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경기천년, 경기 역사 문화의 전개] (11) 고려후기 경기문화의 동향과 변화-공민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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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제31대 왕인 공민왕(재위 1351년∼1374년 재위)은 1341년 원나라에 가서 숙위(宿衛)했으며 1344년(충목왕 즉위년)에는 강릉부원대군(江陵府院大君)으로 봉해졌다. 1349년에는 원나라의 공주인 노국대장공주를 왕비로 맞이했고 1351년에 왕위에 올랐다.

공민왕은 즉위 후 대외적으로는 적극적인 배원정책(排元政策), 대내적으로는 친원권문세족(親元權門勢族)을 제거하고 국가기강을 재정립하기 위해 관제개혁을 실시했다. 뿐만 아니라 원나라의 정동행중서성이문소(征東行中書省理問所)를 폐지하고 원나라의 황실과 인척관계를 맺고 권세를 부리던 기철일파(奇轍一派)를 숙청했다. 더불어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폐지해 원나라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회복하는 등 고려의 국권회복을 위해 전력을 질주했던 왕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림과 글씨에 뛰어나 왕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가 현전하고 있다. 이처럼 국사와 예술에 능통했던 공민왕은 1365년 노국대장공주가 죽자 실의에 빠져 국사를 모두 신돈(辛旽)에게 맡기고 불사(佛事)에만 전념하다가 1374년 9월 홍륜(洪倫)과 환관 최만생(崔萬生) 일당에게 피살당한 비운의 왕이었다.

공민왕릉은 개성시 개풍군 해선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현릉(공민왕)과 정릉(노국대장공주)으로 구성된 쌍분이다. 왕릉은 봉명산으로부터 남쪽으로 뻗어내려온 무선봉의 중턱에 조성돼 있는데, 전체 3단으로 대지를 구축한 후 가장 상단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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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민왕릉 후면의 석물배치
규모와 배치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무덤은 전체 3단으로 구축된 구역 중 가장 상단에 위치하고 있다. 무덤의 주변은 장대석을 사용해 석축을 쌓았는데, 이로 인해 능선의 경사면에 구축된 무덤이 산사사태로부터 원형을 보존 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했다. 이같은 양상은 고려시대에 건립된 고달사지 석조부도(국보 제4호)에서도 볼 수 있어 고려시대에 이룩된 산지(山地) 시설물에 대한 보호대책임을 알 수 있다. 무덤의 크기는 높이 2.4m, 지름 7.6m의 규모인데 봉분의 둘레에는 장방형의 석재를 다듬어 호석을 돌렸다. 호석은 하대·중대·상대석의 세 부분으로 구성됐다. 하대석에는 복연 복판의 연화문을 촘촘히 조식했고 중대석에는 만개한 운문 사이에 각각 1구씩의 12지신상을 양각했다. 각 면의 호석에는 볼륨이 강한 구름문양이 좌우에 전개되고, 그 중심에 문관복장을 한 십이지신상을 배치했다. 이 상은 구름문양을 배경으로 조식한 구름 사이에서 출현하는 듯한 착각을 주기에 충분하다. 상대석에는 하대석에서와 같은 복엽복판의 앙연이 배치돼 있다. 봉분의 둘레에는 판석을 깔아 조성한 답도가 형성돼 있어 자연스럽게 봉분을 일주하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답도의 외곽에는 난간석이 조성돼 있는데, 일정한 간격으로 동자기둥을 세우고 그 중간에는 하엽석을 배치했다. 그 사이에는 2매의 석재로 된 돌란대를 놓았는데, 놓인 위치는 석재의 이음부 하단이다. 동자기둥은 일석으로 조성했고 상단에는 앙연과 복연을 조식했다.

