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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일본 니가타현에서 3년마다 개최되는 대지의 예술제, ‘에치고-츠마리 아트 트리엔날레 2015’에 다녀왔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미소가 보고 싶다는 바람에서 출발한 ‘물과 흙의 예술제’가 이제는 세계 최대 규모의 국제예술제로 주목받고 있다. 2000년에 시작돼 올해 6회째를 맞이한 이번 예술제의 목표는 인간과 자연, 문명을 한데 어우르는 기술이 바로 ‘미술’이라는 테마로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장소를 잇는 교환의 장을 만드는 것이었다. 새롭게 설치된 작품만도 180여점에 달했다.

방문기간 중 ‘한일교류의 새로운 가능성-조선통신사를 기점으로’ 심포지엄에 참석하기 위해 도카마치(十日町)정보관을 찾게 됐는데,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정면으로 마주한 진열장엔 ‘종전 70주년’ 관련 서적들이 배치돼 있었다. 우리가 광복 70주년 기념행사에 젖어있을 즈음 일본에선 종전 70주년을 되새기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에겐 치가 떨리는 강제징용의 현장, 군함도 하시마 섬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역사를 거스르는 조짐이 일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 땅의 깨어있는 지성인들과 미래를 예견하는 예술인들의 책임이 그만큼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선감도에 자리한 ‘경기도청소년수련원’ 뒷산에 오르면 ‘팔효정’이라는 팔각정이 있다. 이웃한 바다봬(바다향기)수목원에도 ‘상상전망대’가 있다. 이곳에 올라 해풍을 맞으며 서해를 바라보면 수평선 너머로 ‘풍도’라는 섬이 보인다. 이곳 풍도 앞바다에서 1894년 7월25일 전통적인 동아시아 질서를 붕괴시킨 동양사의 획기적인 전쟁,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이 해전에서 청국군함과 청국 증원군을 태운 영국수송선 가오슝호(高陞號)가 일본 해군의 기습공격으로 격침됐다. 불행하게도 한반도는 이 청일전쟁으로 국제무대에 등장했는데, 이후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었고, 일제식민시대를 거쳐 마침내는 동족상잔 끝에 비극적 분단시대를 이어가고 있다.

현재 풍도바람꽃, 복수초, 노루귀 등 사진작가들에게 야생화의 천국으로 불리는 풍도에는 간혹 일본사람이 와서 만세를 부르고, 중국사람이 와서는 치욕의 역사를 되새기고 간다고 한다. 우리는 과거를 현재화하려는 그 어떤 세력의 음모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경계해 나가야 한다. 역사를 거슬러 폭력의 시대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모든 시도를 분쇄해야 한다. 한 사람, 한 집단, 한 국가를 위한 주창은 지구촌의 평화를 해치는 전근대적인 발상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꿈꾸는 자들에 의해 이뤄진다. 우리가 반추(反芻)해야 할 오래된 역사가 숨 쉬고 있는 풍도에서 일본, 중국, 한반도의 작가들이 함께 모여 주민들의 줄기찬 삶을 바탕으로 창의적인 예술작업을 함으로써 희망찬 미래를 위한 평화의 예술섬을 만드는 꿈을 꾼다. 수많은 돈을 들여 조성한 일본의 대표적인 예술섬 ‘나오시마’보다는 동북아 평화를 위한 위대한 작업이 될 것이다. 후망산을 품은 풍도는 하늘의 기운과 땅의 명령을 받아 평화의 메아리가 울려퍼지는 예술공원으로 변화될 운명이리라.

서정문 경기창작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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