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경기천년, 경기 역사 문화의 전개] (9) 포은 정몽주의 넋이 깃든 곳 ‘선죽교와 숭양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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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은과 개성의 상징인 선죽교

선죽교는 개성을 상징하는 역사적 유물이다. 북쪽에서는 선죽교를 국보유적 159호로 지정하고, 선죽교와 그 주변을 보존하고 있다. 선죽교가 유명한 것은 포은선생이 격살당하며 흘린 피가 돌에 스며들어 지금까지 남아 있다는 이야기 때문일 것이다. 신기하게 지금까지도 선죽교 상판에는 붉은 색이 남아 있다. 그것이 정말 포은의 핏자국일까? 불가사의한 일이다.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은 ‘선죽교기(善竹橋記)’에서 핏자국을 의심하는 자들을 책망하며 중국의 사적을 예로 들어 열거하고 “송경(松京)에 가서 이 다리에 올랐으되 감히 밟지 못하고 돌의 핏자국을 어루만지고는 혀로 핥고 싶었다”고 했다.

포은의 절의(節義)는 선죽교의 붉은 핏자국과 함께 참대로도 표현됐다. 그가 조영규 일당에게 격살되던 날, 그 때 흘린 선혈이 돌다리 아래로 흘러내려 개울에서 참대가 솟아났다고 한다. 말할 것도 없이 대나무는 충절의 상징이다. 이런 연유로 본래 ‘선지교(選地橋)’였던 이름이 ‘선죽교(善竹橋)’로 바뀐 것이다.

선죽교는 화강석으로 축조된 전형적인 널다리이다. 개울바닥에 기초석을 깔고 그 위에 길쭉한 기둥들을 쌓아올린 다음 큰 화강석 판돌을 깐 단순한 것이지만 구조가 튼튼해 지금도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난간을 둘러 세운 다리와 난간 없는 다리가 나란히 있는데, 난간을 세운 것이 선죽교이다. 전체규모는 길이 8m남짓, 너비 3m조금 넘는다.

선죽교는 본래 일반적인 옛다리와 마찬가지로 난간을 설치하지 않았었다. 지금 난간주의 석조물은 1780년(정조4) 9월에 포은의 후손인 정호인(鄭好仁)이 개성부 유수로 재임 시 축조한 것이다. 정호인은 포은의 혈흔(血痕)이 짓밟히는 것을 염려해 돌난간을 설치했으며 대신 별도로 옆에 돌다리를 세워 통행하게 했다.

또한 석축(石築) 하단부에 ‘丙辰’ ‘築欄’ ‘戊午改築’ ‘丙申改欄’이라는 명문(銘文)이 있어 이후 개축됐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병진년(1796·정조20)에 난간을 세웠으며, 무오년(1798·정조22)에 개축하고, 다시 병신년(1836·헌종2)에 난간을 고쳐 세웠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의 선죽교 모습은 180년 전에 개축된 것인 셈이다.

선죽교 주변에는 여러 기의 석비가 있다. 동쪽에 하마비(下馬碑)·기적비(記蹟碑)·선죽교(善竹橋) 표석이 나란히 서 있으며, 표석 옆에는 성인비각(成仁碑閣)이 있다. 비각 앞에는 포은선생과 함께 순절한 녹사(錄事) 김경조(金慶祚)의 기실비(紀實碑)와 순의비(殉義碑)가 직각 방향으로 서 있다. 선죽교 공원 경내에는 이밖에도 성여완유허비각(成汝完遺墟碑閣)이 있다. 선죽교 서편에는 영조와 고종의 어제어필선죽교시비(御製御筆善竹橋詩碑)를 보관한 표충비각(表忠碑閣)이 있다.

개성 선죽교 주변의 지명 가운데, ‘문치당골[文忠堂골]’ ‘오천(烏川)’ 등 경북 포항시 오천읍(烏川邑)의 지명과 같은 지명이 있어 주목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개성부 기록에 하천 물이 검다고 해서 붙여진 ‘검으내’라는 지명이 흑천(黑川)으로 표기되고, 이것이 다시 오천(烏川)으로 표기된 것이다. 똑같이 ‘검다’는 뜻이기에 기록자의 다른 표기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굳이 ‘오천(烏川)’으로 기록한 이유가 뭘까 궁금하다. 포은의 고향이 영일현(迎日縣) 오천(烏川)이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포은선생이 흑천을 오천으로 명명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선죽교 밑에는 물이 흐르고 있다. 고려시기 개경내부의 중심 물줄기는 배천이었지만 지금 개성 시내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큰 물줄기는 바로 선죽교 동쪽의 물줄기이고, 이것이 오천으로 연결된다. 이곳 선죽동에서 살았다는 어느 노인(87)의 증언에 의하면, 일제 말에는 선죽교 아래에 물이 흐르지 않았다고 한다. 일제 때 동쪽에 새 물길을 내면서 선죽교 쪽 물길이 폐쇄됐다가 최근에 선죽교의 면모를 살리기 위해서 인공적으로 물길을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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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은선생의 옛 집터에 세워진 숭양서원

숭양서원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서원으로, 현재 개성에 남아있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기도 하다. 북쪽에서는 국보128호로 지정해 보존하고 있다. 숭양서원은 개성시 자남산 남동쪽 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바로 포은의 옛 집터이다. 그곳에서 조금 동쪽으로 가면 선죽교가 있다. 숭양서원은 화려하게 장식하지 않았지만, 자연지형을 합리적으로 이용해 크고 작은 건물들을 적절히 배치하고 조화시켰다는 점에서 건축학적인 측면에서도 높이 평가된다.

