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경기천년, 경기 역사 문화의 전개] (7) 광주이씨(廣州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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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둔촌 이집 선생 영정
무신 난을 계기로 고려사회는 커다란 변화를 겪는다. 먼저 귀족사회가 붕괴됐고, 농장이 사회문제로 대두됐으며, 과거를 통해 인재를 배출하는 관료제도가 더욱 중요하게 인식됐다. 더구나 불교의 지위가 추락함에 따라 이를 대신할 새로운 사상적 지주가 요구돼 송나라 때 유학인 주자학(朱子學)이 도입됐다. 이 주자학은 보다 형이상학적이고 이론적인 유교철학으로서 새로운 국가의 통치이념과 지배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정신적 지주가 됐다.

고려후기에도 귀족세력과 권문세가들은 여전히 경기도를 기반으로, 중앙정치무대에서 활동하고 있었으니 파평윤씨, 공암허씨, 인주이씨, 황려민씨, 남양홍씨, 서원염씨, 행주기씨, 양성이씨, 덕수이씨 등이 대표적 경기지역의 가문들이다. 한편 성리학적 사고와 과거제를 통해 관직에 진출한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들도 정국의 한 부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사대부는 무신 난 이후에 등장한 신흥관료층으로서 학자적 관료이다. 이들은 대개 향리출신의 재향지주로서 권문세가와는 경제적·정치적·사상적으로 이해를 달리했으며, 농장 노비제의 개혁을 주장했고 유교적 전통과 학문적 배경, 친명반원(親明反元)의 성향으로 고려왕조 붕괴의 주역으로서 조선건국의 이념을 제시했고 학문과 행정적으로 이성계를 도와 조선건국을 주도한 세력이다. 당시 경기도에서도 새로운 지식층들이 배출되는 동시에 기왕의 권문세가, 귀족들도 관료체제 하에 편입되면서 함께 성장했다. 광주이씨, 한양조씨, 여흥민씨, 죽산박씨, 파평윤씨, 공암허씨 등의 가문들은 조선 초기까지 지속적으로 관인을 배출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주도했다.

고려시대 경기도는 수도인 개성 인근이었으며, 현재 경기남부 지방은 양광도(楊廣道)였고, 광주도 양광도에 속했다. 고려시대의 지방제도는 개경·3경·4도호부·8목-주부군현·촌, 향·소·부곡으로 이뤄졌는데, 광주는 전국에 설치된 8개의 목(牧) 중 하나로서 지방행정 체계의 실질적 중심지였으며, 중앙에서 지방관이 파견되는 중요한 지역이었다. 광주이씨는 이렇게 큰 고을에 기반을 둔 토성(土姓)이었는데 고려후기에는 신흥사대부를 대표하는 가문으로 성장해 조선 개국에 절대적 지주가 됐고, 조선 초 정국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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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영천에 위치한 시조 이당의 모역에 세운 비석.
광주 향리 이당(李唐)


‘광주이씨세보(廣州李氏世譜)’에 의하면 “시조 이자성(李自成)은 신라시대 칠원(현재의 경상남도 함안군)에 기반을 둔 지방호족으로서 칠원성의 성주로 대대로 살고 있었으며, 신라 멸망시 고려에 항복하지 않고 항거하다 왕건에 의해 일족이 모두 회안(淮安 : 현재의 경기도 광주지역)의 관노비가 됐다”고 전한다. 그 후 그 후손들은 대대로 광주에서 거주하면서 경제적 부를 이뤘고 신분상승을 꾀하게 된다. 고려후기에 이르러 광주이씨 가문을 현창시킨 인물은 이당(李唐)이며, 광주이씨의 실질적 시조이다.

이당은 고려 말 광주의 아전(衙前)으로서 국자감(國子監) 생원시에 합격했고 조선 건국 후에는 자손들의 명성으로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로 증직됐다. 광주에서 대대로 살던 광주이씨 가문은 이당 대에 이르러 번성하게 되는데, 이당은 광주의 향리였으며 상당한 경제적 기반을 갖춘 중소지주로서 당시 지역의 유력한 권세가와 혼인관계를 통해 신분상승을 꾀했던 것 같다. 이와 같은 사실은 ‘광주이씨세보’에 광주의 아전인 이당이 태수의 딸과 혼인하는 설화가 전하는 데 고대 혼인설화에 등장하는 내용과 흡사하다. 이당은 당시 광주의 권세가인 인화이씨(仁華李氏)와 혼인해 신분 상승을 이루고 이후 과거를 통해 중앙정계까지 진출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당은 인화이씨를 부인으로 맞아 봉(逢), 집(集), 희령(希齡), 자령(自齡), 성(省) 등 5형제를 두었는데 모두 문과에 급제하면서 고려 말 조선 초 명문가로서의 기틀을 다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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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둔춘 이집선생의 묘
둔촌 이집(李集)


