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경기천년, 경기 역사 문화의 전개] (12) 경기도를 대표하는 성씨들―죽산 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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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후기(8세기) 박씨네의 죽산 이주

현재 안성시의 죽산면으로 편재돼 있는 곳은 조선시대(19세기 말)까지만 하더라도 독립된 행정단위인 죽산현 또는 죽산군이 운영됐던 곳이다. 그곳의 역사를 간략하게 개관하면 고구려 혹은 백제 때에는 개차산군(皆次山郡)이었다. 신라 때 개산군(介山郡)으로 고쳤다가 고려 초에 죽주(竹州)로 바뀌었다. 지방관의 경우에는 고려 성종 14년(995년)에 단련사를 뒀다가 목종 8년(1005년)에 이를 폐지했고, 현종 9년(1018년)에 광주에 속하게 했다가 명종 2년(1172년)에 처음 감무를 뒀으며, 조선 태종 13년(1413년)에 죽산현으로 고쳐 현감을 파견했다.

16세기 전반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죽산에 9개의 토성(土姓)이 있었음을 전하고 있다. 이중에서 죽산 최씨가 으뜸인 반면, 죽산 박씨는 8번째로 기록돼 있다. 하지만 이보다 100여 년 전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에도 9개의 성씨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 순서는 죽산 박씨가 단연코 으뜸이다. 15세기에서 16세기로 이어지는 100년 사이에 죽산현의 토호 세력계층에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사실 14세기 전반만 하더라도 이곳은 충청도에 속해있었으나 세종 16년(1434년)에 경기에 편입됐다. 또 중종 38년(1543년)에 죽산부로 승격됐다가 현으로 강등됐고, 다시 부로 승격됐다가 군 또는 현으로 내려지는 과정이 반복됐다. 15~16세기 죽산에서 토호세력의 변화는 이런 행정구역의 변경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고려 중기에 죽산 박씨의 활동을 알 수 있는 금석문 자료로는 12세기 전·중기에 제작된 ‘박경인 묘지명’과 ‘박경산 묘지명’이 있다. 여기에서는 그들의 선조가 죽산으로 들어오게 된 배경을 기록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본래 신라시조인 혁거세의 후예로 계림인이었던 북경도위를 지낸 박적오(朴赤烏 또는 朴積古)가 개산군(죽산)으로 들어와 찰산후(察山侯)가 돼 죽산 박씨의 시작이 됐다고 한다. 아마도 박적오는 개산군 태수로 임명돼 이곳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개차산군이 개산군으로 바뀐 때는 신라 경덕왕 16년(757년)을 전후한 시기일 것이다. 즉 박적오는 죽산 박씨의 시조 정도의 위치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신라 혜공왕 2년(766년)에 죽주산성 아래의 매산리 미륵당 석탑을 조성하는데 적극 참여했다. 이후 그들은 이 지역의 토착세력으로 자리했다. 또 박적오의 아들로 알려진 박직윤(朴直胤, 또는 朴智胤)은 이곳에서 고구려의 장군 명칭 중에 하나였던 대모달(大毛達)로 불렸다. 그는 또 황해도 평주(평산)로 옮겨가 이후 평산 박씨의 시조가 됐다. 죽산 박씨와 평산 박씨는 그 선조가 같은 계통이었다.



후삼국시대 죽산 박씨 세력의 동향

9세기 후반 신라에서 이탈한 호족 중에서 대표적인 세력은 후백제와 고구려의 부흥을 앞세우며 활동했던 견훤과 궁예이다. 이들은 후백제와 후고려를 세우고 신라와 함께 후삼국을 이루었다. ‘삼국사기’에서는 개산군(죽주)에 도적의 우두머리라는 뜻의 ‘죽주적괴(竹州賊魁)’라고 불린 기훤(箕萱)이 활동하고 있었음을 전하고 있다. ‘도적의 우두머리’라는 호칭은 9세기 후반 개산군에서 불렸던 것이 아니다. 신라 정부의 입장에서, 또는 후에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고려 태조 왕건의 후삼국 통합 과정에서 궁예와 견훤 못지않은 유력 세력이 죽산에 있었음을 나타난 표현이다. 기훤 세력은 개산군의 주도권을 두고 죽산 박씨와 대립 또는 대치했을 것이고 박씨는 기훤이 세력을 급격하게 확장하면서 일시적이나마 죽산의 토호세력에서 한발짝 물러나 있었을 것이다.

기훤 세력의 근거지는 죽주산성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주변에서 벌떼처럼 일어나 일정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호족들은 기훤에게 개미처럼 모여들어 기훤은 한껏 힘을 부풀렸다. 그리고 진성여왕 5년(891년) 궁예는 백성들을 모으면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기훤에게 자신을 맡겼다. 궁예는 1년여동안 기훤에게 홀대를 받으면서도 그 밑에서 여러 어려움을 겪으며 나름 힘을 키워 기훤을 붕괴시키고 그 세력을 자신에게 끌어들였다. 이후 죽산은 궁예 세력의 중요한 곳이 됐다. 이때에도 죽산의 박씨 세력이 어떤 움직임을 보였는지 알 수 없다. 평산으로 옮겨간 박씨들이 13개 성을 쌓아 궁예에게 귀부했던 것으로 미뤄 그들도 궁예 세력 밑으로 들어갔을 가능성이 있다.

