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경기천년, 경기 역사 문화의 전개] (5) 고려말 조선초 경기도 불교미술의 동향...석조문화재를 중심으로
고려-조선 교체...불교문화 교차점...전통 계승·새로운 양식 출현 부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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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륵사 다층석탑
한국불교문화를 대표하는 석조문화재는 삼국시대 말기인 7세기를 시점으로 조성되기 시작한 이래 현재에 이르기 까지 지속적으로 건립되고 있다. 아마도 돌로 만들었기에 그 어느 조성재료 보다도 영속성(永續性)을 담보할 수 있다는 것이 주된 원인이라 생각된다. 한편으로는 석조문화재의 주된 조성재료인 화강암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던 석공들의 실력과 예술적 감각도 주된 원인중 하나라 생각된다.

고려말 조선초 경기도 지역에는 많은 수의 석조문화재가 건립되고 있다. 이에서는 고려와 주선의 수도였던 개성과 한양이 모두 경기도라는 지역 안에 공존했기에 문화적 전통의 계승과 창조라는 두 가지 측면이 모두 파악되고 있다. 한편으로는 ‘고려말 조선초’는 고려와 조선이 교체되는 전환기라는 시점이기에 기울어가는 고려와 새롭게 부상하는 조선 불교문화의 교차점이라 하겠다. 때문에 전통의 계승과 새로운 문화의 창조라는 면면이 부각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시기 경기도의 석조문화재서는 석탑을 비롯해 기왕에 건립되던 다양한 쟝르의 석조문화재가 석탑과 석등 그리고 석조부도에 국한해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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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종사 오층석탑
석탑


경기도내에 건립돼 있는 많은 석탑 중 조선전기의 것으로 가장 대표성을 지닌 석탑은 신륵사다층석탑(보물 제225호), 수종사오층석탑(보물 제1808호), 신륵사 다층전탑(보물 제189호)이다. 전자의 석탑은 신륵사 극락보전 앞에 건립돼 있는데, 사찰이 영릉의 원찰로 확정되는 1472년(성종 3)에 건림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삼국시대 이래 한국 석탑의 조성재료는 화강암이 중심을 이루고 있지만, 이 석탑은 대리석으로 조성됐다는 점에서 주목하다. 뿐만 아니라 기단부에 새겨진 구름과 용인 결합된 문양은 조각기법에 있어 얼굴과 비늘 그리고 발톱 등의 묘사에 있어 매우 정교하고 세련됐을 뿐만 아니라, 생동감 있는 표현은 구름무늬와 잘 조화를 이뤄, 이 시기 석탑과 문양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수종사 오층석탑은 수종사 경내에 건립돼 있는데, 고려시대에 성행하던 고구려계 석탑인 팔각다층석탑의 양식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석탑 전체에서 뿜어내는 안정된 균형미와 더불어 당시 한강을 통한 문화전파의 경로를 추정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주목되고 있다. 1957년 5월 29일에 행해진 석탑 해체·수리시 모두 19구의 불상이 발견됐고, 1970년에 시행된 이건작업시 모두 12구의 불상이 출토된 바 있다. 출토된 불상 동체의 명문과 불상조상기 및 석탑의 묵서명(墨書銘) 등을 고려할 때 이 석탑은 1493년 이전에 건립된 석탑으로 파악된 바 있다. 신륵사 다층전탑은 비록 석조문화재는 아니지만, 반원내에 당초문을 새긴 문양전을 사용해 건립하고 있다. 이는 통일신라시대 이래 유문전(有紋塼)을 사용해 전탑을 건립하던 전통이 유지되고 있고, 강변에 위치하고 있어 풍수비보탑의 성격을 지니고 있어 주목된다. 이밖에도 수도였던 한양에 건립된 원각사터에 건립된 10층 석탑 역시 고려시대에 건립된 경청사지 십층석탑을 충실히 계승해 건립된 석탑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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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륵사 보제존자 석종
석등


현존하는 이 시기의 석등으로는 회암사지 쌍사자석등(보물 제389호, 조선초기 건립 추정), 회암사 나옹선사부도 앞 석등(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0호, 1381년 건립 추정), 회암사 지공선사부도 앞 석등(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49호, 1372년 건립 추정),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 앞 석등(보물 제231호)이 있다.

이들 석등은 고려후기에서 조선초기에 이르는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대체로 다음과 같은 변화상을 보이고 있다. 먼저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 앞 석등에서는 다른 예와는 달리 화사석을 납석제로 조성했다. 더욱이 이에는 기둥과 용 그리고 비천상은 물론 목조건축의 창방과 평방까지 조식해 다른 석등에서는 볼 수 없는 특수한 장엄을 보이고 있고, 화창에서는 페르시아 양식도 확인되고 있다. 이처럼 석등에서 서역(西域)의 양식이 검출됨은 사찰의 외곽을 흐르는 남한강이 서해로 연결돼 항시 수로를 통해 새로운 문화를 수입하기 쉬운 조건을 지니고 있음에서 기인한 것으로 판단된다. 무학대사 부도 앞 석등은 정통적인 쌍사자석등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특히 고려시대에 건립된 고달사지쌍사자석등에서 보여준 변화를 따르지 않고 있어 시공을 넘어 연결되는 문화의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주는 작품이라 생각된다. 뿐만 아니라 화사석에서 기존의 전형적인 양식을 탈피해 전·후면에만 화창을 개설하고 모서리에 원주를 모각한 점과 옥개석 하면에 모각된 목조건축의 양식은 다른 석등에서는 표현되지 않았던 수법이어서 더욱 주목된다. 이와 더불어 경기도내에 건립된 4기의 석등은 모두가 부도의 전면에 배치됨으로써 불교적인 성격의 석등이 장명등으로 전환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조성함과 동시에 이같은 유형의 한 규범을 완성했다는데 가장 큰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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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암사지 무학대사 부도
석조부도


이 시기의 부도로는 회암사지 무학대사부도(보물 제388호, 조선초기 건립 추정), 회암사 나옹선사 부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0호, 1381년 건립 추정), 회암사 지공선사부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52호, 1372년 건립 추정),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보물 제228호), 사나사 원증국사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2호, 1383년 건립 추정), 회암사지 부도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2호)등이 있다.