이당의 차남 이집(李集·1327~1387)은 1355년(공민왕 4)에 문과에 급제한 뒤 공민왕 때 봉순대부 판전교시사에 올랐다. 1368년(공민왕 17) 신돈(辛旽)을 논박했다가 화가 미치자 이를 피해 아버지를 업고 새재를 넘어 영천(永川)에 살고 있는 동년(同年 : 같은 해에 과거에 함께 합격한 사람) 최원도(崔元道)의 집에 피신했다가 공민왕 20년에 신돈이 실각하자 돌아왔다. 3년 동안의 은둔생활은 그의 생애에 큰 분수령이 돼, 이름과 자호(字號)를 모두 개명하고 이후 여주의 천녕현(川寧縣 : 현재의 흥천면)에 물러가 은거하면서 다시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둔촌 이집의 본명은 원령(元齡), 자는 성노(成老), 호는 묵암자(默巖子)였으나 이때 ‘맹자집의(孟子集義)’의 집(集) 자를 취해 이름으로 했고, ‘호연지기’의 호연(浩然)을 취해 자(字)로, 둔촌(遁村)을 호로 삼았다.

이집은 사람됨이 의롭고, 말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으며, 행실은 방정해 당시 학자들이 크게 존경했다. 안축(安軸)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했고, 목은 이색(李穡), 포은 정몽주(鄭夢周), 척약재 김구용(金九容), 도은 이숭인(李崇仁), 삼봉 정도전(鄭道傳)과는 막역한 사이로 서로 허물없이 왕래하면서 교유한 것으로 보아 그의 사상과 학문은 당시 상당히 영향력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현재 서울시 강동구 둔촌동이 그의 호에서 따온 지명인 것으로 볼 때 둔촌 이집이 역사적 인물로서의 중요성을 알게 해 준다.

둔촌 이집의 관료생활은 크게 현달하지 못했으나, 현실 정세, 농민의 곤궁한 생활에 대한 연민, 왜구의 침략으로 노략질 당하는 민생의 어려움과 나라에 대한 걱정 등이 단편적으로 나마 기록으로 보이고 있어 위민정치(爲民政治)를 기본으로 하는 성리학자의 자세를 살필 수 있다. 반면에 그와 관련된 기록들은 대체로 교유하던 학자들과 나눈 시문들이며, 그 내용도 주로 과거에 함께 즐기던 교우들에 대한 그리움과 현재 자신의 외롭고 쇠락한 처지에 대해 한탄하는 모습 등 은자(隱者)의 모습이 많이 보이고 있어 곧이어 발생하는 고려 멸망에 대한 절의를 지키려는 많은 학자들에게 영향을 준 것으로 생각된다.

팔극조정(八克朝廷)

둔촌 이집의 은자적 성향과는 달리 후손들은 조선조 초중기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게 되는데, 둔촌의 아들 3형제 지직(之直), 지강(之剛), 지유(之柔)는 고려 말에 모두 문과에 급제, 조선왕조 개창에 참여했고, 이어 세조의 집권을 도와 다수의 공신을 배출하며 조선 전기 최고의 가문이 된다. 조선의 양반사회는 과거에 합격해 사로(仕路)에 진출하는 것이 개인이나, 문중 모두 최고의 가치로 여겼기 때문에 이집의 아들 3형제와 큰 아들 이지직의 아들 3형제, 8명의 손자가 연이어 문과에 급제하는 경사는 광주이씨 가문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됐으며, 이렇듯 후손들이 크게 현창하게 된 것은 경북 영천에 위치한 시조 이당의 묘소로 까지 이어져 그의 묘소는 조선 8대 명당지로 지금까지도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다. 특히 이지직의 차남인 인손(仁孫, 忠僖公)이 우의정을 역임한 것을 필두로 그의 큰아들 극배(克培)는 성종 때 영의정에, 차자 극감(克堪)은 형조판서, 3자 극증(克增)이 병조판서, 4자 극돈(克墩)이 좌찬성, 5자 극균(克均)이 우의정을 각각 역임하는 등 세조 이후 성종과 연산군 치세 동안 이들 5형제가 정국을 좌지우지할 정도였다. 또한 이 무렵 조정의 어전회의에는 광주이씨 가문의 극(克)자 항렬 8명이 영의정에서부터 내리 참석하고 있다고 해서 생긴 말이 팔극조정(八克朝廷 : 극규-병조참의, 극배-영의정, 극감-형조판서, 극증-병조판서, 극균-우의정, 극기-공조판서, 극견-좌통례)이란 말이 회자되기도 했다 한다.

조선 초 최고의 문벌가문

향리 출신이던 광주이씨는 광주를 배경으로 경제적 부를 축적함으로써 신분상승의 기회를 갖게 됐으며, 고려 말 조선 초의 혼란기를 선도하는 문중으로 성장했다. 이들은 신진사대부로서 학자적 관료로서의 자질과 탈귀족적인 관료주위와 위민정책, 그리고 주자학적인 왕도사상을 강조해 조선왕조를 개창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광주이씨는 조선조에서 문과급제자 196명, 무과 급제자 245명, 정승 5명, 문형(文衡 : 대제학) 2명, 청백리 5명, 공신 11명을 배출했다. 조선 초 문신 성현(成俔)은 광주이씨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당금문벌지성 광주이씨위최(當今門閥之盛 廣州李氏爲最·지금 문벌이 성하기로는 광주이씨가 최고이다)’라 했으니 조선 초 광주이씨의 위세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장덕호 경기문화재단 뮤지엄본부 경영협력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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