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경기천년, 경기 역사 문화의 전개] (6) 고려와 조선을 이끈 경기인들
심마니 등 생업 위해 몇 달 타지생활...벼슬살이하러 고향 떠나 서울 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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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와 (오른쪽 사진) 김득산 作 '성하직리'
고려 말기·조선 초기 경기(도)의 가구, 인구는 얼마나 됐을까

고려시대에 현재 경기도의 영역에 얼마만큼의 사람들이 살았는지, 그들은 어떤 경제활동을 하며 생계를 꾸렸는지, 주로 어느 곳에 살았는지 등에 대한 것들을 알 수 있는 자료는 거의 없다. 당시 이런 상황을 살필 자료로는 각 지역의 경제·사회·문화 등 제반 상황을 총정리하고 있는 ‘지리지’류를 우선 꼽을 수 있다. 그런데 ‘고려사지리지’는 1450년대에 편찬됐고, 내용도 간략해 이런 궁금증을 풀어주지 못한다. 이와 비교해 1420~30년대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그런 내용들을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특히 ‘세종실록지리지’를 편찬하기 위한 기초 작업으로 1425년에 작성돼 현재 전하는 ‘경상도지리지’를 염두에 두면 당시 ‘경기지리지’ 또한 간행됐고, 이를 위해 각 군현의 읍지가 제작됐을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 결과의 종합이 ‘세종실록지리지’이다.

전통시대에 사회변화가 현재와 같이 급격하게 진행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세종실록지리지’는 고려 후기 사회의 여러 모습을 추적하는데 유용한 자료다. 이 책에서 당시(1400년대 전반) 경기(도)에 소속돼 있었던 42개 군현(시군)의 호(가구), 인구, 성씨 등을 살펴보면, 전체 가구는 2만6천555호, 인구는 6만735명, 성씨는 470종으로 집계된다. 여기에 당시 충청도에 속했던 죽산현과 평택현의 가구 649호, 인구 2천822명, 성씨 16종을 더하면 가구는 2만7천204호, 인구는 6만3천557명, 성씨는 482종이다. 이 통계들은 현재 경기도의 가구 490만여 호, 인구 1천290만여 명과 비교해서 초라하다. 그런데 인구수 대비 가구수 비율은 현재 1가구 당 2.6명과 비교해 2.3명으로 비교적 근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통계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전국 8도 중에서 가장 높은 수치이다. 이런 측면에서 경기(도)의 위상이 이후 변화하지 않고 적어도 600여 년동안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 15세기 전반의 경기도 가구, 인구수에는 세금 납부 대상에 누락됐던 계층들이 빠져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포함하면 훨씬 많았을 것이다. 3~4배 정도로 가늠된다.

한편 1400년대 전반에 경기(도)에서 조사된 여러 성씨집단은 482종이었다. 각 성씨집단의 규모가 제각기 다르겠지만, 이를 가구와 인구수로 나눠보면 평균 1개 성씨당 56호, 131명 정도 규모의 성씨집단이 운영되고 있었다. 경기(도)의 각 곳을 본관으로 한 성씨는 광주이씨·여흥민씨·수원최씨 등 약 252개의 토성(土姓·촌성, 촌락성 포함) 집단과 외부에서 경기(도)로 이주해온 성씨집단인 내성(來姓)과 속성(續姓) 등의 성씨집단이 51개였다. 그리고 조사 당시에 이미 각 군현에서 사라진 망성(亡姓)류의 성씨집단이 179개였다. 경기(도)에는 토성으로 이뤄진 성씨집단이 250여개에 달할 정도로 많았지만, 타지에서 이주해왔거나 이주해간 성씨집단 역시 230개에 이르렀다. 토성과 그 외 성씨집단의 구성이 10:9로 15세기 전반에도 이미 많은 인구의 유입과 이동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역시 경기(도) 역사문화의 정체성과 관련해 해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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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릉 신도비
경기인(京畿人)들은 어떤 일을 하며 살았나


당시 경기인(京畿人)들은 어떤 일에 종사하며 살았을까. 현재 경기인들은 정말 많은 직종에서 생업을 위해 일하고 있다. 경기도내의 일자리에서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인근 서울이나 인천 또는 경기 동부, 남부의 경우 충청도와 강원도로 출퇴근을 하는 경기인들도 제법 많다. 지금보다 많지 않았겠지만, 고려 말에도 그런 경기인들이 있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당시 경기(도)를 대략 5개 권역으로 나누고 있다. 광주목·양주도호부·수원도호부·철원도호부·부평도호부가 그것이다. 그리고 목과 도호부 밑에는 7~8개 군현이 소속돼 있었다. 이것은 현재 경기도의 문화권역과 대략 일치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중에서 바닷가에 위치한 군현에서는 농업보다 수산업이, 산간에 위치한 군현에서는 이에 맞는 경제활동을 했다. 그렇지만 경기인들이 종사했던 경제행위에서 농업은 단연 우선이었다.