더불어 돌란대 역시 상하단에 연화문이 조식된 원통형의 형태이다. 이처럼 12각을 이룬 호석과 난간석 외곽에는 石虎(돌 호랑이) 4구, 돌 양 2구가 배치돼 있고, 바깥쪽 앞뒤 모퉁이에도 石虎 1구, 두 무덤 사이의 앞뒤에도 돌 양 1구씩이 자리해 있다. 석호는 무덤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석양은 사악한 것들의 침입을 막는다는 의미를 지닌 석물이다. 이처럼 봉분의 외곽에 석호와 석양이 배치되는 것은 공민왕릉에서 시작된 것으로, 이후 조선시대 왕릉의 규범으로 자리 잡혔다. 더불어 힘 있게 내딛은 앞발과 웅크린 뒷발이 조화를 이루며 이빨이 가지런히 표현된 석호와 길게 늘어진 귀가 특징인 석양에서 고려 후기 조각의 기풍을 엿볼 수 있다. 무덤의 전면에는 석상(石床)이 있으며, 양쪽 끝에 망주석(望柱石)이 배치돼 있다. 석상은 일반적인 형태인 장방형으로 하면에는 사자머리형의 문고리가 달린 4개의 고석이 받치고 있다. 망주석은 복연과 앙연이 새겨진 팔각형의 기단 상면에 같은 형식의 석주를 놓고 상면에는 여의두문과 연주문 그리고 앙연이 순차적으로 새겨진 받침 상면에 보주를 둔 형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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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조 호랑이와 양
중단에는 상단부로 진입할 수 있는 계단을 두 곳에 배치했고 외곽에는 문인석(文人石) 두 쌍이 배치되고 중앙에는 각각 1기씩의 장명등이 조성돼 있다. 문인석은 각각 2구씩 모두 4구가 마주보고 있는 형상인데, 관복을 입고 양 속에는 홀을 든 형상을 지니고 있다. 신체 각부의 비례가 조화롭고 양 손으부터 길게 늘어진 옷주름이 유려하다. 더불어 각 봉분의 전면에 배치된 장명등은 공민왕릉에서 가장 주목되는 조형물이다.

장명등은 무덤 앞에 놓이는 등을 의미하는데, 한국의 능묘에서는 처음으로 조성되고 있다. 방형의 형태를 지니고 있는데, 기단부와 불을 밝히는 화사부로 구성돼 있다. 기단부는 하대석·중대석·상대석의 세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하대석의 상면에는 각 면 3구씩 모서리에 각 1구씩 모두 16엽의 연화문이 조식돼 있고 상면에는 각형 1단의 중대석 받침이 조성돼 있다. 중대석은 각 면에 3엽의 화문으로 전체를 조식한 후 내부에는 중앙에 배치된 3개의 소형 화문으로부터 밀집파상문 형태의 꽃술이 표현돼 있다. 상대석의 하면에는 각 면 3구씩, 모서리에 각 1구씩 모두 16엽의 연화문을 새기고 있다. 화사석은 장방형의 형태로 전면과 뒷면에만 장방형의 화창을 개설했다. 옥개석은 사모지붕의 형태로 추녀는 전각에 이르러 반전을 이루고 있으며 낙수면의 합각부에는 두툼하게 내림마루를 구현하고 있다. 3단에는 무인석 두쌍이 윗단의 문인석과 같은 선상에서 마주보고 있는데, 2단으로 오르는 계단이 3개소에 설치돼 있다. 갑옷을 착용한 무인상은 모두 장방형의 대좌위에 직립한 상으로 양 손을 가슴에 모은 것과 두 손을 가지런히 배 근처에 모으고 칼끝이 지면을 향한 칼을 잡고 있는 모습을 지니고 있다. 갑옷의 각부는 굵직한 선으로 묘사돼 있는데, 입체감은 물론 섬세함에서 고려 말기 작풍을 구현하고 있다. 무인석의 뒤편에는 묘역으로 오르는 계단석이 각각 설치돼 있다.

무덤의 내부는 정교하게 다듬은 화강암 판석을 각 면에 1개씩 세웠고 상면에는 3매의 판석으로 천정을 구성한 석실분이다. 동·서·북면에는 각각 4구씩의 십이지신상이 그려져 있다. 즉, 북쪽 벽에는 술(戌)·해(亥)·자(子)·축(丑)의 신상이, 동쪽 벽에는 인(寅)·묘(卯)·진(辰)·사(巳)의 신상이, 서쪽 벽에는 오(午)·미(未)·신(申)·유(酉)의 신상이 표현돼 있다. 각 상은 대체로 70∼75㎝의 크기로 하단에는 구름을 표현하고 색체감이 뚜렷한 문관복을 입은 인물상이다. 양 손은 홀을 잡고 있고, 머리에는 쓴 관의 상면에 십이지를 상징하는 동물의 머리가 그려져 있다. 천장에는 북쪽에 북두칠성을, 남쪽에는 한 쌍의 3성(星)을 그렸는데, 붉은 색으로 표현된 별들은 같은 색상의 선으로 연결돼 있다. 북두칠성 동쪽 아래에는 붉은 색으로 된 큰 원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태양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왕릉 아래에는 정자각터가 남아 있고 동쪽에는 왕릉의 원찰이었던 광통보제선사(廣通普濟禪寺)의 사적을 담은 비가 현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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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관복장한 십이지신상 중 쥐와 소. 사진=서울대학교 출판부
전통적인 묘제의 전승과 창조


공민왕릉에서 전통적인 묘제가 전승된 것은 석실분과 내부에 그려진 벽화, 봉분에 설치된 호석, 무덤 전면에 설치된 문·무관석이다.

