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천년, 고려시대의 경기문화] (38) 경기남부의 문화유적
⑤ 고려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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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암리 깃발세트
우리는 고려시대의 도자기하면 청자를 떠올린다. 그렇지만 청자 기술의 시작 단계부터 백자도 함께 했다. 그렇다면 고려시대 백자는 무엇인가? 조선시대 백자와 같은 것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육안으로 보이는 색과 형태로만 백자라라고 동일하게 불릴 뿐 고려와 조선의 백자는 태생이 다른 도자기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 이 두 종류의 백자가 시작된 지역은 바로 이곳 경기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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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 서리 백자 가마터
백자는 고령토를 태토로 사용하고 투명에 가까운 유약을 씌워 고온으로 번조한 고급자기이다. 중국의 경우 3세기 부터 청자의 기술이 시작됐고 백자는 6세기 후반에서야 발생하므로 조금 더 어려운 기술 단계이다. 이후 남송(南宋)시기까지 청자와 백자가 공존하다가 원대(元代)에 백자 위주로 도자의 흐름이 바뀐다. 우리는 고려초 경기도의 지리적 잇점으로 선진 기술을 받아들여 당시의 최첨단 기술인 청자와 백자를 생산하기에 이른다. 이때 만들어진 백자가 고려백자인데 백자의 태토는 고령토이며 철분 함량이 높은 청자 태토와 다르다. 그렇지만 유약은 청자와 동일한 나무재를 이용한 기술로 만들어졌다. 고려백자의 유약은 조선백자와 비교하여 약간 두텁고, 누런기나 푸른기가 도는 불안정한 백색을 띄게 된다. 그렇지만 당시 세계에서 중국만 만드는 일류 기술인 백자를 국내 생산해 냈다니, 도자문화의 흐름에서 우리가 얼마나 뛰어나고 앞선 것이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고려백자가 탄생하기까지 우리에게는 어떤 일들이 있었던 것일까? 백자에 대한 수요 욕구는 고려 이전 시기까지 올라간다. 백제시대 공주 무령왕릉, 익산 왕궁리, 통일신라시대 이천 설봉산성, 보령 성주사지, 경주 황룡사지, 안압지, 왕경유적 등에서 중국의 고급백자가 종종 발견됐다. 그 사례들은 모두 지배층이 사용하는 고급자기였고, 고려로 이어지면서 청자의 제작 개시와 함께 자연스럽게 백자에 대한 수요 욕구도 있었을 것이다. 고려의 초기 청자가마터들에서 발견되는 양상처럼 백자도 유사한 그릇의 종류와 기술로 만들어졌다. 중국 절강성 월주요(越州窯)의 청자기술에서 그 원류를 찾아볼 수 있다. 즉 고려백자의 기원이 청자와 그 맥을 함께 한다는 것이다. 다만 월주요가 청자 전용 가마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우리는 백자 제작에 필요한 태토와 유약에 관한 공정은 선택적으로 받아들인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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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모양 백자 접시
백자가 처음 생산이 시작되던 10세기의 상황을 살며보면 청자와의 많은 연관성을 찾아볼 수 있다. 경기 지역을 중심으로 가마 유적은 용인 서리중덕, 시흥 방산동, 여주 중암리 등 약 9개소이며, 주로 10-11세기에 운영됐다. 청자와 함께 백자도 제작됐고 그릇의 형태도 거의 동일하게 만들어졌다. 찻잔으로 사용된 완과 발, 접시, 병, 제기 등이다. 특히 용인 서리에서 상감문(象嵌文)이 베풀어진 백자편이 출토돼 고려상감청자의 시원적(始原的) 형태로 주목된다. 도자 가마의 구조가 벽돌로 이루어져 있던 시기에는 기벽이 얇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양질의 백자였으나, 11세기 진흙가마로 구조의 변경이 이루어지면서 기벽이 두껍고 투박하며 백자의 색이 균일하지 않은 조질화 양상을 띠고 있다.

고려 전기 백자가 가마터가 아닌 다른 곳에서도 발견돼 백자를 사용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밝혀낼 수 있는 단서가 된다. 과천 일명사지, 용인 마북리사지, 여주 고달사지·원향사지, 안성 봉업사지, 원주 법천사지, 충주 숭선사지, 보령 성주사지, 개성 봉동읍 건물지, 하남 교산동 건물지 등이다. 이중 눈에 띠는 점은 사찰 유적에서 고려백자가 빈번하게 발견되는 점이다. 고려백자의 생산지인 가마를 중심으로 인근 지역의 사찰 승려들에게 주로 공급됐으며 이들의 수요도가 높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배천 원산리, 용인 서리, 시흥 방산동 등에서 발견되는 제기는 왕실의 제례와 관련하여 개경과 가까운 중서부 지역에 위치해 있다. 당시 문화의 요충지였던 경기 지역이 고려백자의 주요 수요처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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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 서리 상반마을 백자 해무리 굽완
12세기가 되면서 경기 지역 청자와 백자의 생산은 매우 미미해지며, 가마의 흔적도 찾기 힘들다. 다만 이와 관련된 기록으로 ‘고려사(高麗史)’ ‘식화(食貨)’편 예종(睿宗) 3년(1108) 기록에 경기도 주현에서 자기가 공납용으로 만들어지고 있었으나 열악한 환경으로 장인들이 도망한다는 매우 단편적인 내용만이 전하고 있다. 12세기 청자와 백자의 생산이 전남 강진과 부안으로 집중되면 경기 지역 백자도 생산이 약화된 것으로 보인다. 경기 지역의 백자 기술의 변화에 주목할 만 점이 있다. 안양시 비산동에서 고려말인 14세기에 해당되는 백자류가 발견됐다. 이곳에서 발견된 백자는 중국 원나라의 ‘추부백자(樞府白磁)’기술의 영향을 받아 이전보다 기벽이 단단해진 기술의 변화를 보이는 백자라는 점이다. 이것은 조선시대 백자로의 기술이 연결되는 매우 주목되는 상황이다. 백자의 새로운 기술 변화 요소를 다시 경기도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는 흥미로운 사실이며 앞으로 더 연구돼야할 부분이다.

경기도는 양질의 백토 산지와 풍족한 자원 그리고 선진기술을 언제나 발빠르게 받아들인 문화적 특성을 바탕으로 백자 제작의 초석을 이룬 곳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경기도의 도자문화는 이곳 경기도에서 시작됐고, 이후 한국의 미감이 더해져 세계 최고로 꼽히는 비색과 상감기법의 청자를 이룰 수 있었던 모태가 된다.

김영미 경기도어린이박물관 학예운영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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