이중에서 먼저 주목되는 것은 회암사지에서 확인되는 부도의 배치법이다. 즉, 이곳에는 고려말 조선초에 있어 선종의 3대선사라 일컫는 지공·나옹·무학대사의 부도를 한 곳에 건립하고 있다는 점에 의의를 둘 수 있다. 나즈막한 산등성의 가장 윗쪽으로부터 사제(師弟)의 순으로 배치하고 있어 마치 일가의 가족묘와 같은 배치를 보이고 있다. 아울러 각 부도의 전면에는 석등을 배치해 묘역을 구성하고 있는 점은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에서와 같이 앞 시대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배치법을 보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무학대사의 부도에서는 팔각원당형을 유지하면서 탑신부 전체를 변형시키고 있다. 즉, 탑신부를 원구형으로 변형한 후 전면에 운용문(雲龍紋)을 가득 조각했는데, 사실적이고 생동감있게 묘사돼 있다.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은 회암사를 크게 일으켰던 나옹스님의 사리탑으로 커다란 방형의 기단 위에 석종형부도를 놓았다. 이 형식은 팔각원당형과 더불어 통일신라시대에 발생한 양식으로 당시에는 울산 태화사지십이지부도가 유일한 예로 전하고 있는데 상기의 부도 역시 같은 양식을 보이고 있다. 이를 보면 나옹화상 부도는 통일신라시대에 확립된 양식을 답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기단의 전면과 양쪽 면에는 계단을 설치하고 상면에 탑신을 놓았다는데서 다른 석종형부도와는 특이점을 보이고 있다. 이같은 부도의 배치 형식은 양산 통도사나 김제 금산사에서와 같이 계단탑의 형식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고 하겠다. 이와 더불어 회암사지 부도탑은 ‘세조실록’에 기록됐듯이 진신사리의 특징인 방광(放光)·서기(瑞氣)·사리분신(舍利分身) 등이 기록돼 있는데, 1464년 4월 효령대군의 발원에 의해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사리탑으로 파악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평면구도에 있어 원형과 팔각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데, 이는 통일신라시대에 석탑에서 시도된 다양한 평면구도의 결합이 고려시대에 조성된 흥법국사탑에서 부도로 전이되고, 조선전기에 이르러 석조부도의 한 양식으로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기단부에는 다른 부도에서는 볼 수 없는 기린(麒麟)이 조식되고 있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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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륵사 다층석탑 기단부 구름과 용 문양.
맺는말


고려말 선초라는 시기는 고려에서 조선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쇠망해 가는 고려의 미술과 신흥국의 위상의 한껏 배어있는 조선사대의 그것이 혼재되면서도 새로운 양식이 출현하는 시기라 하겠다. 앞에서 석탑과 석등 그리고 부도에 국한해 이 시기 석조문화재에 드러나는 변화상을 살펴보았다. 이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시대에 건림된 석탑은 전국적으로 약 10여기가 현존하고 있는데, 이중 과반수에 가까운 수가 도내에 분포돼 있다. 이중 평면방형의 일반형 석탑에 있어서는 타 지역에 비래 양식적으로 우수한 일면을 보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수종사에 건립된 팔각형의 석탑은 고려시대에 고구려의 영토안에 건립되던 다각다층탑의 양식이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계승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둘째, 부도에 있어서는 회암사지 무학대사부도에서는 탑신을 원구형으로 바꾼후 구름과 용을 가득 조각한 수법등은 경기도 지역 문화의 창의성과 우수성이 돋보이는 예라 하겠다. 뿐만 아니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에서는 기단으로 오를 수 있는 계단을 설치하고, 상면에 석종형의 탑신을 배치해 주목되다. 문화의 우수성이란 새로운 것의 창안에서도 찾을 수 있지만, 앞 시대의 것을 계승 발전시키는 재창조가 더욱 어려운 일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나라 부도의 발달사상에서 회암사지 무학대사부도가 차지하는 위치는 타 지역의 그것에 견주어 뒤지지 않았던 것으로 믿어진다. 더불어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 역시 전통적인 사리싱앙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

셋째, 석등에 있어서는 양식적인 면을 제외하더라도 위치상의 문제에 있어 중요한 변화가 이뤄지고 있다. 즉, 백제의 미륵사지에서 조성되기 시작한 석등은 가람배치상에서 금당이나 석탑의 전면에 위치하는 것이 법칙이었다. 그러나 경기도 내에서 확인되는 석등은 모두 부도 앞에 위치하고 있어 장명등으로의 이행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이같은 현상은 타 지역에서는 보기 힘든 유례로서 새로운 창안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결국 도내의 석등이 지닌 위치상의 문제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대부분의 묘역에 장명등을 건립하는 모델을 제시한 것으로 생각된다.

나말여초라는 변환기에 조성된 경기도의 석조문화재는 과거로 부터의 전통적인 양식의 계승과 더불어 신흥국가로 비상하던 조선의 문화적 능력과 당시 사람들의 소양을 보여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박경식 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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