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경기천년, 경기 역사 문화의 전개] (10) '세계 속의 고려인' 익재 이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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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의 화두 가운데 하나가 ‘글로벌(세계적인)’이 됐다. 자신의 편협한 지역적인 카테고리에서 벗어나 세계로 나아가자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의식에도 ‘한민족’이라는 개념과 함께 ‘세계 속의 한국인’이라는 생각도 같이 하고 있다.

우리 역사에서 ‘글로벌 코리언’은 언제부터 나타나며, 그 수는 얼마나 될까? 우리 역사에서 ‘글로벌 코리언’의 존재는 적지 않게 나타난다. 신라의 김춘추는 고구려와 당에 다녀오기도 했고, 백제의 왕인은 일본에 한자와 학문을 전래했다. 그리고 장보고와 같이 신라와 중국과 일본을 아우르는 광역의 해양의 황제로서 군림한 인물도 있다.

시기가 내려와 고려시대에도 ‘글로벌 코리언’은 적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특히 원간섭기에는 원이라는 국가의 개방성으로 인해 ‘글로벌’ 사회가 전개됐으므로, 그 영향을 받았던 고려에서는 ‘세계 속의 고려인’들이 나타났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의 하나가 이제현이다.



이제현(李齊賢)은 누구인가?

이제현의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지공(之公),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역옹(?翁)이다. 익재의 가계는 삼한공신(三韓功臣) 금서(金書)로부터 출발하며 아버지는 진(?)이 과거를 통해 검교시중(檢校侍中)에 까지 출세하면서 가문의 명성이 커졌다.

1287년(충렬왕 14)에 출생한 익재는 15세(충렬왕 27)에 성균시(成均試)에 1등으로 합격하고 대학자이자 권세가였던 권보(權溥)의 딸을 아내로 맞는다. 그가 본격적인 관리 생활을 하게 된 것은 1309년에 사헌규정(司憲糾正)에 발탁되면서부터, 마지막 벼슬은 문하시중에 이르렀다. 그리고 1367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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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현 초상화
그러한 익재가 ‘글로벌 코리언’이 된 계기는 1314년(충숙왕 1) 충선왕이 충숙왕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원나라의 수도 연경(燕京)에 만권당(萬卷堂)을 설립하고 이곳에서 많은 고려와 원의 학자들과 교유를 시작하면서부터다. 이때 만권당을 자주 출입했던 원의 학자·문인들은 요수(姚燧)·염복(閻復)·원명선(元明善)·조맹부(趙孟?) 등 당시 최고의 원나라 학자들이었다. 충선왕은 이들을 대할만한 고려의 인물로 익재를 지목했다. 익재와 충선왕의 만남은 1313년, 26세의 익재를 충선왕이 개경의 팔관회에서 처음 본 다음이었다.

익재는 연경의 만권당에서 학문은 물론 원의 문화를 접할 수 기회를 갖게 됐다. 또한 익재의 원 생활은 그에게 중국 대륙을 여행할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도 흥미롭다. 원은 다시 말하면 익재의 만권당행은 그를 ‘글로벌 코리언’으로 만드는 계기가 됐던 것이다.

그러나 익재(益齋)가 살았던 시기는 그 자신에게나 우리 역사상 그다지 유쾌한 시기는 아니었다. 유사 이래 강력한 세력을 구사했던 몽골족에 의해 고려가 심한 간섭을 받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떻든 우리가 익재를 글로벌 문화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그의 여행을 통한 넓은 견문에 있다. 또한 그는 단순히 여행을 여행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답사한 지역에 대한 느낌이나 현장을 여러 형태의 문학 작품으로 표현해 두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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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걸대언해=중국어 학습서인 노걸대를 한글로 풀이한 책. 고려 말 고려 상인과 중국 상인의 대화가 실려있어 육로를 통한 고려의 국제교역 모습을 엿볼 수 있다.(왼쪽) 티베트문 법지= 수선사의원감 국사가 원의 불교계에서 받은 티베트 문자로 작성된 문서이다.통행증이나 특혜 문서로 추정되며,고려와 원의 불교 교류를 보여준다.(오른쪽)

아미산여행

익재가 연경(베이징)에 처음 발을 디딘 것은 1314년 충숙왕 원년 정월로 이때 그의 나이 29세였다. 그리고 1316년(충숙왕 3) 4월에 익재는 서촉(西蜀)에 사신으로 갔다. 이 여행은 원래 충선왕이 명산인 아미산에서 제사를 올리기로 했으나, 갈 수 없게 되자 익재가 대신해 3개월 동안 가게 된 것이었다. 익재는 사천성 성도에서 배를 타고 7일을 더 가게 되는 긴 여정의 왕복 5천100km에 이르는 여행을 했던 것이다. 이제현은 당시의 발달된 원의 역참과 수참을 이용하면서 먼 거리의 여행을 마칠 수 있었다. 익재는 이러한 여정을 시로 기록해 둬 후세의 문화를 폭 넓게 했다. 이때 익재는 여행을 하면서 아미산과 관련된 시도 남겼다. 다음의 시는 ‘아미산에 올라서(登峨眉山)’이다.



