은 아직도 그곳을 석사동이라 불렀다. 동남방에 있는 모든 고을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사람이라든지 또는 위에서 내려가는 사람이 모두들 이 길을 사용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어깨가 서로 스치고, 말은 굽이 서로 닿아서 항상 복잡하고 인적이 끊어질 사이가 없었는데, 산, 언덕이 깊숙하고 멀며, 초목이 무성하게 얽혀 있어서 호랑이가 떼로 몰려다니며, 안심하고 숨어 있을 곳으로 생각하여, 몰래 숨어서 옆으로 엿보고 있다가 때때로 나타나서 사람을 해친다. 이 뿐 아니라 간혹 불한당들이, 이 지역이 으슥하고 잠복하기가 쉬우며 다니는 사람들이 지레 겁을 먹고 두려워하는 것을 이용하여, 여기에 와서 은신하면서 그들의 흉행을 감행하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올라오는 사람이나 내려가는 사람이 주저하고 감히 전진하지 못하며, 반드시 서로 경계하여 많은 동행자가 생기고 무기를 휴대하여야만 지나갈 수 있는데도, 오히려 살해를 당하는 자가 1년이면 수백 명에 달하게 되었다.”라고 기록되어있다. 이를 보면 호랑이와 도적의 출몰로 인해 1년에 수백명이 살해되던 그런 고개였기에 그 누구도 안전을 담보할 수 없는 길이었다. 그럼에도 개성에서 남경을 가기위해 가장 빠른 길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혜음령은 반드시 개척해야 할 루트였다. 숙종 7(1102)년 8월에는 왕이 남경을 순행한 기록을 보면 개성-장단-파주(봉성현)-고양-서울을 지나는 길이 활용된 것으로 판단된다. 결국 혜음령은 대규모 군사들에 의해 보호될 수 있었던 왕의 행차는 가능할 정도로 개척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럼에도 민간의 통행에는 그다지 활용빈도가 높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와중에서 혜음사의 창건이 진행되는데, 이의 창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이소천이다. 이에 대해서 혜음사 신창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선왕인 예종이 왕위에 오르신지 15년인 기해년(1119) 가을 8월에 측근의 신하인 소천이 임금의 사명을 받들고 남쪽 지방에 갔다가 돌아왔다. 임금께서 “이번 길에 민간의 고통스런 상황을 들은 것이 있느냐” 물으시니, 곧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임금께서는 측은히 이를 딱하게 생각하시고, “어떻게 하면 폐해를 제거하고 사람이 안심하게 할 수 있느냐”하셨다. 아뢰기를 “전하께옵서 다행히 신의 말씀을 들어주신다면 신이 한가지 계교가 있사온데, 국가의 재정도 축나지 아니하며 민간의 노력도 동원시키지 않고, 다만 중들을 모집하여 그 허물어진 집을 새로 건축하고 양민을 모아들여 그 옆에 가옥을 짓고 노는 백성들을 정착시키면, 짐승이나 도둑의 해가 없어질 것이며, 통행자의 난관이 해소될 것입니다”하였다. 임금께서는, “좋다. 네가 그것을 마련해 보라”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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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동여래입상
 이 기록을 보면 이소천은 왕의 명령으로 남쪽 지방을 순시한 후 왕에게 남경과 개성사이의 교통로에 대한 안전 대책으로 요충지가 되는 혜음령에 원을 세워 민간 여행자를 보호할 것을 건의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국가의 재정적인 형편을 고려하여 민간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기 위한 방책을 제시하고 있는데, 당시에 사찰에서 운영하는 원을 모델로 삼아 혜음원을 건설하고자한 것이다. 사찰에 부속시설로 원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은 통일신라시대부터로 추정되는데, 특히 신라말에서 고려초에 크게 확대되어 중요 교통로에 사찰에서 운영하는 원이 증가하였다. 이소천이 민간의 힘으로 사찰과 원을 결합한 ‘혜음원’을 창건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혜음령은 고려 전기에 개성에서 남경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로 변모되었고, 이로 인해 왕은 물론 누구나 안심하고 다닐 수 있는 도로로 자리매감 한 것으로 판단된다. 예종대에도 왕의 남경 순행은 계속되었고 이에는 혜음령을 통해 파주와 고양을 거치는 직로(直路)가 이용되었다.