경기(도) 42개 군현의 논밭(墾田)은 대략 32만 결이었다. 1등전을 기준으로 1결(結)은 9천800여㎡, 약 3천 평 정도에 달한다. 그런데 광주목의 논밭이 20만 결이었기 때문에 나머지 40여 개 군현의 논밭은 모두 합쳐 12만 결에 불과했다. 그중에서도 논은 주식인 쌀의 주요 생산지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했다. 하지만 전체 논밭가운데 논은 15만 결이 채 되지 않는다. 전체 논밭의 46%에 해당한다. 논농사보다 밭농사가 많았던 강원도와 비교할 수 없지만, 경기(도) 역시 밭농사가 논농사보다 약간 많았다. 가평현은 논이 123결, 삭녕(연천)현은 286결, 안협현(현재 강원도)은 6결에 불과했다. 당시 논농사의 중요성은 ‘세종실록지리지’에서 각 군현의 논밭 규모를 정리하면서 전체 논밭은 얼마였는데 그중 논은 ‘1/2이다’ ‘1/6이다’ ‘밭보다 약간 적다’ ‘1/4이 넘는다’ ‘1/4도 안 된다’ ‘단지 몇 결뿐이다’ 등으로 논의 규모를 반드시 밝히고 있음에서 확인된다. 생업에서 농사, 그중에서 논농사의 중요성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 토양이 어느 작물에 맞는지를 밝히고, 각 군현에서 서울로 바치던 토산물(土貢)도 자세하게 기록했다. 그중 눈에 띄는 것은 광주의 마른 멧돼지고지·토끼젓·물고기젓·나무그릇·버드나무그릇, 먹의 주원료인 소나무그을음, 염색재료인 단풍나무잎, 지평(양평)현의 붉은 향나무·흰 향나무, 양성(안성)현의 민어·마른 숭어, 죽산(안성)현의 삵괭이 가죽, 평택현의 족제비털 등이 있다. 각 군현에서 생산되는 약재도 하나하나 기록했는데, 광주의 경우에는 백변두·삼씨·회향·해바라기씨·무우씨·참외꼭지·맨드라미꽃 등 여러 약용작물을 의원으로 해금 재배하게 했다. 다른 군현에서는 이런 내용을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마찬가지였다.

가평 조종면 토음사이리(土音寺伊里)에는 잠실을 두어 뽕나무 2만여 그루를 심고 인근 고을에서 징발한 관노비 50여명에게 누에를 치도록 했다. 바닷가를 끼고 있는 서해안의 남양·안산·부평 등에는 현재 양어장과 비슷한 어량(魚梁)을 설치해 각종 물고기와 조개·낚지 등을 조업했는데, 인천에는 무려 19곳이나 있었다. 안산·김포·통진·강화·부평 등에서는 소금 생산을 하는 염전(鹽所)을 운영했다. 철원 땅은 넓지만 사람이 드물어 무술을 연마하는 강무장을 만들고 이를 지키는 사람과 포수(網牌)를 둬 운영했다. 강화의 진강산과 길상산을 연이어 40여리가 넘는 곳에 목장을 설치해 나라의 말 1천500필을 키우기도 했다. 강화도 마니산 서쪽 바닷가에서 나는 청란석(靑蘭石)은 비문을 새기기에 좋아 조선 태종의 헌릉 신도비를 이 돌로 만들었다. 물론 경기인들이 강화에서 광주(현재 서울 세곡동)까지 그 운송을 담당했다.

경기인들은 당시 자연조건에 순응하고 때론 극복하며 현실에 맞는 여러 일에 종사했다. 이 점에 있어서는 현재의 우리와 같다. 그들은 툭 트여 바다가 보이는 양지바른 곳에, 산이 높아 기후가 춥고 고르지 않은 곳에서는 햇볕 잘 드는 남향에, 논농사와 밭농사를 주로 하던 곳에서는 얕은 구릉의 폭 안긴 곳에 마을을 이루며 살았다. 그 마을에서는 초가지붕 사이로 보일듯말듯한 굴뚝에서 모락모락 연기들이 아침저녁으로 피어올랐다. 그때의 경기인들이 살던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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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인(京畿人)들은 어디에서 살았나

경기인들의 대부분은 생업과 관련한 곳, 그곳에서 가까운 곳에서 살았다. 지금이야 자동차로 100여 리를 출퇴근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그때는 그러지 못했다. 멀어야 고작 10~20여리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물론 장사하는 사람들이야 달랐다. 산을 타니 심마니들도 달랐다. 그들은 집을 나서면 며칠, 때론 몇 달을 집밖에서 살아야 했다. 그런 경우를 제외하곤 대부분 자신이 사는 마을을 벗어나지 않았고, 못했다.

