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천년, 고려시대의 경기문화] (40) 경기남부의 문화유적
⑦ 석조문화재를 통해 본 불교문화
‘경기’라는 명칭은 1069년(문종 23)에 처음으로 붙쳐진 명칭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경기의 지리적인 범위은 대체로 조선 태종과 세종대에 이룩된 것이지만, 경기도의 전역에는 고려시대에 조성된 수많은 불교문화재가 산재해 있다. 이를 좀 더 세분해 보면 개성과 서울을 비롯해 하남, 이천, 여주, 안성에 주로 밀집 분포돼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개성과 서울을 제외하면 모두 한강 이남지역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조형물의 개체 수에 있어서도 가장 많은 예를 보이고 있다. 이를 보면 경기 남부지역은 수도인 개성이 한강 이북에 위치한 탓에 불교문화가 충청과 전라 지역으로 확신되는 거점이자 요충이었음을 알 수 있다.
경기 남부지역의 불교문화를 살피기에 가장 중심이 되는 지역은 안성과 이천 그리고 여주이다. 이 지역에는 각각 대표적인 사찰이 있는바, 안성의 봉업사, 이천의 안흥사 그리고 여주의 신륵사와 고달사지이다. 이와 더불어 폐허화된 많은 폐사지에는 수많은 석조문화재들이 존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산성들 역시 조밀하게 분포돼 삼국시대 이래 고려시대에 이르러도 이 지역의 중요성을 가늠케하는 요인으로 판단된다. 결국 경기 남부지역의 문화재들이 지닌 특성은 고려의 문화적 소양과 능력을 판단하는데 조금도 모자람이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먼저 석탑에서는 고려시대 석탑의 특성이 삼국의 옛 영토라는 지역적 문화기반 하에서 건립되고 있음에 비해 남부 지역을 포함한 경기지역에서는 고려시대만의 양식이 구현되고 있다. 즉, 높직한 단층기단, 초층탑신 받침에서 보이는 다양한 수법, 옥개석에서의 특징적인 변화, 탑재의 단일화등 여러곳에서 정형화된 고려시대 석탑의 특성을 내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안양사에는 왕건의 발원으로 칠층전탑이 건립됐다. 이 전탑은 일면 3간 규모로, 각 층의 지붕은 기와로 덮었으며, 매 칸의 벽마다 많은 그림 및 조각을 했고, 난간을 돌린 것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기록돼 있다. 뿐만 아니라 전탑을 구성하는 벽돌에는 불상을 조각하고 있음도 파악된 바 있다. 더불어 신륵사에 건립돼 있는 전탑은 6층까지만 남아있는데, 탑신부를 구성하는 벽돌은 연주문이 시문된 반원내에 당초문을 새긴 문양 벽돌이 사용되고 있다. 상륜부에는 벽돌로 조성한 노반(露盤) 상면에 화강암으로 조성된 복발(覆鉢)·앙화(仰花)·보륜(寶輪)·보개(寶蓋)·보주(寶珠)가 놓여있어 한국의 전탑 나아가 고려 시대 전탑의 상륜부의 구조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처럼 경기도에 건립돼 있는 전탑은 두 기에 불과하지만, 고려시대 전탑의 전제적인 양상을 볼 수 있는 자료일 뿐만 아니라 통일신라시대의 전탑이 모두 경상북도 안동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건립되고 있음에 비해 특이한 현상으로 주목되고 있다.
