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천년, 고려시대의 경기문화] (40) 경기남부의 문화유적
⑦ 석조문화재를 통해 본 불교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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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성 봉업사지 5층 석탑과 당간지주
경기도는 고려시대에 이르러 많은 사찰이 창건됐고, 이로 인해 불교문화 역시 발전을 거듭했다. 통일신라시대의 불교문화가 전무하다시피한 이 지역에 불교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던 주된 원인중 하나는 바로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이 자리하고 있다는 지리적인 여건이었다. 더불어 고려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에 반영된 도참사상(圖讖思想)은 불교의 대중화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즉, 고려는 개국직후 수도인 개경을 중심으로 법왕사·왕륜사·자운사·내제석사·사나사·천선사·신흥사·문수사·원통사·지장사 등 10대 사찰을 창건하는데, 당시 도성 내에 70구의 불사(佛寺)가 있었다는 사실은 고려왕실의 불교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컸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개경에 7층탑, 서경에 9층탑을 세우고 경주의 황룡사구층목탑을 중수하했다. 뿐만 아니라 통일전쟁에서 숨진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개태사를 세우는 등 수많은 불사(佛事)를 진행한 결과 고려의 불교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됐다. 이처럼 지속적으로 시행된 국초(國初)의 불교중흥책은 전국적으로 불교문화가 확산되는 전기를 마련했다. 

 ‘경기’라는 명칭은 1069년(문종 23)에 처음으로 붙쳐진 명칭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경기의 지리적인 범위은 대체로 조선 태종과 세종대에 이룩된 것이지만, 경기도의 전역에는 고려시대에 조성된 수많은 불교문화재가 산재해 있다. 이를 좀 더 세분해 보면 개성과 서울을 비롯해 하남, 이천, 여주, 안성에 주로 밀집 분포돼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개성과 서울을 제외하면 모두 한강 이남지역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조형물의 개체 수에 있어서도 가장 많은 예를 보이고 있다. 이를 보면 경기 남부지역은 수도인 개성이 한강 이북에 위치한 탓에 불교문화가 충청과 전라 지역으로 확신되는 거점이자 요충이었음을 알 수 있다. 

 경기 남부지역의 불교문화를 살피기에 가장 중심이 되는 지역은 안성과 이천 그리고 여주이다. 이 지역에는 각각 대표적인 사찰이 있는바, 안성의 봉업사, 이천의 안흥사 그리고 여주의 신륵사와 고달사지이다. 이와 더불어 폐허화된 많은 폐사지에는 수많은 석조문화재들이 존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산성들 역시 조밀하게 분포돼 삼국시대 이래 고려시대에 이르러도 이 지역의 중요성을 가늠케하는 요인으로 판단된다. 결국 경기 남부지역의 문화재들이 지닌 특성은 고려의 문화적 소양과 능력을 판단하는데 조금도 모자람이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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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 교산동 마에약사여래좌상
경기 남부지역에서 전개된 고려시대의 불교는 다양한 특성을 지니고 있는데, 이를 살펴보면 첫째, 황제국의 위상을 잘 드러내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같은 면면은 먼저 하남시 교산동 마애약사여래좌상(보물 제981호)에서 확인된다. 이 불상은 삼각형 바위에 조각된 마애 약사여래좌상인데, 조각이 정교할 뿐만 아니라 왼쪽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977년(경종 2년)에 조성됐다. 뿐만 아니라 ‘금상황제만세원(今上皇帝萬歲願)’라는 명문이 있어 왕의 호칭에 ‘황제’라는 명칭을 사용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더불어 봉업사지와 망이산성의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기와에서 ‘준풍(峻豊)’이라 새겨진 글씨가 확인되는데, 이는 황제라 자칭했던 광종이 사용했던 연호임을 볼 때 경주 남부지역에서 전개된 문화의 저변에는 황제국 고려의 위상이 내재돼 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왕실의 후원하에 조성된 불사(佛事)가 확인되고 있다. 왕실은 후원으로 건립된 사찰로 가장 주목되는 곳은 안성의 봉업사지이다. 봉업사지에는 오층석탑과 당간지주만이 현존하고 있는데, 1966년 경지정리 작업시 출토된 일괄유물 중 향완과 반자의 명문을 통해 1081년(고려 문종 35) 이전에 존재했던 ‘봉업사(奉業寺)’로 밝혀진 바 있다. 