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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덧 2015년도 달력 한 장만 남았다. 어찌 보면 다사다난했던 것 같고 달리 보면 별다른 일이 없었던 조용한 한해였던 것 같기도 하다. 왜 그런가 생각해보니 2013년도처럼 새 정부가 출범한 것도 아니고 작년처럼 세월호 침몰 같은 대형사고도 없었기 때문인 것 같다. 무엇보다 큰 선거가 없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 아닌가 싶다.

그렇지만 올 한해 내내 마냥 시끄러웠던 것처럼 생각되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일까? 사사건건 이전투구를 벌인 여의도 정치판 때문인지 아니면 국민과 소통하지 않는다고 건수만 생기면 시청 앞이나 청계광장에 몰려 대대적인 성토대회를 벌인 것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혹시 정치권에서 갈등이 벌어질 때마다 신이 나서 가뜩이나 컸던 목청을 더 높이곤 했던 종편채널들의 진행자들과 정치평론가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갈등이 사회발전의 촉매제가 된다는 ‘갈등이론’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아무 갈등도 없는 사회’는 분명 문제가 있다. 그렇지만 올해 아니 최근 몇 년동안 국회나 정치권에서 벌어졌던 갈등 아니 싸움판이 우리 사회 발전에 얼마나 기여했는가는 곰곰이 생각해 볼일이다. 싸움이 벌어질 때마다 말로는 국민을 위하고 민생을 살리기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정작 국민들의 눈에는 ‘먼 산에서 난 불’ 같이 보일 뿐이다.

솔직히 모든 정치인들이 더 잘 먹고 잘살게 해주겠다고 또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말을 버릇처럼 달고 다녔지만 2015년이 마감돼가는 지금 그 말을 체감하거나 믿는 순진한 국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경제성장은 고사하고 본격적인 장기침체 국면으로 들어섰다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느낌이고, 이 정부가 올 인(all in)했던 청년취업 역시 거의 한계에 도달한 것 같다. 때문에 올 한해 엄청나게 소란스러웠던 것 같지만 생각해보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같이 생각되는 것이다.

하지만 시각을 밖으로 돌려보면, 2015년은 정말 ‘아무 일이 많았던 해’인 것이다. 거대 공룡 중국이 경제대국으로 급성장하면서 미국과의 양강구도가 더욱 공고해졌다. 때문에 모든 국가들이 그동안 쓰고 있던 이데올로기의 탈을 과감히 벗어던지고 새로운 국제질서에 편입하기 위한 생존전략에 고심하고 있다. 또 이 틈새에서 군사대국으로 도약하려는 일본 역시 심상치 않다. 그럼에도 지금 우리 정치권이나 정치인들은 세계나 주변국가의 변화와 아무 상관없이 갈라파고스 섬처럼 굴러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마치 역사학자 레이 황이 쓴 ‘1587년 아무 일도 없었던 해’의 명나라처럼 말이다. 1587년은 ‘아르마다 해전’에서 영국해군이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침했던 해로서, 이를 기점으로 유럽에는 구교와 신교, 봉건국가에서 민족국가로의 전환이 이뤄졌다. 하지만 같은 시기 중국 명나라 만력제는 정치개혁을 주장한 장거정(張居正), 군사개혁을 추진했던 척계광(戚繼光) 등에도 불구하고 세계질서 변화에 무감했던 반대 세력들의 저항으로 아무 일도 없이 몰락의 길을 겪게 된다.

지금 대한민국은 누가 옳고 그름을 떠나 철지난 이데올로기 갈등의 연장전이라 할 수 있는 역사교과서를 놓고 온 나라가 난투극을 벌이고 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정치인들이나 언론사들의 관심은 온통 내년 총선에서 누가 공천 받고 어느 당이 승리하고 2017년 대선에 모아져있다. 마치 대한민국은 차기 선거와 대권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게 한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2015년은 정치 싸움만 있고 다른 일들은 다 사라져버린 명나라의 1587년과 유사하다. 이처럼 많은 일이 있었지만 아무 일도 없었던 2015년이 지나고 있다. 이제라도 ‘정말 많은 일이 있었던 2015년 아니 2016년’이 되기 위해서 정치권과 정치인들의 각성이 필요해 보인다. 사족이지만 눈앞의 정치적 실익에만 골몰하는 정치인들도 문제지만 모든 일을 정치라는 안경으로만 보는 언론인이나 정치평론가들이 더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황근 선문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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