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경기천년, 경기 역사 문화의 전개] (2) 몽골 침입에 맙선 경기인의 승첩(勝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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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인성 전투도
몽고의 동아시아 정복 전쟁과 고려 침입

몽고의 침입과 100여 년에 걸친 원나라 식민지 상태는 고려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하게 했다. 임시 전란의 도읍 강도(江都, 강화도)에서 개경으로의 환도는 1170년 이후 100여 년에 걸친 비정상적인 무신집정의 정치상황을 국왕 중심으로 돌려놨다. 하지만 원나라의 부마가 된 원종 이후 공민왕의 반원 정책이 실시되는 1350년대까지 또 다른 100여 년은 그 상대가 원나라로 바뀌었을 뿐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고려 국왕은 원 황실의 공주와 혼인을 함으로써 모계를 통한 혈연관계로 맺어져 권력의 원천이 원 황실로 넘어갔다. 태조 이래 황제국 체제는 붕괴됐고, 국왕의 즉위와 폐위는 원나라의 관여로 결정됐다. 원나라의 문화는 고려가 쫒아야할 세계 선진문명 그 자체로 이해됐고, 몽고풍의 문화는 고려에 들어와 이후 우리문화에 깊숙하게 스며들었다.

몽고가 고려 침입의 구실로 삼은 것은 1221년(고종 8년) 사신으로 온 저고여가 돌아가던 길에 압록강 가에서 살해된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명분에 지나지 않을 뿐, 이후 충렬왕 때 원나라의 일본 정벌을 고려에서 상당부분 준비해야 했듯이, 몽고의 고려 침입은 그들의 동아시아 정복전쟁 과정에서 진행된 것이었다. 1231년부터 1259년(고종 46년)까지 30여년간 몽고의 고려 침략은 11차례 있었지만, 일반적으로는 이를 6차례로 정리해 파악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몽고군은 고려의 전국토를 유린해 곳곳이 폐허로 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려의 도읍을 끼고 있던 경기도에서는 당연히 많은 전투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고, 경기인(京畿人)들은 적극적으로 대응하며 전쟁 국면을 바꿀 수 있는 승첩을 이뤄냈다. 특히 전쟁 초반에 거듭된 흉년과 염병의 창궐, 이런 상황에 대처하지 못했던 정부에 대항하며 거처를 떠돌며 도적으로 바뀌어 생계를 유지하던 농민·노비들은 몽고군과의 전투에 적극 참여했다.

몽고의 1차 침입이 있었던 1231년 9월 하순, 파주의 마산 초적들은 황해도 황주 동선역 전투에 참전해 전투 국면을 승리로 전환시켰다. 고려 조정에서는 부족한 군사력을 초적들에게 크게 의지했다. 당시 무인집정자 최이는 정병(精兵) 5천 명으로 동선역 전투를 돕겠다는 마산 초적의 우두머리를 특별히 대우했고, 최우는 관악산 초적을 회유해 그들 60여명을 고려의 정규군인 우군에 편입시켰다. 또 광주성 주민들은 1231·32년의 전투에서 몽고군이 성을 에워싸고 공격하자 굳게 지켜내기도 했다.

그러나 1232년 무인집정자 최우가 정권 유지에 급급해 국도 개경을 버리고 강화로 천도하자 민심이 이반하기 시작했다. 어사대의 하위관리였던 이통(李通)은 경기의 초적과 개경 도성의 노비를 모아 반란을 일으켜 3군을 조직하고, 여러 사찰의 승려들과 연합전선을 폈다. 경기인들은 고려 조정과 몽고군이라는 이중의 적에게서 자신의 삶을 지켜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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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인성 승첩도
몽고의 2차 침입과 광주성·처인성 승첩


살리타이가 이끄는 몽고군은 1232년 8월 재차 고려를 휩쓸었다. 고려의 강화 천도에 대한 반응이었다. 그들은 10월에 본격적으로 남하해 개경과 한양산성을 거쳐 11월 광주성(남한성)에 이르러 한 달 이상동안 성을 수십여겹으로 에워싸고 공성전(攻城戰)을 펼쳤다. 이에 광주부사 이세화 장군이 이끄는 광주민들은 성을 수리하고 기묘한 응기응변으로 대처해 몽고병의 공격을 막아냈다. 특히 광주성은 남쪽지방으로 가는 전략 요충지였기 때문에, 이때의 전쟁은 2차 전쟁의 판도를 결정지을 수 있는 중요한 전투였다. 그 결과 몽고군을 이끌던 살리타이는 용인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고, 이 승리로 광주민들은 이후 국가로부터 요역(?役)과 잡공(雜貢)이 면제되는 조치를 받았다.