뿐만 아니라 근년에 이뤄진 발굴조사 결과 오층석탑 북쪽의 사역에서 21개소, 이로부터 북서쪽으로 약 200m 떨어진 사역에서 7개소의 건물지 등 모두 28개소의 건물지가 확인된 바 있다. 더욱이 “고려 태조 왕건의 진영”이 봉안됐다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기록을 볼 때 왕실의 후원하에 건립된 사찰임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고려말에 이르러 공민왕이 행차해 “태조의 진영을 알현했다”는 기록은 창건이래 국가의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은 사실은 여주 고달사지에서도 확인된다. 이 사지에는 고려시대 초기에 조성된 석조부도(국보 제4호), 원종대사 혜진탑(보물 제 7호), 원종대사혜진탑비(보물 제 6호)와 석불대좌(보물 제8호), 쌍사자석등(보물 제282호.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이 현존하고 있는데, 이중 원종대사혜진탑비의 명문 중 “원종대사 찬유는 958년 8월 20일 고달사에서 입적한다. 그러자 광종은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이어서 시호와 탑호를 내리고 진영(眞影)을 조성하게 한다. 더불어 국공(國工)을 파견해 석조부도와 탑비를 건립하게 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같은 비문 중 가장 주목되는 점은 “고려의 국공”에 의해 탑비가 건립됐다는 점이다. 이같은 점을 보면 고달사 역시 고려왕실 나아가 황제를 지칭했던 광종의 후원하에 건립된 사찰임을 알 수 있다. 셋째, 지방민의 발원으로 조성된 조형물도 확인된다. 이천 장암리 태평흥국명 마애보살반가상(보물 제982호)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이 불상은 ‘태평흥국6년신사2월13일…향도…(太平興國六年辛巳二月十三日…香徒…)’이라는 명문이 있어 981년(景宗 6년)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이중 향도(香徒)라는 내용이 주목된다. 향도란 불교신앙활동을 위해 결성한 신도들의 단체를 의미하고 있음을 볼 때 이 불상은 이천 지역을 중심으로 조직된 신도들에 의해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정황을 보면 경기 남부 지역의 불교유적은 교려 왕실의 후원과 순수 지방민의 참여로 조성된 것들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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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
 넷째, 경기 남부지역에 조성된 불교문화는 석탑, 석불, 석등, 부도 등 모든 장르의 조형물이 건립되고 있다. 이들을 통해 확인되는 특성은 고려왕조의 문화적 능력을 표방하고 있거나, 새로운 양식이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먼저 석탑에서는 고려시대 석탑의 특성이 삼국의 옛 영토라는 지역적 문화기반 하에서 건립되고 있음에 비해 남부 지역을 포함한 경기지역에서는 고려시대만의 양식이 구현되고 있다. 즉, 높직한 단층기단, 초층탑신 받침에서 보이는 다양한 수법, 옥개석에서의 특징적인 변화, 탑재의 단일화등 여러곳에서 정형화된 고려시대 석탑의 특성을 내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안양사에는 왕건의 발원으로 칠층전탑이 건립됐다. 이 전탑은 일면 3간 규모로, 각 층의 지붕은 기와로 덮었으며, 매 칸의 벽마다 많은 그림 및 조각을 했고, 난간을 돌린 것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기록돼 있다. 뿐만 아니라 전탑을 구성하는 벽돌에는 불상을 조각하고 있음도 파악된 바 있다. 더불어 신륵사에 건립돼 있는 전탑은 6층까지만 남아있는데, 탑신부를 구성하는 벽돌은 연주문이 시문된 반원내에 당초문을 새긴 문양 벽돌이 사용되고 있다. 상륜부에는 벽돌로 조성한 노반(露盤) 상면에 화강암으로 조성된 복발(覆鉢)·앙화(仰花)·보륜(寶輪)·보개(寶蓋)·보주(寶珠)가 놓여있어 한국의 전탑 나아가 고려 시대 전탑의 상륜부의 구조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처럼 경기도에 건립돼 있는 전탑은 두 기에 불과하지만, 고려시대 전탑의 전제적인 양상을 볼 수 있는 자료일 뿐만 아니라 통일신라시대의 전탑이 모두 경상북도 안동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건립되고 있음에 비해 특이한 현상으로 주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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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
