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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하는 단발의 총성이 울리자 후드득, 밀밭에 앉았던 수 십 마리의 까마귀들이 놀라 일제히 하늘로 날아 흩어졌다. 이어 극적인 음악이 검푸른 하늘을 감싸고 잠시 적막이 흐른 후에야 “아~ 그렇게, 한 사람의 고독했던 위대한 화가가 떠나갔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져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지난달부터 ‘문화역서울 284‘에서 열리고 있는 ‘반 고흐 인사이드: 빛과 음악의 축제’ 미디어아트 전시회를 다녀온 후의 짧은 소회다.

거친 붓 터치와 진한 원색적인 색감으로 인하여 단순하고 좀은 유치한 듯도 한, 그래서 더 솔직하고 순수한 ‘빈센트 반 고흐’를 나는 참 좋아한다. 하여 예전 유학시절부터 기회 있을 때마다 그의 작품이 있는 미술관을 찾아다니길 즐겨함은 지금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몇 해 전엔 소설가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이란 여행 산문집에 등장한 고흐를 읽다가 그만 꿈틀대던 역마살을 주체하지 못해 그동안 모아놨던 항공사 마일리지를 털어 배낭하나 달랑 울러 맨 채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로 훌쩍 떠났던 적이 있다. 마르세유를 거쳐 아를에 도착했을 땐 마침 5월의 끝자락이라 마지막 수확을 앞둔 체리향이 코끝을 찔러대고 있었다. 며칠을 머물며 그가 그린 로마시대의 경기장과 부크 운하에 놓인 랑글루아 도개교를 찾았고, ‘론’ 강으로부터 불어오는 ‘미스트랄’이라 이름 한 북풍에 흔들리는 ‘사이프러스’ 나무들도 보았다. 그것은 그의 그림에서 느끼듯 땅에서 위를 향해 밀고 올라가는 독특한 흔들림이었고 그의 표현처럼 마치 이집트의 오벨리스크처럼 아름다웠다. 그리고 어느 밤엔 형형색색의 별들이 반짝이는 파란 하늘의 ‘밤의 카페테라스’를 찾아 그가 즐겨하던 ‘압생트’를 음미해보기도 했다. 그때의 홀연한 여행은 한참을 지난 지금도 진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고흐는 평생 그를 지지하고 후원해 줬던 동생 ‘테오’에게 700통에 가까운 편지를 남겼다. 그 자체로 훌륭한 ‘서간 문학’인 그 편지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기엔 단지 고민하고 노력하는 소박한 한 사람의 화가가 있을 뿐 천재나 광인 따위는 없다. 놀라운 것은 그 편지들 속에 찰스 디킨스, 에밀 졸라, 위고, 발자크, 모파상을 비롯한 근대문학을 탐독한 이야기는 물론 당시 위세를 떨치고 있던 톨스토이에게 심취했음을 보여주는 내용도 보인다. 책을 많이 읽는다는 것은 그만큼 생각을 많이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그의 그림은 자신의 생각의 결정체다. 화가의 길로 들어선지 10년, 1890년 1월 드디어 브뤼셀의 20인 전에 그의 유화 여섯 점이 출품됐다. 이어 문예지 ‘르 메르퀴르 드 프랑스’에 평론가 ‘오리에르’가 쓴 ‘고독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란 제목의 매우 호의적인 평론이 실리고 출품작 중 ‘아를의 붉은 포도밭’이 400프랑에 팔렸다. 유일하게 생전에 팔린 그림이다. 허나 그렇게 평단의 인정을 받을 즈음 그는 세상을 떴다. 사인은 자살이라 하지만 여전히 그리 단정 짓기는 의문이 많다. 어쨌건 불과 16년 후 그 그림은 다시 1만 프랑에 거래돼 다른 이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가 살아있었다면 53세가 된 나이이다. 그의 사후 100년이 되던 1990년엔 ‘가셰 박사의 초상화’가 약 900억 원에 거래됐다. 지금은 아마도 천억이 넘을 것이다. 미디어전을 감상하고 나오면서 문득 그가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의 한 구절이 떠올라 가슴이 아려 왔다. “언젠가는 내 그림이 물감 값보다 더 많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도 알게 될 날이 올 것이다.”

박정하 중국임기사범대학 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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