파란 구름 지면에 떴고

흰 해는 산 허리 감싸네

온갖 물상 끝없는 데 사라져

유장한 허공 절로 조용하다



절강여행

1319년 3월부터 익재는 충선왕을 보필하며 몇 달간을 권한공 등과 함께 절강 방면 여행을 했다. 익재는 이 지역을 여행하면서도 기록을 남겼는데 그것이 행록(行錄) 1권이다. 익재는 절강 지방과 함께 보타산을 유람했던 기록도 수록하고 있다. 이 여행은 충선왕이 절강(浙江)의 보타사(寶陀寺)에서의 강향(降香)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당시 지극히 익재를 총애했던 충선왕은 원의 유명한 화가에게 익재의 초상을 그리게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익재는 당시에는 이를 보지 못했다가 30여년이 지난 후 에 연경을 방문했는데, 그 때 그 초상화를 보았다고 하는 일화가 있다.



토번여행

1323년 연경에 있던 충선왕이 참소를 받아 토번(吐藩, 티베트)으로 유배를 당했다. 평소 충선왕을 좋지 않게 보고 있었던 고려 출신 환관인 임백안독고사가 원의 영종을 움직여 충선왕을 제거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해 충선왕은 원의 내분으로 영종이 살해 당하고 태정제가 즉위한 1323년 9월까지 약 3년간 유배를 당했다. 이제현은 최성지와 함께 충선왕의 무고함과 귀국을 호소했고 충선왕을 알현하기 위해 험한 길을 건너 유배지를 찾아갔다. 당시 이제현은 황토점이라는 곳에 이르러 시로서 자신의 울분을 표현했다. 그 가운데 일부분이다.



아! 서글프다 서재도 비어 수심으로 앉아 있어

임금님의 참소에 어느 곳이 늙어 쉴 땅인가

십년의 어려움은 천리의 물고기 길

오랜 세월 뜨고 잠김 한 언덕의 담비일세

서쪽으로 날리는 햇살에 넋은 끊어지고

동으로 흐르는 푸른 강에 눈물이 먼저 흐르네

궁궐 가득한 신하 지혜로운 이 없으니

은덕에 배불린 나로서도 부끄러움에 죽어야 하네



익재는 충선왕을 만나기 위해 토번을 다녀왔다. 그리고 익재는 충선왕의 구명 활동을 벌였다. 충선왕은 그 뒤 유배지가 연경에서 보다 가까운 타사마로 옮길 수 있게 됐다. 충선왕의 유배지가 바뀐 것에 대해 익재의 영향이 있었는지의 여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의 충선왕에 대한 충성심은 알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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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고려 문화인, 이제현

그 뒤의 익재의 정치적 활동과 학문적 업적에 대해 여기서 소개하는 것은 무리다. 단지 익재의 글로벌한 활동가로서의 면모만을 살피면 충혜왕과의 관련을 살펴 볼 수 있다. 익재는 원과 충혜왕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아 충혜왕이 연경으로 압송되자 원에 들어가 억울함을 호소해 원이 충혜왕을 석방하도록 했다. 이러한 익재의 행적은 개경과 연경을 8차례 가량을 왕복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익재는 글로벌이었지만 고려인으로서의 정체성도 분명했다. 그는 당시 일부에서 주장하던 고려를 원의 하나의 성(省)으로 만들자는 입성책동(立省策動)에 대해 완강하게 반대했다. 그야말로 고려인의 정체성을 분명히 했다. 익재 이제현은 분명한 ‘코리언’이었던 것이다. 그가 살았던 시대가 원이라고 하는 세계사에서 가장 강대한 권력을 소지했던 제국 아래서였지만, 익재는 고려인이라는 정체성을 확립했던 ‘글로벌 고려 문화인’이었다.

*시의 번역문은 익재집(이종찬역주, 고대민족문화연구소, 1993)에서 전재

이재범 경기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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