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경기천년, 경기 역사 문화의 전개] (3) 고려후기 개성의 도자기

고려 후기 개성에서는 어떤 도자기가 사용되고 있었을까? 당시 정치적 격동기의 변화는 도자기의 제작과 사용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개성은 생산의 중심지가 아니라 소비의 중심지였으며, 최신의 청자부터 각종 청자들이 모여드는 집결지였다. 원래 고려시대 청자의 제작은 관영(官營) 수공업 체제로 강진의 대구소(大口所)에서 생산돼 중앙에 공납되는 시스템이었다. ‘고려도경(高麗圖經)’의 기록으로 보아도 청자는 고려에서 매우 귀하고 일부 귀족들만이 향유하는 것으로 돼있다. 그렇지만 고려 후기 개성의 청자 사용의 기록들과 그곳에서 사용됐던 청자들을 살펴보면 드라마틱한 변화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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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자상감국화절지문정릉명접시
먼저 고려 후기의 역사적 상황은 어떠했을까? 문화적으로 고려 후기의 기점이 되는 것은 1260년 원나라와 평화조약을 맺은 후 충렬왕(忠烈王, 1274-1308)시기부터로 볼 수 있다. 충렬왕 때부터 원의 부마국이 돼 안으로는 무신정권으로 그동안 실추됐던 왕권을 강화하는 한편, 중앙관제의 개정으로 정치적 변화를 꾀했다. 그러나 그동안의 무신정권과 몽골과의 30년 전쟁은 국민경제를 위기에 몰아넣었고, 원에 의한 지나친 조공과 일본 원정은 고려사회의 큰 어려움이었다. 충렬왕시기 몽골의 풍속이 받아들여져 기형은 대형화하고 편병, 귀대접, 고족배 등 새로운 형태의 그릇들이 등장한다. 무늬는 길상적인 내용으로 복잡하고 화려해지며 화금(畵金)이 가해진 청자가 제작됐다.

13세기 후반 화려한 길상적인 표현으로 왕실의 위엄과 염원을 보여주는 수작인 ‘청자 상감투각 공자 모란버들학문 의자’가 있다. 의자 윗면에는 꽃가지를 입에 문 봉황 한쌍을 중심으로 연화당초문이 음각으로 장식돼 있으며, 몸통은 4곳으로 크게 나눠 능화형 창 안에 모란·공작, 매화·대나무, 버드나무·학이 어우러진 흑백상감으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이 의자는 왕을 상징하는 봉황문, 부귀와 장수를 상징하는 공작·모란·괴석의 조합, 장수를 의미하는 학·대나무 등의 다양한 길상적 문양이 시문돼 있다. 의자의 문양들은 우리에게 하나의 이야기를 선사한다. 젊은 날의 고난이 있었으나 사랑하는 이와 함께 부귀와 장수를 누린다는 것이다. 이것은 의자의 주인이 주문한 내용을 담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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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감청자 의자
그리고 상감청자 장식에 금으로 그림을 그려넣은 화금자기는 화려함의 극치이기도 하지만 한국 도자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다소 파격적인 기술이다. ‘고려사’ 열전에 조인규(趙仁規, 1227-1308년)가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원세조(世祖, 1260-1293년)에게 화금자기를 바치자 세조가 화금의 제작과 재사용의 여부를 물은 뒤 다시는 화금자기를 진헌하지 말라는 내용이다. 또한 ‘고려사’세가 충렬왕 23년(1297년)에도 원나라에 금화옹기(金畵甕器)를 바쳤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화금자기가 원나라와의 외교를 위해 특별히 만들어졌고, 고려에서도 매우 귀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개성 만월대 왕궁터에서 발견된 것으로 ‘청자 상감화금 수하원문 편호 조각’은 당시의 기록에 전하는 화금자기의 실체를 보여준다. 이중 능화창 안에 나무에서 열매를 두 손으로 받는 모습을 한 원숭이를 상감했다. 원숭이는 한자어로 (원숭히 후)와 제후의 候가 중국어 동음어로, 원숭이가 열매를 받는 것은 높은 관직을 제수받는 것을 상징하는 길상적 의미를 담고 있다. 능화형 밖의 가득히 상감돼 있는 보상당초문의 윤곽에 금채의 흔적이 남아있다.