포은은 조선 개국에 반대하다가 죽임을 당하고 역적으로 평가됐지만, 태종 즉위 직후부터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새 왕조의 안정을 위해 왕권 강화와 이를 뒷받침할 신료들의 충절을 필요로 하는 시점에서 포은에 대한 평가가 ‘반역’에서 ‘충절’로 바뀐 것이다. 태종은 포은에게 관직을 추증하고,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이라는 작호와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세종 때는 ‘삼강행실도’에 충신으로 수록됐다. 중종 때는 문묘에 종사되어 동방성리학의 조종(祖宗)으로 추숭됐다. 1573년(선조6년)에는 개성유수 남응운(南應雲)이 유림들과 협의해 포은의 옛집터에 문충당(文忠堂)을 세웠다. 2년 뒤인 1575년에 ‘숭양(崧陽)’의 사액이 내려져 사액서원으로 승격됐다. 송악산을 숭산(崧山)이라고도 했으니 숭양서원은 송악산 남쪽에 있는 서원이라는 뜻이다. 1668년(현종 9년) 이후 김육·조익·우현보·김상헌 등을 추가로 배향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서 제외된 47서원의 하나로 남아 선현을 봉사하고 지방교육을 담당했다. 임진왜란 이전에 건축된 서원의 전형적인 배치 형식과 구조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유적이다.

경내에는 사당·강당·동재·서재·내삼문·외삼문이 있다. 묘정에는 서원사적비가 있다. 숭양서원 입구 동쪽 언덕의 바위에는 서성(徐賂)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송덕비가 있다.

숭양서원의 외삼문 앞 좌우에는 3면에 동물 모양을 새긴 2개의 돌계단이 있다. 북쪽 안내원의 말에 의하면 말을 타고 내릴 때 이용했다는 마상석(馬上石)과 마하석(馬下石)이다. 서원입구에 보통 하마비를 세워 진입을 금지하고 있은데, 숭양서원 외삼문 바로 앞에 이같은 석조물이 있다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이 석조물은 숭양서원 건립 이전부터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안내원이 말한 대로 포은선생이 출퇴근 할 때 이용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돌계단은 포은선생 고택의 유일한 증빙 자료가 되는 것이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동재와 서재가 좌우 양쪽에 있다. 동재와 서재는 각각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지었다. 동재와 서재는 사당 ·강당과 마찬가지로 두공이 없는 형식의 맞배집으로 규모가 큰 건물이다. 정면으로는 강당이 있다. 강당은 홑처마의 합각지붕이며, 정면 5칸(12.79m), 측면 3칸(6.96m)이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그래도 고졸한 맛이 있다. 강당 뒤에 사당이 있는데, 사당으로 오르는 계단이 매우 가파르다.

사당 계단에 오르면 좌측에 방처럼 보이는 공간이 있는데, 바로 포은의 영정을 모신 영당(影堂)이다. 북측 자료에 의하면, 이곳에서 모시던 본래의 포은선생영정은 개성박물관으로 이관했으며 지금 봉안한 것은 모사본(模寫本)이라 한다.

숭양서원은 서원의 전형적인 구조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에 따라 앞쪽에 교육시설, 뒤쪽에 제사지내는 건물을 배치했다. 안뜰에서 학생들의 숙소인 동재와 서재가 좌우에 있고 정면에 강당이 있다. 사당이나 강당에서 개성 시내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숭양서원 사당 앞마당 좌우에 2개의 비석이 있는데, 오른쪽의 것이 포은선생서원비(圃隱先生書院碑)이다. 이 비석은 1811년(순조11, 신미년) 7월에 세운 것이다. 비문은 남공철(南公撤)이 짓고, 한용구(韓用龜)가 글씨를 썼다. 전액(篆額)은 김재찬(金載瓚)이 썼다. 왼쪽 것이 숭양서원기실비(崧陽書院紀實碑)이다. 서원철폐령으로 자칫 훼철될 위기에 있다가 대원군의 배려로 존치된 경위를 기록했다. 비문은 이동욱(李東旭)이 지었다. 1932년에 전황(全晃)이 건립했다.

개성의 유적 자료집이나‘한국브리태니커사전’에 의하면, 숭양서원에 포은의 영정·죽장·필적·옷 등이 보관돼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가 숭양서원을 방문했을 때는 포은의 유물을 관찰할 수 없었다. 북쪽 안내원에 의하면 숭양서원에 있던 유물은 고려박물관에 이관됐다고 하는데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홍순석 강남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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