 혜음사(惠陰寺)와 혜음원(惠陰院) 창건 

 혜음원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창건되었는지에 대해서 ‘혜음사신창기’에 상세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는 공무를 띠고 묘향산에 가서 대중 가운데서 이르기를 ‘아무 곳에 큰 장애물이 있는데, 나라에서는 차마 토목공사를 가지고 백성을 괴롭힐 수가 없다. 옛날 스님들은 곤란한 처지에 빠진 것을 보면 반드시 두려워하지 않는 희생심을 발휘하였는데 여기서는 누가 나를 따라 저곳에 가서 일을 해보겠는가’하였더니 절의 주지 혜관 스님이 기꺼이 그를 따랐으며, 그 무리 중에 따라 가려는 사람이 백명이나 되었다. 혜관 스님은 늙어서 가지 못하고 부지런하며 진실하고 기술이 있는 사람으로, 증여(證如) 등 16명을 선발하여 경비를 마련하여 보냈다. 연장을 버리고 목재와 기와를 모아들여 경자년(1120) 봄 2월에 착공하여 임인년(1122) 봄 2월이 되어서는 일을 모두 마쳤다. 절이 불당과 유숙하는 건물부터, 주방, 창고에 이르기까지 모두 장소가 마련되었고, 또 생각하기를 “임금께서 남쪽으로 순수하신다면 행여 한 번이라도 이곳에 머무르실 일이 없지 않으리니 이에 대한 준비가 있어야 한다”하여 드디어 따로 별원 한 개소를 지었는데, 이 곳도 아름답고 화려하여 볼만하게 되었다. 지금 임금께서 즉위하시어 절 이름을 혜음사라고 내리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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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새기와
 이 기록을 보면 혜음원은 1119년 8월에 이소천이 국왕에게 혜음원 창건을 건의하고, 6개월이 지난 1120년 2월부터 공사에 착수하여 1122년 2월에 완공되었음을 알 수 있다. 더불어 사찰의 이름 역시 ‘혜음사’라 명확히 밝히고 있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비구 응제에게 명하여 그 일을 주관하도록 하고 제자 민청을 부책임으로 하였다”고 하여 실질적으로 공사를 진행한 것은 이소천이 아니라 응제나 민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혜음사신창기’에도 “응제는 일을 맡았다가 오래가지 못하고 민청이 이를 인계하여 끝까지 완성을 보았다. 그가 경비에 사용한 것은 위에서 내리신 것과 여러 신도들이 희사한 것이다. 그 이름과 목록을 갖추어 후면에 기록한 바와 같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상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2년에 걸친 혜음원의 대역사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은 이소천, 혜관, 증여와 더불어 응제나 민청 같은 승려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더불어 이들은 국왕의 명령과 왕실의 후원하에 공사의 책임을 맡았고 그 때문에 다수의 신도들도 경제적 후원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더불어 왕의 남경 행차에 대비하기 위한 행궁 역시 완비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처럼 왕실의 후원하에 승려들에 의해 건립된 혜음원 장관에 대해 혜음사신창기에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아! 깊은 숲속이 깨끗한 집으로 변하였고, 무섭던 길이 평탄하 대로가 되었으니, 그 이익이 또한 넓지 아니한가. 또한 미곡(米穀)을 갖추어 놓고 그 이익을 얻어서 죽을 쑤어서 여행자에게 공급하였는데 지금은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 소천은 이것을 영원히 계속하려 하였더니 정성에 감동된 바 있어 희사하는 사람들이 자꾸만 생겼다. 임금께서 이를 들으시고 은혜로운 희사를 후히 하시었다. 왕비 임씨도 또한 들으시고 기뻐하여 말씀하시기를 “무릇 그곳에서 실시하는 일은 내가 담당하리라”하시고 다 없어져가는 식량을 보태주시며 파손되어 못쓰게 된 기구를 보충하여 주셨다. 