부도에 있어 가장 주목되는 예로는 고달사지에 건립돼 있는 석조부도(국보 제4호)와 원종대사혜진탑이다. 이들 부도에서는 통일신라시대 이래 전통적인 팔각원당형(八角圓堂型)의 양식에서 탈피해 기단부의 중대석을 다른 부도와 같이 8각으로 처리한 것이 아니라 용머리의 형상을 지닌 거북을 중심으로 4마리의 용과 구름을 조각하고 있는데, 그 수법이 생동감이 있을 뿐만 아니라 웅장하다. 이처럼 기단부에서의 변화상과 더불어 탑신에 새겨진 사천왕상 등의 조각이 지닌 섬세한과 유려함에서 단연 고려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부도로 손꼽히고 있다. 이처럼 기단부를 거북과 용 그리고 구름으로 변화시킨 기단을 지닌 부도는 경기도의 장인들이 지녔던 예술적 감각과 능력을 잘 대변하고 있다고 하겠다. 더불어 신륵사에 건립된 나옹화상의 보제존자 석종은 외형상 방형의 기단위에 탑신을 안치함으로써 계단탑(戒壇塔)의 형상을 따르고 있어, 김제 금산사계단을 비롯해 개성 불일사지계단, 달성 용연사부도와 같은 양식임을 알 수 있다. 결국 신륵사 보제존자석종은 통일신라시대에 확립된 팔각원당형의 양식에서 탈피해 통도사 금강계단의 양식을 계승한 부도의 양식이라 하겠다.
석등에 있어서도 다양한 변화가 확인된다. 이같은 양상은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에서 확인된다. 이 석등에서는 전통적인 팔각의 평면을 유지하고 있지만, 화사석(火舍石)에서 변화를 보이고 있다. 즉, 다른 석등과는 달리 이 부분에 대리석을 사용하고 잇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조각이 가해져 매우 화려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즉, 팔각의 모서리에 표현된 우주(隅柱)와 이를 휘감아 돌고 있는 반룡(蟠龍), 화창(火窓)이 상면에 조각된 비천상(飛天像)을 비롯해 목조건축의 요소인 창방과 평방까지 표현하고 있어 다른 석등에서는 볼 수 없는 유일한 예를 보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화창에서 확인되는 페르시아 양식은 남한강을 통해 서역과의 문화교류가 활발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판단된다. 더불어 나옹화상탑의 전면에 건립돼 있어 가람배치와는 무관한 장명등(長明燈)의 성격을 보이고 있다. 이처럼 석등이 보여주는 위치상의 문제는 부도가 승려의 사리를 모신 묘탑이란 정의와 대비해 볼 때 기존의 격식과 규범에서 벗어난 파격적인 것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결국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 앞 석등에서 확인되는 배치방식은 불가(佛家)의 숭배물로서의 석등에서 무덤 앞에 배치되는 장명등으로 이행되는 모습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비석에 있어서도 새로는 양식이 등장하고 있다. 삼국시대 이래 확림된 비석은 비좌 비신 이수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는 것이 통식이다. 그런데 신륵사보제존자석종비(보물 제229호)와 신륵사 대장각기비(보물 제 230호)에서는 이같은 양식의 범주안에서 비신에서 변화가 보이고 있다. 즉, 비신의 좌·우측에 화강암으로 조성된 기둥을 세우고 내부에는 비신은 감입(嵌入)했다. 이같은 양식은 기왕에 건립되던 비석의 전통에서 완전히 벗어난 새로운 양식으로, 비신을 대리석으로 제작함에 따라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등장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상에서 남부지역의 불교문화의 양상에 대해 석조문화재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 지역은 개성과 가까운 지역에 위치한 탓에 고려시대 초기 불교문화의 새로운 변화상을 가장 먼저 받아들이기에 유리한 자리적인 여건을 지니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문화재가 안성과 이천 그리고 여주에 집중되고 있음을 볼 때 고려초기의 불교문화가 지방으로 확산돼 가는 중요한 거점으로 파악됐다. 그러하기에 고려 왕실에서도 여러 불사(佛事)에 적극적으로 후원했음도 알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통일신라시대 이래 전통적인 불교분화를 그대로 수용한 것이 아니라 고려 나름대로의 양식적 특수성이 발현된 지역이었다. 이같은 사실을 종합해 볼 때 경기 남부지역은 개성과 더불어 고려시대 불교문화를 선도했고, 새로운 양식을 창출하고 확산시킨 중요한 지역으로 생각된다.
박경식 단국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