벼슬을 하는 경우에는 고향을 떠나 서울(개경 또는 한양)에서 살았다. 그들은 대부분 근무하는 관청과 가까운 곳에 살림집을 마련했다. 고려시대의 경우 강감찬(948~1031)·안향(1243~1306)·목은 이색(1328∼1396)·한수(1333~1383)의 집이 개성의 양온동에 있었다. 양온동은 고려 문종 때 술과 감주를 만들고 관리하던 관청인 양온서가 있던 곳으로, 현재 황해북도 개성시 역전동이다. 익재 이제현(1287∼1367)의 집은 무쇠점이 있어 무쇠울·무시울로 불렸던 수철동(지금의 개성시 성남동)에 있었고, 최영(1316~1388) 장군의 집은 개성시 운학1동에 있는 배오개, 이현에 있었다. 그곳은 운학1동에서 운학2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남쪽 보선동과의 경계에 있는데, 예전에 배나무가 많이 자랐던 데서 비롯됐다. 또 포은 정몽주(1337∼1392)의 집은 화원(花園) 북쪽에 있었다.

벼슬살이 도중에는 여러 정치적인 상황에서 어려움을 겪으면 타지로 유배되곤 했다. 충정왕 때 찬성사를 지낸 척약재 김구용(1338~1384)은 외가인 여주에, 이색은 공양왕 때 장단군으로 귀양돼 그곳에서 잠시 머물렀다. 우왕 때 임견미·염흥방 세력과 대립했던 조운흘(1332~1404)은 광주의 몽촌(현재 송파구 방이동 몽촌토성)에 우거하면서 임견미·염흥방 당(黨)의 가족들이 멀리 귀양가는 것을 보고 “사립문에 해는 낮이 돼서야 사람 불러 열리고/임정(林亭)에 걸어 나와 돌이끼[苔]에 앉았네/어제 밤 산중에 비바람 사나워/시내에 가득 흐르는 물이 꽃을 띄워 오누나”라는 시를 지었다. 정도전에게 ‘동국의 시인’이란 평을 들은 김경지는 죽주로 귀양갔다가 외가인 여주로 옮겨 여강어부(驪江漁父)라 스스로 부르며 7년을 살았고, 신돈의 난을 피해 통진(김포)에 우거했던 민유는 역시 공민왕 때의 학사로 십여리 떨어진 동성현에 살던 주사옹과 시와 술로 교유하며 남촌 첨지와 북촌 첨지를 자칭했다.

고려 말에 벼슬에서 물러나 역시 김포에 살았던 서견도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했다는 소식을 듣고 “천 년 동안 신도(神都)가 한강을 격해/많은 충량한 신하가 영명한 임금을 도왔네/삼국을 통일해 하나로 만든 공 어디 있나/문득 왕업이 깊지 않음을 한탄하노라”는 시를 지었다. 이에 대간(臺諫)이 벌을 내릴 것을 청하자 태종은 “서견은 고려의 신했으므로 지금 시를 지어 추모한 것이다. 이 사람은 백이·숙제와 같은 무리이니, 상은 줄 만지 죄줄 수는 없다”고 했다. 이색의 벗이자 과거급제의 동기였던 이석지는 벼슬을 그만두고 용인에서 30여 리 떨어진 남곡에 은거했는데, 이색은 이에 대한 배경과 전원생활을 동경하는 ‘남곡기(南谷記)’를 지은 바 있다. 그의 후손들이 이곳에 정착했는데, 손자인 이종검·종겸은 벼슬에서 물러나 남곡에 효우당을 짓고 살았다. 이공수(1308∼1366)는 풍덕군(현재 개성의 남쪽)에 별장을 짓고 살며 스스로를 남촌(南村)선생이라 불렀다. 또 쌍매당 이첨은 파주 동산(童山) 밑에 살았고, 1402년에 과거에 장원한 신효(申曉)는 사간원 정언에서 파직되자 고양에서 살며 서호산인(西湖散人)이라고 했다.

고려 말·조선 초 경기인들이라고 현재의 경기인과 다른 사회적 환경에서 살았거나 다른 생각을 하며 살지 않았다. 이것은 ‘경기’라는 사회문화적 특수성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문화의 정체성 또한 여기에서 만들어졌다.

김성환 경기도박물관 전시교육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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