 석불에 있어서도 조성돼 있는 불상의 절대다수가 대형석불이란 점을 들 수 있다. 이 유형의 석불 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은진 관촉사석조미륵불상(968년, 고려 광종 19 추정)을 들 수 있다. 이같은 불상들은 대체로 고려시대 초반에 조성돼 신흥국가의 기상을 대변하는 조형물로서 뿐만 아니라 당시 사림들의 의식의 저변에 깔려있는 토속신앙과 불교와의 습합현상, 풍수도참사상과 관련된 민중 감정의 표출로 그 지방의 호족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더불어 대형 석불들은 주로 충청도와 전라도에 분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에 못지 않게 많은 수가 집중적으로 분포돼 있는 지역이 바로 경기 남부지역이다. 따라서 고려시대 거석불의 확산에 있어 집중적인 분포를 보이는 안성과 이천 지역은 충청도와 전라도로 이어지는 완충지대요, 한 거점이었다고 생각된다. 이지역에 현존하는 거석불들은 대체로 머리에 쓴 보개(寶蓋), 토속적인 인상을 주는 둥글고 넓적한 상호(相好), 석주형(石柱形)과 같은 신체의 처리, 간결하게 처리한 옷주름 등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부도에 있어 가장 주목되는 예로는 고달사지에 건립돼 있는 석조부도(국보 제4호)와 원종대사혜진탑이다. 이들 부도에서는 통일신라시대 이래 전통적인 팔각원당형(八角圓堂型)의 양식에서 탈피해 기단부의 중대석을 다른 부도와 같이 8각으로 처리한 것이 아니라 용머리의 형상을 지닌 거북을 중심으로 4마리의 용과 구름을 조각하고 있는데, 그 수법이 생동감이 있을 뿐만 아니라 웅장하다. 이처럼 기단부에서의 변화상과 더불어 탑신에 새겨진 사천왕상 등의 조각이 지닌 섬세한과 유려함에서 단연 고려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부도로 손꼽히고 있다. 이처럼 기단부를 거북과 용 그리고 구름으로 변화시킨 기단을 지닌 부도는 경기도의 장인들이 지녔던 예술적 감각과 능력을 잘 대변하고 있다고 하겠다. 더불어 신륵사에 건립된 나옹화상의 보제존자 석종은 외형상 방형의 기단위에 탑신을 안치함으로써 계단탑(戒壇塔)의 형상을 따르고 있어, 김제 금산사계단을 비롯해 개성 불일사지계단, 달성 용연사부도와 같은 양식임을 알 수 있다. 결국 신륵사 보제존자석종은 통일신라시대에 확립된 팔각원당형의 양식에서 탈피해 통도사 금강계단의 양식을 계승한 부도의 양식이라 하겠다.

 석등에 있어서도 다양한 변화가 확인된다. 이같은 양상은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에서 확인된다. 이 석등에서는 전통적인 팔각의 평면을 유지하고 있지만, 화사석(火舍石)에서 변화를 보이고 있다. 즉, 다른 석등과는 달리 이 부분에 대리석을 사용하고 잇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조각이 가해져 매우 화려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즉, 팔각의 모서리에 표현된 우주(隅柱)와 이를 휘감아 돌고 있는 반룡(蟠龍), 화창(火窓)이 상면에 조각된 비천상(飛天像)을 비롯해 목조건축의 요소인 창방과 평방까지 표현하고 있어 다른 석등에서는 볼 수 없는 유일한 예를 보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화창에서 확인되는 페르시아 양식은 남한강을 통해 서역과의 문화교류가 활발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판단된다. 더불어 나옹화상탑의 전면에 건립돼 있어 가람배치와는 무관한 장명등(長明燈)의 성격을 보이고 있다. 이처럼 석등이 보여주는 위치상의 문제는 부도가 승려의 사리를 모신 묘탑이란 정의와 대비해 볼 때 기존의 격식과 규범에서 벗어난 파격적인 것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결국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 앞 석등에서 확인되는 배치방식은 불가(佛家)의 숭배물로서의 석등에서 무덤 앞에 배치되는 장명등으로 이행되는 모습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비석에 있어서도 새로는 양식이 등장하고 있다. 삼국시대 이래 확림된 비석은 비좌 비신 이수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는 것이 통식이다. 그런데 신륵사보제존자석종비(보물 제229호)와 신륵사 대장각기비(보물 제 230호)에서는 이같은 양식의 범주안에서 비신에서 변화가 보이고 있다. 즉, 비신의 좌·우측에 화강암으로 조성된 기둥을 세우고 내부에는 비신은 감입(嵌入)했다. 이같은 양식은 기왕에 건립되던 비석의 전통에서 완전히 벗어난 새로운 양식으로, 비신을 대리석으로 제작함에 따라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등장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상에서 남부지역의 불교문화의 양상에 대해 석조문화재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 지역은 개성과 가까운 지역에 위치한 탓에 고려시대 초기 불교문화의 새로운 변화상을 가장 먼저 받아들이기에 유리한 자리적인 여건을 지니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문화재가 안성과 이천 그리고 여주에 집중되고 있음을 볼 때 고려초기의 불교문화가 지방으로 확산돼 가는 중요한 거점으로 파악됐다. 그러하기에 고려 왕실에서도 여러 불사(佛事)에 적극적으로 후원했음도 알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통일신라시대 이래 전통적인 불교분화를 그대로 수용한 것이 아니라 고려 나름대로의 양식적 특수성이 발현된 지역이었다. 이같은 사실을 종합해 볼 때 경기 남부지역은 개성과 더불어 고려시대 불교문화를 선도했고, 새로운 양식을 창출하고 확산시킨 중요한 지역으로 생각된다. 

박경식 단국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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