패전을 맞본 살리타이는 광주성을 포기하고 남진했다. 몽고군은 많은 희생을 겪고도 공략에 실패한 광주성 바깥에서 겨울을 날 수 없었다. 그들은 용구현(현재 용인시)을 거쳐 처인부곡(현재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일대)에 있던 처인성(아곡리 소재)에 이르러 다시 한 번 전투를 치러야 했다. 부곡은 고려시대에 인구나 토지가 일반 군현의 규모에 미치지 못하는 지역에서 국가의 특수한 역에 종사하던 계층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수원에 속해있던 이곳의 부곡민들은 용구현의 농민들과 비교해 국가에 추가적인 역(役)을 부담해야 했기 때문에 사회경제적인 측면에서 열세에 놓여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까지 용구현은 현감이 파견되지 못하고 감무(監務)를 통해 운영됐고, 처인부곡은 자체의 부곡리(部曲吏)를 통해 행정 전반이 관장되고 있었다. 그 중심은 토성(土城)으로 이뤄진 처인성이었다. 남한성을 공략하다가 실패한 몽고군이 남진한다는 소식을 들은 부곡민들은 이곳에 모여 그들을 대비하고 있었다. 인근 지역의 농민들도 피신하기 위해 이곳으로 들어왔다. 그중에는 백현원(白峴院)에서 머물던 승려 김윤후도 있었다. 전투 상황을 전하는 기록이 자세하지 못하지만, 김윤후는 처인부곡민을 이끌고 몽고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여 몽고의 최고사령관인 살리타이를 사살하는 큰 전공을 거뒀다.

‘고려사’와 원나라 역사책인 ‘원사’에서는 “살리타이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 처인성 전투를 지휘한 김윤후는 그 공으로 섭랑장에 임명됐고, 처인부곡은 처인현으로 승격해 고려의 지방행정군현에 포함됐다. 또 처인현의 운영을 위해 현감이 파견돼 그 위치가 용구현보다 높아졌다. 이 전투로 몽고군은 장수를 잃고 사로잡히는 등 궤멸돼, 결국에 철군함으로써 몽고군의 2차 침입은 실패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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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주산성 전경
몽고의 3차 침입과 죽주산성 승첩


2차 침입에 실패한 몽고는 이후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고려 정벌을 다시 계획했다. 그리고 1235년 5월에 세 번째로 고려를 침입했다. 몽고의 3차 정벌은 이후 1239년까지 지속됐는데, 강화의 고려 조정은 광주와 남경의 백성들까지 강화의 방어에 투입했다. 그러면서도 중앙군은 1·2차 때와 마찬가지로 본격적인 전투에 투입하지 않았다. 정권 유지에만 급급하던 무인집정자의 이런 조치에 민심은 점차 이반돼가면서도, 생활의 터전을 유린하는 몽고군에게 최소한의 저항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1235년 10월 야별초가 지평현(양평) 사람과 함께 밤에 몽고군 진영을 습격해 그들을 베고 사로잡으며, 말·나귀를 빼앗는 등의 전과가 있었다.

몽고의 3차 침입에 맞선 대표적인 승리는 1236년(고종 23년) 9월에 죽주에서 보름간 벌어졌던 죽주산성 승첩이다. 이 전투에서 죽주방호별감인 송문주의 활약은 단연 돋보였는데, 그때의 전황은 비교적 자세하게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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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주산성에 위치한 송문주 장군 사당.
“9월초 몽고군은 온수군(충남 온양) 전투에서 200여명이 전사하고 많은 병장기를 빼앗겼다. 그리고 북상하는 도중에 죽주성(안성 죽산면)에 이르렀다. 죽주성에는 인근 주민들이 들어와 몽고군에 대응하고 있었다. 처음에 몽고군은 성 안에 물이 부족할 것을 예측해 며칠만 기다리면 싸우지 않고 성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이 전투를 이끌었던 송문주는 못을 파서 큰 붕어를 풀어놓고 ‘우리는 장기전을 치러도 굶지 않는다’는 심리전으로 대응했다. 몽고군은 보통 성을 공략하기 위해 성 밖에 흙으로 산을 쌓고 그 위에 100걸음마다 대나무를 묶은 찬죽포(?竹?) 100여 매를 설치해 대개(大鎧, 갑옷)를 깨뜨리고 혹은 녹독(碌?)이라는 무기를 두 세 차례 쏘아 돌과 성 안을 편편하게 하고 성 위 망루를 무너뜨리는 전술을 썼다. 죽주성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이런 전술은 평지에 있는 성을 공격하는데 유효했지만, 죽주산성과 같은 능선 위에 쌓은 산성을 공격하는 데는 그렇지 못했다. 몽고군이 항복을 회유하자 죽주성민들은 성문을 열고 나가 쫒아버렸다. 포(砲) 공격을 받아 성문이 무너지는 위기도 맞았지만, 포로 역습했다. 또 사람 기름을 짚에 뿌려 불로 공격하면, 갑자기 성문을 열고 공격해 격퇴시켰다.”

