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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천년이 시작된 지 벌써 15년이 지나 16년에 접어들었다. 새로운 2천년에 대한 인류의 꿈과 희망이 그동안 어떻게 표출됐는가를 다시 한번 되돌아 보면서 우리의 미래를 잠시나마 조망해 보고 싶다.

지난 2천년의 역사는 한마디로 지구의 발견과 인간의 발견이 동시적으로 이뤄진 놀라운 혁명기가 아니었던가. 신화의 세계에서 떨어져 나온 독립된 인간들은 지구문명의 발전과 인간평등의 이념적 지평위에서 인간이 인간이고자 할 때의 조건과 한계를 제시하면서 인간의 인간화에로의 횃불을 올렸던 것이다.

고대 로마의 도시국가로부터 출발하여 중세의 봉건국가를 거쳐 근대의 국민국가로 발전해가는 과정에서 인류는 하늘이 부여한 인간의 권리를 찾기 위한 몸부림으로 일관했다. 그 권리야 말로 ‘귀신도 어쩌지 못하는 권리’(이 말은 천부 인권(天賦人權)을 서재필이 쓴말이다)로 인식할 때까지의 여정은 참으로 숨 가빴다.

인류가 오랫동안 규범시(規範視) 해왔던 것을 집대성했을법한 BC 1700년대의 ‘함무라비법전’으로부터 시작된 인간의 권리와 의무에 대한 계율은 그로부터 3천여 년이나 지난 1215년의 대헌장 즉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를 거쳐 1628년의 권리청원과 1689년의 권리장전을 지나 1776년의 버지니아의 권리선언과 독립선언, 이어 1789년의 프랑스혁명을 통해 나타난 인권선언으로 대 단원을 이룬다. 이에 역행하는 모든 전체주의적 권력은 두 차례에 걸친 미증유의 세계대전과 1990년의 소련체제몰락으로 그 자취를 감추었다. 오직 살아 있다면 북한 김정은 체제뿐일 것이다.

이 일련의 과정들이야 말로 인류가 스스로 인간을 인간으로 존재시키려는 지난 2천년 세월의 숨가쁜 역사의 창조적 도전이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2천년이라는 시간의 매듭을 풀어헤친 지금에 이르러 이제 인류는 ‘인간의 인간화’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할 시점에 와 있다고 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지난 세기말에 열렸던 다보스 회의(World Economic Forum)에서 논의됐던 내용들을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때 세계의 석학들은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의 필요성을 주창했다. ‘세계화’라는 말이 유행하고 그 말이 마치 만병통치인 것처럼 세계화됐을 시점에 나온 논의의 주제여서 여간 의미심장한 것이 아니었다. ‘인간의 얼굴’이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인간이 인간화 된 뒤에 나타나는 인간의 얼굴. 그것은 인간양심을 지닌 인간의 얼굴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인간을 인간되게 만드는 도덕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인간의 모습말이다.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를 주장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다보스 회의의 의장인 클라우스 슈밥(Klaus Swab)이었다. 그는 주제를 발표하면서 지구촌의 이웃들에 대한 세심한 배려와 생태계보전에 대한 책임의식을 강조했다. 결코 뜬금없는 소리가 아니다. 인류가 당면한 새로운 과제라 여겨진다.

이제부터 강조돼야할 인류의 덕목은 권리의 주장이나 권리영역의 신장이 아니라 인간존엄을 최대한 유지시켜 나가는 영역의 확대요 유지라고 보여진다. 그것은 바로 인류에게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덕목으로 관용과 책임과 의무의 이행이 강조돼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경우에나 지속가능한 발전(sustainable development)이 우리시대의 화두인 것처럼 인간존엄의 지속가능한 발전의 필요조건을 든다면 역시 인류의 관용과 책임과 의무이행으로 집약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한다.

유엔(UN)에서 조차 언제인가 이 문제를 주제로 다뤄 본적이 있는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개인간의 도덕적 책무/국가간의 도덕적 책무/지구환경에 대한 도덕적 책무/우리 자신에 대한 도덕적 책무가 새로운 시대에 맡겨진 인류의 과제가 아닌가 하고 말이다.

우리나라 출신의 유엔사무총장 반기문씨는 과연 그 직에 있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인류를 위해 무슨 공헌을 할까를 생각하고 있을까 아니면 다음번에는 한국대통령을 한번 해볼까를 생각하고 있을까.

김중위 전 환경부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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