이리하여 모든 것이 다 구비되지 않은 것이 없게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보면 혜음원은 여행자를 위한 숙소의 기능은 물론 인종과 인종비 임씨가 혜음원에 대한 적극적인 후원자로 등장하게 되어 일종의 왕실의 구호기관의 기능을 전담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처럼 개경과 남경을 잇는 교통로의 중심인 혜음령 인근에 건립되어 행궁까지 거느리며 발전을 거듭했던 혜음원은 몽고침략기에 원래의 모습을 상실하게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유물이 12세기에 집중되고 있음에서 추정이 가능한데, 13세기 이후에는 활용도가 미진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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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및 물고기 잡상
 유적과 유물로 본 혜음원

 9차례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확인된 혜음원은 99,687㎡에 달하는 방대한 면적이다. 남향의 구릉에 모두 11단의 기단을 축조하고, 모두 35동의 건물이 있었다. 발굴조사 결과 앞서 살펴본 기록에서와 같이 혜음사와 행궁은 물론 왕실의 후원이 있었음을 입증할 수 있는 유구와 다양한 유물이 출토된바 있다. 이 중 가장 주목되는 유적은 역시 행궁지이다. 발굴조사 결과 행궁은 남서 30도의 방향을 유지한 정면 9칸, 측면 3칸의 대형 건물지로 중앙에 정면 3칸×측면 3칸의 건물이 있고, 동쪽과 서쪽에 각각 정면 2칸×측면 3칸 규모의 건물이 배치된 구조였을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동?서로 각각 정면 2칸×측면 1칸의 소규모 부속건물이 위치하고, 남쪽으로는 마당을 중심으로 4동의 대칭을 이루며 배치되었다. 이의 남쪽에는 중문과 계단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 바 있다. 이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 중 지붕을 장식했던 용두와 치미를 비롯한 다량의 귀목문 막새기와는 건물의 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발굴조사에서는 실로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어 혜음원의 위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먼저 가장 주목되는 유물은 기와이다. ‘惠蔭院’이라는 명문이 양각된 암막새기와를 비롯해 ‘혜음사’라 양각된 평기와는 물론 1128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戊申年銘’ 평기와가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금동여래입상의 출토는 이곳에 혜음사가 있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같은 출토유물은 혜음사신창기에 기록된 혜음원의 명칭과 건립연대가 정확함을 입증하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용마루 위에 사용되는 치미, 내림마루나 귀마루 위에 사용되는 용두, 잡상 등이 출토되어 상당한 격을 지닌 건물이 존재했음을 입증하고 있다. 더불어 이곳에서 출토된 용두와 새 모양의 잡상은 개성 만월대에서 출토된 것과 동일한 양식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 바 있다. 게다가 출토된 청자의 양상은 더욱 혜음원의 위상을 분명히 하고 있다. 출토된 청자는 접시, 대접, 완, 바리때, 잔, 뚜껑을 비롯해 두침, 잔탁, 향로, 벼루, 매병편 등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이 12세기에 생산된 것으로 파악되는데, 기형과 문양을 볼 때 강진군 대구면 용운리 또는 사당리 요지에서 생산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같은 당대 최고급 품질의 청자와 더불어 출토된 칠기에서는 ‘惠陰院’이라는 명문과 묵서(墨書)되어 있었는데, 목재에 직물을 덧대고 4차례에 걸쳐 옻칠을 한 것으로 파악 되었다. 이와 더불어 상당한 양의 중국자기도 출토되고 있는데, 송나라때의 정요(定窯)와 경덕진요(景德鎭窯)에서 생산된 것으로 파악되어 당시 중국 최고급품의 청자가 수입되어 이곳에서 사용되었음이 밝혀진 바 있다. 

 박경식 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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