이상의 대표적인 사건과 유물로 보아 13세기 후반 몽고의 영향을 받은 화려한 귀족취향의 청자가 유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4세기 청자의 형태, 무늬에서 질적 하락이 눈에 띄고, 일반백성들까지 사용할 정도로 일반화되는 변화가 일어난다. 이와 관련해 충혜왕 복위 2년(1341년)의 은천옹주 임씨(銀川翁主林氏)에 관한 ‘고려사’ 기록이 흥미롭다.

“은천옹주 임씨는 장사하는 신(林信)의 딸로서 단양대군(丹陽大君)의 계집종이었다, 사기를 파는 것을 업으로 했는데 왕이 보고 총애한 지 3년, 왕이 장차 화비(和妃)를 들이려할 때 임씨가 이를 질투하니 곧 은천옹주로 봉해 그 마음을 위로해 줬다. 당시에 사기옹주(沙器翁主)라고도 일컬었다. ‘高麗史’列傳 卷2, 后妃2”

이 고려판 신데렐라 은천옹주의 이야기에서 고려 사회의 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충혜왕은 왕실재정 확보를 위해 상인들을 시켜 금·은·포목 등을 원나라에 가서 판매해 이득을 얻도록 했다. 큰 이득을 얻어온 상인들에게는 장군의 벼슬을 주기도 했다. 상인들을 가까이 하고 우대한 충혜왕은 사기(砂器) 그릇을 파는 거상인 임신(林信)의 딸을 후궁으로 맞아 왕실의 재정을 든든히 할 후원자를 얻은 것이다. 그리고 도자사적 측면에서도 큰 변화를 짐작하는데, 기록 당시인 1341년 이전부터 사기가 공공연하게 매매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청자의 대량 생산이 가능해졌음을 의미한다. 이전 관영 자기수공업 체제로 강진의 사기소에서 공납과 특수한 목적으로 제작되던 시스템은 해체돼 청자를 생산하는 도공들과 요업은 전국 각지로 확산됐다. 물론 여기에는 극성스럽게 자주 침입한 왜구들도 한몫을 했다. 전국에 흩어진 도공들이 대량 생산한 사기는 상인들의 거래를 촉진했고, 품질 면에서는 더욱 질이 떨어져 투박하고 무늬는 해체·생략돼 간략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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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민왕과 노국공주 초상
14세기 쇄락한 청자의 면모는 그 유명한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스토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공민왕(恭愍王, 1351-1374년)은 원나라에 반대하는 개혁정치를 시도했다. 그러나 정치적 후원자이자 사랑하는 아내인 노국공주가 아기를 출산하다 죽음을 맞이하자, 공민왕은 슬픔에 빠졌고 정치적으로 무력해졌다. 1365년 노국공주가 죽은 해 어떤 왕실 장례보다 크고 화려한 의례가 치러졌고, 1374년 공민왕이 죽기 전까지 수시로 그녀의 무덤을 찾아 제사를 지냈다. 노국공주의 능호인 ‘정릉(正陵)’이 상감돼 있는 청자접시가 전해지는데 청자의 빛깔은 탁한 회색기가 많고 무늬는 다소 투박하고 도안화된 모습이다. 정성을 다해 만든 왕실용 그릇임에도 이전에 비해 매우 질이 하락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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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자상감정릉명연당초문대접. 14세기 중반
결국 공양왕(恭讓王, 1389-1382년) 시기에 이르러서는 자기가 일상기명이 됐는데, 국가 시책으로 금속기 대신 자기와 목기를 쓰도록 권장한 기록으로 알 수 있다. 당시 개성에서 어디에서나 구해서 사용할 수 있는 생활자기가 된 것이다. 이렇게 퇴락한 상감청자는 조선시대 분청사기로 이어지며 전국에서 생산된다. 고려 후기~조선 초기의 상감청자 말기에 해당하는 가마터는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도수리, 초월면 학동리가 있으면 전국에서 골고루 발견된다. 소수만을 위해 만들어졌던 세계 최고 넘버원 고려청자는 이제 만인을 위한 그릇으로 새롭게 역사에 등장한 것이다.

김영미 경기도어린이박물관 학예운영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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