석실분은 돌방무덤으로 불리는 묘제로서 네 벽과 천정을 석재로 구성한 무덤이다. 이 유형의 무덤은 본래 고구려에서 시작된 것으로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고려에까지 계승된 양식이다. 따라서 무덤의 내부에 판석을 이용해 석실을 구성한 양식은 전통적인 묘제가 그대로 재현된 것으로 판단된다. 더불어 봉분의 외곽에 구축된 호석은 통일신라시대의 왕릉에서 시작된 형식으로, 대부분 십이지를 조각하고 있다. 따라서 공민왕릉의 봉분 외벽에 구축된 호석과 이에 구현된 십이지상의 표현은 앞 시대 왕릉의 무덤 양식을 그대로 재현한 것으로 판단된다. 뿐만 아니라 무덤 내부에 벽화를 그리는 방식은 고구려시대 벽화고분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더불어 내부에 그려진 십이지는 통일신라시대의 무덤에서 근원을 찾을 수 있다. 즉, 1986년에 발굴 조사된 경주 용강동고분에서는 7구의 청동제12지상이 출토된 바 있는데, 머리는 동물모습을 하고 몸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무덤 내부에 그려진 십이지상은 무덤을 수호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호석과 더불어 통일신라시대 무덤의 양식을 계승한 것으로 판단된다. 나아가 천정부에 그려진 북두칠성과 별자리의 그림 역시 고구려시대의 고분벽화에서 확인되는 있는 점으로 보아 같은 양상으로 이해된다. 무덤 앞에 배치된 문·무관석 역시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괘릉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는데, 이곳에서는 서역인의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에 반해 공민왕릉에서는 당시의 문관과 무관을 구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각각 2구씩 조성돼 있어 진전된 양상으로 이해된다. 이같은 면면을 보면 공민왕릉은 고구려와 통일신라시대의 묘제에서 구축된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것을 판단된다. 이처럼 전통적인 묘제의 양상을 계승한 반면 완전히 새로운 양식을 창출하고 있다. 이는 봉분 앞에 설치된 장면등과 주변에 배치된 석호와 석양이다.

봉분 앞에 건립된 장명등은 이제까지의 조성된 어느 무덤에서도 볼 수 없는 새로운 양상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장명등은 본래 사찰의 법당 앞에 건립된 석등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즉, 부처님의 진리의 불을 영원토록 발산한다는 의미로 건립되던 석등이 공민왕릉에 이르러 봉분 앞에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는 불교의 상징이던 등이 이제는 죽음의 세계를 항상 밝힌다는 의미로 변화된 것으로 이후 조선시대의 왕릉에서 모두 채용되고 있다. 더불어 봉분 주변에 배치된 석호와 석양은 이제까지의 묘제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양식으로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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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명등
조선시대 능묘제도의 완성


공민왕은 1365년(공민왕 14) 2월 노국대장공주가 죽자 그녀를 위한 묘역의 공사에 착수했다. 더불어 무덤 주위에 난간을 돌리고 석물을 배치하는 등 왕릉으로서의 면면을 갖추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공민왕이 피살당하자 그의 능침을 바로 옆에 조성해 왕릉으로서의 규모와 격식을 갖추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를 볼 때 공민왕은 노국대장공주의 죽음을 맞아 격식과 제도를 완비한 왕릉을 설계했고, 자신이 묻힐 묘역에 대한 공사 역시 기본적인 준비가 이뤄진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시대의 능침제도는 태조 왕건이 묻힌 현릉(顯陵)에서 정비된 양상을 보이지만, 이후 소멸됐다가 공민왕릉에 이르러 호석과 난간의 설치는 물론 조선시시대의 왕릉에 버금가는 격식을 갖추게 된다. 전체 3단으로 구성된 공민왕릉에는 가장 아랫단에 두쌍의 무인상을, 중단에는 두쌍의 문인상과 장명등을 배치하고, 상단에 난간과 호석은 물론 석제 양과 호랑이가 배치된 봉분을 조성했다. 이처럼 공민왕릉에서 완비된 능묘제도는 조선시대로 계승돼 한국 왕릉의 전형을 이루게 된다. 뿐만 아니라 무덤을 감싸고 있는 호석과 난간석, 이의 주변에 배치된 석호(石虎)석양, 장명등과 망주석을 비롯한 문무관석은 조선시대의 왕릉에 그대로 계승돼 한국 왕릉 석물 연구에 중요한 전기를 마련하고 있다.

박경식 단국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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