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경기천년, 경기 역사 문화의 전개] (4) 고려말...조선시대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

▲ 성균관 대성전 전경, 공자와 그의 제자들, 중국과 한국의 유학자들의 위패를 모슨 사당.
성균관은 인재양성을 위한 최고 교육기관이었다. 그 기원은 고려시대의 국자감, 신라시대의 국학, 그리고 멀리는 고구려의 태학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성균관은 고려 말과 조선시대의 최고 교육기관의 명칭으로 고려 충렬왕 24년(1298)에 성균감으로 됐다가, 충선왕 즉위년(1308)에 성균관이라 했다. 이후 공민왕 5년(1356)에 국자감으로 환원했다가, 1362년에 다시 성균관으로 고친 이후 조선시대에 최고 교육기관으로서의 명칭으로 사용됐다.

공민왕은 종래까지 국자감에서 유교학부와 함께 설치돼온 율학·서학·산학 등의 기술학부를 완전히 분리시켜 따로 교육시키게 했다. 이로써, 성균관은 유학교육만 전담하는 최고학부가 됐다.

개경에 있던 성균관이 조선이 건국되면서 현재의 자리에 세워진 것은 태조 7년(1398)으로 2년 뒤인 정종 2년(1400)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태종 7년(1407)에 다시 지어졌으나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렸다. 그 뒤 선조 39년(1606)에 복원하고 고종 6년(1869)에 크게 수리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개성에 남아 있는 성균관은 조선 성균관과 구분하고자 ‘고려 성균관’으로 부른다. 북한은 1988년부터 고려 시대 유물을 한데 모아 고려 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명륜당·대성전·동재·서재 등 18동에 해당하는 건물들과 그 주변에 역사 유물을 진열해 실내 및 야외 전시를 겸하고 있다.

고려 말과 조선 초기에 성균관을 이끌었던 인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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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성균관이 정비되고 신유학인 성리학을 적극 보급하는데 앞장섰던 인물은 주로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도은 이숭인, 척약재 김구용 등이다. 이색은 성균관의 으뜸 벼슬인 대사성이 돼 국학의 중영과 더불어 성균관의 학칙을 새로 제정하고, 김구용·정몽주·이숭인 등을 학관으로 채용해 성리학의 보급과 발전에 공헌했다. 정몽주는 성균박사·성균관사예·직강·사성 등을 역임했다. 우왕 때는 성균관대사성으로 있으면서 학제의 정비, 유학의 보급을 이끌었다. 정몽주의 생애에서 가장 오랜 동안 몸담았던 곳이 성균관이다. 김구용은 공민왕 때 성균관이 중건되자, 성균관 직강이 돼 정몽주·박상충·이숭인 등과 함께 후학의 훈화에 노력해 성리학을 일으키는 일익을 담당했다. 정도전도 성균관박사로 있으면서 정몽주 등 교관과 매일같이 명륜당에서 성리학을 강론했다. 박상충은 성균관 교관으로 있으면서 성균관생원의 수를 늘려 100인으로 하고 오경사서재(五經四書齋)를 마련해 생원을 교수하게 했다. 박의중도 함께 성균관 교관을 역임했다. 정몽주의 학통을 계승한 길재는 성균학정·성균박사를 역임했다.

조선시대 성균관 대사성은 정3품의 당상관직으로 전임직이지만 대부분 예문관이나 홍문관의 대제학이 겸했다. 주로 유학교육과 문묘의 관리에 관한 일을 담당했다. 조선 건국초기에 성균관 대사성을 역임한 인물은 유창·김약항·정탁·함부림·변중량·박신·유관·조용·장덕량·권근·정이오·유백순·최함·권우·윤회종 등이다.

조선 초기의 성균관

▶성균관의 직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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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학계첩(1747)에 담긴 성균관 조감도.
성균관은 조선왕조의 한양천도에 따라 새 도읍지의 동북부지역인 숭교방(지금의 성균관대학교 구내)에 터를 정하고, 1395년(태조 4)부터 건축공사가 시작돼 3년 만에 완성됐다. 당시의 건축물로는 대성전과 동무·서무의 문묘를 비롯해 명륜당·동재·서재·정록소·식당·양현고 등이 있었으며, 1478년(성종 9)에 도서관인 존경각과 반수가 갖춰졌다.

성균관의 직제는 조선 건국 초에는 고려 말의 직제를 이어받아 구성했다. 2품 이상의 대신 가운데 학덕이 높은 자를 성균관 제조 또는 겸대사성에 겸임시켜 교육에 임하도록 했으며, 성균관의 겸관으로 지사와 동지사를 설치했다. 1466년(세조12)의 관제 개혁 때 성균관의 직제도 대대적으로 정비됐다. ‘경국대전’에 명문화된 성균관 직제는 지사(정2품, 겸관) 1인, 동지사(종2품, 겸관) 2인, 대사성(정3품) 1인, 사성(종3품) 2인, 사예(정4품) 3인, 직강(정5품) 4인, 전적(정6품) 13인, 박사(정7품) 3인, 학정(정8품) 3인, 학록(정9품) 3인, 학유(종9품) 3인을 두고, 서리 10인을 배속시켰다. 사성 이하 전적 이상의 관원 중 5인은 종학(宗學)의 교관을 겸했고, 전적 이하의 관원중 16인은 사학(四學)의 교관을 겸했다.

