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망상증 민원인 '억지 신고' 갈수록 늘어…안 받아 주면 '버럭'
"방치하면 황산테러 재발…사회적 구조시스템 구축 서둘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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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러당한 관악경찰서 사이버범죄수사팀 <사진=연합>
#1 "화성에서 도망쳐 왔는데 암살자가 쫓아왔다. 은신해 살고 있지만 머지않아 발각될 것 같다. 경찰이 서둘러 조치해달라"

SF영화 속에서나 등장할 법한 대사를 며칠 전 경찰서 민원실 상담 창구에서 들은 A 경위는 일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단정하게 옷을 차려입은 50대 초반의 남성은 겉보기에 멀쩡했다.
 
답답한 일이 있어 경찰에 도움의 청하러 왔다고 점잖게 말해 자리를 권할 때까지만 해도 A 경위는 이 남성이 '중증'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본론으로 들어서는 순간 곧 그가 '보통사람'이 아님을 간파했다.

사뭇 진지하게 '화성' 얘기를 꺼내는 남성은 대화를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일이 밀려 있던 터라 마냥 들어줄 수 없었던 A 경위가 그를 돌려세운 답변은 사뭇 4차원적이었다. "화성에서 산 적이 없어 그쪽 내막을 잘 모르겠으니 우선 화성에서 오신 분들하고 상의해보라"고 권한 것이다.

A 경위는 그를 돌려보내고도 자신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 같아 맘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딱히 도와줄 방법도 떠오르지 않았다.

#2. 청주의 또다른 경찰서 민원실 직원들 사이에는 경계 대상 민원인이 있다.

주인공은 이 마을 터줏대감인 60대 후반의 B씨다.

그는 지난해 2차례 분통을 터뜨리며 민원실을 찾아와 고소할 사람이 있다고 했다. 자신의 아파트 위층과 아래층에 사는 입주자들이 쉴 새 없이 전자파를 쏴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고 호소했다.

경찰이 "전자파로 살상을 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고소장을 접수할 수 없다고 정중히 거절하자 B씨는 "경찰이 이런 것도 해결해주지 못 하느냐"고 화를 버럭 냈다. 상급기관에 알려 처벌받게 하겠다며 분을 삭이지 못하고 돌아서는 그를 경찰은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3 작년 12월 이 경찰서 민원실에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미모의 여성 C씨가 찾아왔다.

B씨는 자신이 스토킹을 당하고 있다고 걱정했다. 스토커는 심지어 자신이 집을 비운 사이 폐쇄회로(CC)TV를 설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고 했다.

심상치 않은 성범죄라고 판단, 잔뜩 긴장한 상담 경찰은 이어진 그녀의 설명에 맥이 풀썩 빠졌다. 문제의 CCTV가 수도꼭지 안에 설치돼 있어 일반인들의 눈에는 안 띈다고 했다. 투시 광선으로 작동되는 특수 CCTV라는 것이었다.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C씨의 집을 방문해 확인해 봤지만 역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냥 돌아서는 경찰에게 C씨는 구해달라며 애원하듯 매달렸다.

한 경찰은 "말도 안 되는 내용으로 경찰서 민원실을 찾아 해결을 요구하거나 고소하겠다는 민원인들이 과거보다 훨씬 많아졌다"며 "한 달에 1∼2명가량 황당한 내용을 신고하거나 고소하겠다고 찾아온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받아주지 않으면 버럭 화를 내거나 막무가내로 항의한다"며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 보이는데 선뜻 나서서 도와줄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전형적인 피해망상증 사례들이라고 진단했다.

피해망상이란 자신이 누군가로부터 신체나 정신적으로 피해를 봤다고 믿어버리는 정신질환의 하나다.

정신과 전문의인 김시경 충북도 광역정신건강증진센터 센터장은 "피해망상증 환자는 현실감각이 없는 상태에서 스스로 온전히 외부의 원인으로부터 피해를 봤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타인이 이를 받아들여 주지 않으면 극도의 공격성향을 나타내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자칫 '걸어 다니는 흉기'가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지난 4일 서울 관악경찰서에서 30대 여성이 억울함을 호소해도 받아주지 않는다며 경찰관에게 황산을 뿌려 상처를 입힌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다.

경찰은 과거 친절하게 상담했던 경찰관이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고 전화를 받지 않자 범행을 저지른 이 여성을 피해망상증 환자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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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연수원이 지난해 발간한 '범죄백서 2014'와 대검찰청의 '2014 범죄분석'을 보면 정신질환 범죄자는 점차 늘어나는 추세다. 2010년 5천391명, 2011년 5천379명, 2012년 5천428명, 2013년 6천1명으로 꾸준히 증가했다.

전문가들은 심각한 취업난과 치열한 경쟁에 시달리는 복잡한 사회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누적되기 때문으로 진단했다.

개인의 일로 치부하고 피해망상증 환자에 대해 제때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방치한다면 황산 테러처럼 언제든 '묻지 마 강력범죄'가 발생할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사회주의 국가이지만 개혁 개방 이후 자본주의 국가보다 빈부의 차가 더 커진 중국에서 '묻지 마 살인'이 빈발하는 것을 타산지석으로 삼야야 한다는 얘기도 나온다.

황순택 충북대 교수는 "사회가 복잡해지고 경쟁이 치열해진 현대 사회에서는 누구나가 정신적 피해자가 될 수 있다"며 "정신질환의 문제를 개인의 영역으로 치부하기보다는 사회적 문제로 심각하게 인식하고, 문제 해결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정신질환 문제를 심각한 사회문제로 받아들여 적절한 치료와 예방을 하는 국가 차원의 촘촘한 시스템이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곽금주 서울대학교 교수 역시 "현대인의 정신 건강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사회공동체가 부담해야 할 피해가 더욱 커질 수 있다"며 "국가 차원의 시스템을 작동해야 할 때"라고 조언했다.

정부는 최근 국민들의 정신건강을 관리할 범부처 차원의 종합대책을 마련해 정신건강 문제를 발견하고 치료까지 걸리는 기간을 2011년 기준 84주에서 50주로 단축하고, 중증 정신질환자의 사회복귀시설 정원을 지금보다 10% 늘릴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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