죽주산성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원인은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다. 첫 번째는 험고한 지형을 이용해 쌓은 산성에 포를 쏘는 진지가 적병을 마주하는 곳에 설치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는 이 전투를 이끈 송문주 장군의 경험과 지략이었다. 앞서 그는 고려가 외구(外寇)에 맞서 거둔 3대 승첩 중에 하나인 몽고 1차 침입 때의 귀주성(龜州城) 전투에서 공을 세운 바 있다. 이때 몽고군은 처인성 전투에서 죽은 살리타이가 이끌고 있었고, 귀주성 전투는 죽주 출신인 서북면병마사 박서가 지휘하고 있었다. 이때 송문주는 이 전투에 종군했고, 그 경험은 죽주성 전투에 그대로 활용됐다. ‘고려사’에서는 이에 대해 “귀주에 있으면서 몽고의 공성술(攻城術)을 익히 파악해 신명과 같이 그 계획을 먼저 헤아리지 않음이 없었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귀주성의 영웅 박서의 적극적인 지원을 빼놓을 수 없다. 앞서 귀주성에서 패전한 몽고는 큰 충격에 쌓였다. 패전 2개월 후인 1232년 2월 고려에 파견된 몽고 사신은 박서가 항복하지 않고 귀주성을 굳게 지켰다는 이유를 들어 죽이려고 했다. 이에 무인집정자 최우는 박서에게 “그대의 충절은 비할 데 없으나, 몽고 사람의 말 또한 두려우니 잘 생각하라“고 하며 물러날 것을 압박해 그는 향리인 죽주로 돌아왔다. 이후 박서는 죽주에 머물다가 죽주성 전투에서 송문주를 적극 도왔다. 죽주산성의 승첩은 귀주성 승첩을 이끌었던 박서과 송문주의 경험과 전략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몽고의 침입에 경기인들은 그 삶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전쟁의 끝을 볼 수 없었다. 고려 조정에서는 산성이나 가까운 섬으로 들어가 경계하라는 명을 내리기도 했지만, 전쟁이 길어질수록 몽고에 회유당해 그들의 척후병을 맡기도 하고, 항전에 실패한 경기인들은 몽고군의 군량 등을 지원하는데 내몰렸다. 1253년(고종 40년)에 있었던 5차 침입 때 양근성(양평 소재)에서 주민을 이끌던 양근방호별감 윤춘은 10월 초에 몽고군이 성을 에워싸자 항복했다. 이에 몽고는 양근성의 정예 600여 명을 윤춘에게 거느리게 하고, 그중 300여 명은 배후에서 몽고군의 군량을 준비하도록 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1256년 4월에 대부도 별초는 시흥 소래산 아래에서 몽고군 100여 명을 격파했다. 항전과 투항이 혼재되는 상황은 개경으로의 환도가 이뤄지기까지 지속됐고, 시간이 흐를수록 투항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었다. 전쟁 속에서도 삶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고려사’에서는 고종 41년 몽고군에 포로가 된 사람을 21만여 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들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들은 더욱 많았을 것이다. 몽고 침입의 중요 타켓은 섬으로 들어가 있는 고려 조정을 육지로 나오게 하는 것이었다. 30여 년의 이 과정에서 매번 침입 때마다 몽고군은 경기 일원을 초토화시켰다. 경기인들은 이에 맞선 항전으로 전황을 뒤집는 승첩을 거두기도 했지만, 이 역시 한계가 분명할 수밖에 없었다. 100년에 가까운 식민통치기인 원나라 간섭기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김성환 경기도박물관 전시교육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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