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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여 방송채널이 난립하고 PC나 스마트 폰을 통해 셀 수도 없을 만큼 수많은 콘텐츠들이 쏟아져 나오는 요즘 이른바 ‘대박 프로그램’을 찾아보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지금 같은 과학적 시청률조사 방법 이전에 80%를 넘나들었던 ‘여로’나 ‘아씨’ 같은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전설적 드라마들은 논외로 하더라도, ‘사랑은 뭐 길래’ ‘모래시계’ 같은 국민드라마가 실종된 지 이미 오래됐다.

물론 몇 개 지상파방송만 있던 시절과 백여 개 채널이 경쟁하는 지금을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 더구나 10-20대를 중심으로 TV를 보지 않는 ‘zero TV’ 가구들이 급증하고 있어 전체 TV시청자 규모 자체가 급속히 줄어들고 있다. 아직 초기이기는 하지만 인터넷을 통해 방송콘텐츠들을 제공하는 OTT(over the top)도 우후죽순처럼 등장하고 있다. 최근 넷플릭스(Netflix)가 국내시장에서 서비스를 시작했고, ‘대도서관’이나 ‘양띵’처럼 수 십만명 이상이 접속하는 1인미디어들의 성장세도 예사롭지 않다.

이런 환경에서 지난 주말 20%에 근접한 시청률을 기록하며 끝난 ‘응답하라 1988’은 매우 이례적이다. 물론 아직도 일부 지상파방송 주말드라마들이 20%를 넘는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지만 전반적으로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니다. 더구나 지상파방송사들이 엄청난 제작비와 인력을 투입해 만든 주말 드라마나 예능프로그램들과 경쟁해서 기록한 시청률이라는 점에서 수치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뿐만 아니라 VOD 이용 빈도, SNS 화제성, OST 이용자 등을 보면 과히 최근 몇 년간 볼 수 없는 신드롬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일부 의류업체나 제과·음료업체들은 드라마 인기를 등에 없고 재빠르게 80년대 복고풍 마케팅에 열을 올리고 있다. 솔직히 드라마 전반에 흐르는 ‘청춘’을 부른 김창완이 환갑을 훨씬 넘겼고 ‘함께’라는 노래가 김건모가 무명가수시절에 불렀다는 것을 알기나 하는지 의문이다.

어찌되었든 이 드라마의 성공요인을 두고 많은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모든 국민이 ‘미디어 평론가’이고 ‘정치평론가’인 대한민국에서 요즘 ‘응답하라 1988’은 안철수 신당보다 더 좋은 ‘국민 술안주감’ 임에 틀림없다. 물론 연기경험이 거의 없던 걸그룹 출신의 여자주인공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의 탁월한 연기력이 가장 큰 성공요인일 것이다. 여기에 이전 그동안 ‘응답하라 시리즈’에서 보여줬던 제작진들의 세심한 상황묘사도 뺄 수 없다.

그렇지만 이 드라마의 결정적인 성공요인은 마구잡이로 만들어지는 막장 드라마들이나 관객몰이에 성공한 한국영화들이 소재로 삼고 있는 ‘일탈적 극단성’으로부터 벗어난 것 아닌가 싶다. 식상할 정도로 단골소재가 돼 버린 사각·오각관계, 치정, 혼외자, 살인, 복수가 난무하는 미디어 트렌드를 전면 거부하고 잔잔한 일상성을 소재로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드라마 전개속도 역시 조금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늦다. 그러면서도 매편 100분이라는 러닝타임을 소화한 것을 보면 솔직히 대단하다는 생각도 든다.

10분 내외의 짧은 콘텐츠, 극단적이고 자극적인 소재와 감각적인(솔직히 오버하는)연기, 인형 같은 외모의 꽃미남이나 여신급 출연자, 확실히 각인시켜줄 반전과 결말 같은 최근의 미디어 소비 트렌드와 정면으로 배치된 전략이 성공요인이라 생각된다. 아울러 협소한 마니아 계층을 목표로 한 ‘틈새(niche) 콘텐츠’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는 분위기에서 10대부터 50대까지 포괄적 시청자를 타겟으로 한 것도 반동이라면 반동일 수 있다.

이처럼 ‘문화적 반동’이 성공한 이유는 ‘심리적 균형감(psychological equilibrium)’을 추구하는 인간의 심리상태 때문일 것이다. 평온한 생활을 하는 사람은 무엇과 자극적인 요소를 찾게 되고, 역동적인 삶은 사는 사람은 심리적 안식을 추구하는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그 동안 초고속으로 질주하고 있는 디지털적 삶에 지친 시청자들은 느리지만 생각할 여지를 주는 아날로그적 문화를 갈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응답하라 1988’은 여유로운 여백에서 자신만의 생각을 담을 수 있는 수묵화 같은 것 아닐까. 그런데 이런 문화적 균형감을 주는 드라마들은 tvn같은 상업방송이 아니라 KBS같은 공영방송이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어쩌면 그것이 평소 지상파방송사들이 누누이 강조하는 ‘방송의 다양성’ 일지도 모르겠다.

황근 선문대 신방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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