▶성균관 유생들의 교육

성균관 유생의 정원은 건국 초기에는 150인이었으나, 세종 때에는 200인으로 증원됐다. 성균관은 관리후보생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이므로 입학해 유생이 될 수 있는 자격은 대체로 양반사대부 자제들에게 국한돼 있었다. 그러나 양반사대부 자제라 하더라도 일정한 자격을 갖춰야 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생원과 진사, 사학생도 중 15세 이상으로 ‘소학’ 및 사서와 오경 중 1경에 통한 자, 공신과 3품 이상 관리의 적자로서 ‘소학’에 통한 자, 문과 및 생원·진사시의 초시인 한성시와 향시에 합격한 자, 관리 중 입학을 원하는 자에게만 입학 자격이 주어졌다.

성균관에 입학한 유생들은 동재와 서재에 나눠 기숙하면서 공부했다. 이들은 아침·저녁 식사 때마다 식당에 비치된 명부인 ‘도기’에 서명하게 돼 있었다. 이것은 원점을 계산하는 근거로서, 오늘날의 출석점수와 같은 것이다. 원칙적으로 원점 300점을 취득한 자, 즉 성균관에서 통산 300일 이상 기숙하며 공부한 유생에게만 관시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성균관의 교육 내용은 가장 기본적인 사서와 오경을 비롯해 ‘근사록’ ‘성리대전’ ‘통감’ ‘좌전’ ‘송원절요’ ‘경국대전’ ‘동국정운’ 등이다. 과거과목에 따라서 변동이 되기도 했다. 이 밖에 시·부·송·책과 같은 글을 짓는 방법을 비롯해 왕희지와 조맹부의 필법도 익히게 했다. 주자학 이외의 이단서는 학령에도 명시돼 있는 바와 같이 철저하게 배격됐다. 성균관 유생들은 학령에 의거해 학관 일강과 순과를 비롯해 예조 월강의 평가를 받았으며, 그 성적은 연말에 종합돼 식년시와 천거에 참작됐다.

한편, 성균관유생들은 과거에 있어서 여러 가지 특전을 부여받았는데, 관시·알성시·춘추도회 등이 그것이며, 그 밖에 천거의 특전을 받기도 했다. 성균관은 문과 준비를 위한 과거 교육을 담당하는 기관이었기에, 입학규정은 엄하면서도 일정한 재학기간이나 졸업일이 없었다. 과거에 합격하는 날이 바로 졸업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 성균관 유생들의 일상생활 중심이었던 기숙사 '동재'. 유생 자치활동에 의해 운영됐고 규칙이 엄격했다.

▶성균관의 재정과 운영

성균관 유생들이 재학하는 동안 일상생활의 중심이 되는 곳은 기숙사인 동·서재였다. 재에서의 유생들의 생활은 규칙이 엄격했고, 유생들의 자치활동에 의해 운영됐다. 유생들은 동재와 서재에서 기숙사생활을 하는 동안 음식과 학용품 등의 생활필수품 일체를 국가로부터 지급받았다. 이같은 비용은 국가에서 성균관에 내려준 학전의 세수와 성균관 외거노비의 신공으로 충당됐다. 학전은 건국 초에 지급된 1천35결과 세종 때에 지급된 965결을 합쳐 2천 결이던 것이, 성종 때에는 2천400여 결이 됐다. 성균관 노비는 건국 초에 그 수가 약 300명이었는데, 대부분 고려 충렬왕 때 성균관을 재건하는 데 공이 컸던 안향이 기증한 사노비의 후손들이었다. 세종이 노비 100명을 더 내려주고, 그 뒤의 여러 왕들도 유학진흥과 인재양성을 위해 노비를 내려주는 예가 있어서 그 수는 400여명으로 늘어났다. 성균관 유생들의 교육경비로 쓰이는 전곡의 출납은 양현고에서 담당했다.

성인과 선현에 대한 향사

성균관은 건축 공간의 배치에 있어서도 교육 공간인 명륜당과 동·서재, 그리고 제향 공간인 대성전 및 부속 건물 등으로 구분된다. 제향 공간인 대성전은 문묘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문묘는 공자와 안자·맹자 등 10위, 송나라의 유학자 6위, 우리나라의 명현 18위를 모시고 있다. 원래는 공자를 중앙으로 해 4성(聖)과 공문10철(哲), 송조6현(賢)을 대성전의 좌우에 배향하고, 동무와 서무에 중국 명현의 신위와 우리나라의 18현인 설총·최치원·안향·정몽주·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김인후·이이·성혼·김장생·조헌·김집·송시열·송준길·박세채의 위패를 모셨다. (1949년 전국유림대회 결의에 의해 동무와 서무에 종사한 중국 명현의 위판을 묻고, 우리나라의 명현 18위를 대성전으로 올려 배향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균관에서는 봄가을로 2회에 걸쳐 제사를 행하는데, 이때의 제사를 ‘문묘석전제’라 한다.
▲ 개성 '고려 성균관' 대성전. 작은 사진은 북한서 설치해 놓은 성균관 안내판.
성균관은 고려 말에 개관해 조선시대를 거쳐 지금까지도 존치하고 있는 유학교육기관이다. 고려 말에는 신진 사대부를 주축으로 신유학을 정착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곳이다. 조선 초기에 있어서는 주자학을 연구, 보급하는 학문의 전당으로서의 기능과 주자학 이념에 입각해 관리를 양성하는 관리양성소로서의 기능을 발휘함으로써, 조선왕조의 지배사상과 관료체제를 재편성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홍순석 강남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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