현재 죽산 박씨의 시조는 고려 태조의 창업을 도와 삼한벽상공신이 된 박기오(朴奇悟)로 알려져 있다. 사실 개산군이 고려 초에 ‘죽주’, 즉 ‘군’에서 ‘주’로 확장된 것은 고려 건국에 공을 세운 박씨 세력에 대한 포상의 의미가 크다. 하지만 박기오 이전의 선계(先系)가 분명하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잊혀졌다. 이것은 당시 궁예와 밀착된 청주권역에 속해 있던 죽산의 박씨가 궁예의 세력권에 들어가 있다가, 왕건의 후삼국 통합과정에서 궁예를 떠나 왕건에게 의탁했음을 의미한다. 죽산의 박씨는 평산과 갈라진 이후 자손이 번창해 왕건이 후삼국 통합할 때부터 죽산을 본관으로 삼아 12세기 중반을 지나 고려 말까지 그 후손이 계속되고 있었다. 혜종 1년(994년)에 박기오는 원윤이라는 관직을 가지고 죽주에 있으면서 후에 왕이 된 정종(定宗)·광종, 역시 원윤이었던 박기달, 죽주에서 사간(沙干)의 관직을 가진 덕영·제종 등과 함께 영월 흥녕사의 ‘징효대사보인탑비’를 조성하는데 참여했다. 또 성종 12년(993년)에 매산리 미륵당 석탑의 중수에 박씨가 계속 참여하고 있음도 밝혀졌다. 이런 사실은 8세기 중반 이후 12세기 중반까지 죽주에서 박씨가 토호로 그 세력을 지속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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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주에서 죽산 박씨의 활동

고려 전기 죽주에서 죽산 박씨의 활동으로 대표적인 것은 지방관이 파견되지 못했던 죽주의 운영에 그들이 적극 참여해 죽주의 정치·경제·행정을 담당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에 대해 살필 자료를 아직 확인하고 있지 못하지만, 그들은 다른 유력 세력인 최씨·안씨 등과 함께 죽주의 행정에 깊숙이 관여했다. 후삼국 통일전쟁시기에 각 곳의 호족들은 전쟁에 대비하거나 농민을 구휼하기 위해 군량 또는 곡물·소금 등을 비축했던 창고를 운영했다. 당시 죽산에도 곡물과 소금을 관리했던 창고가 있었는데, 그 운영 주체 중에 하나는 죽산 박씨였을 것이다. 또 광종 13년(962년) 대대적인 개축작업이 있었던 망이산성은 물론, 봉업사를 감싼 죽주산성의 운영과 수차례에 걸친 중수를 박씨들이 주도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봉업사(奉業寺)의 중창에서 박씨의 역할이다. 신라 후기부터 화차사(華次寺)라는 절이 있던 이곳은 고려 건국 이후 대규모의 사찰 중창이 이뤄졌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공민왕이 여기에서 태조 왕건의 초상을 알현했던 것으로 전한다. 죽주의 대표적인 호족이자 인근 미륵당 석탑의 조성을 주도했던 박씨들이 봉업사 중창에도 적극 참여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추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리고 10세기 중엽에 있었던 미륵당 석탑의 수리 또한 박씨가 중심이 돼 진행됐음을 볼 때, 이때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 석탑 수리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탑지(塔誌)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그 수리에 박씨가 참여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런 점에서 봉업사터에 남아 있는 죽산리 오층석탑과 인근의 미륵불 등 불상 조성사업에 박씨의 주도와 참여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죽산 박씨네의 역사인물들

죽산 박씨들은 중앙 정계로 진출한 그룹과 죽주에 남아 고향의 향리(鄕吏)로 남은 그룹이 있다. 또 일찍이 평산으로 갈라진 그룹들 역시 일정하게 죽주와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향리로 남은 사람들의 면면을 살피기는 어렵다. 다만 조선 태조 2년(1393년) 죽주감무를 맡아 야광사(野光寺)를 무너뜨리고 그 자재로 관사를 수리했다가 승려들의 반발로 징계를 받은 박부(朴敷) 정도가 확인된다.

고려 건국에 참여한 죽산 박씨의 주요 인물들은 일찍이 개경에 올라와 중앙 정계에 진출했다. 그들은 당연히 개경에 정착해서 죽산과의 혈연적인 연대를 지속했다. 혜종 때 원윤의 관직을 가졌던 시조 박기오를 비롯해 역시 원윤이었던 박기달과 그의 후손들이 그렇다. 또 문종 때 과거에 급제해 현종 때 요나라와 송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고 문장이 아름다워 당시 외교문서의 대부분을 작성했던 박인량(?~1096년)은 죽산 박씨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소부감 종(宗)의 손자이고 태자태보 충후(忠厚)의 아들인데, 비부(秘府)에 간직됐던 ‘고금록(古今錄)’(10권)과 ‘수이전(殊異傳)’을 저술하기도 했다. 박경인(1057년~1122년)은 그의 아들로, 동생인 경백(?~?)·경산(1081년∼1158년)과 함께 과거를 통해 높은 관직에 올라 죽산 박씨를 고려 전기에 명문가로 위치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또 아들인 효렴(?~?)은 이자겸의 사위로 예종과 인척 관계였다. 박경산 또한 문장에 뛰어났고 왕실의 태자태보 왕준(王濬)의 딸과 혼인했다. 왕실은 물론 당대의 다른 문벌 가문들과 혼인을 통한 이·삼중의 친족망을 형성해 그 세력을 유지시켰다. 한편 죽산 박씨는 일찍이 죽산과 평산으로 본관이 나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일정한 관계를 지속했다. 그들의 묘지명에서 박인량의 아들인 박경인은 죽산, 박경산은 평산으로 본관이 기록돼 있음에서 알 수 있다. 적어도 문종·숙종 때까지 죽산과 평산 박씨들간에 일정한 소통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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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량과 다른 계열인 박정유(1089년∼1145년)도 과거에 급제해 20여년동안 대간직에 있었고 그의 아들인 박육화(?~?)는 의종 때 금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와 형부상서를 지냈다. 그의 손자인 박인석(?~?)은 명종 때 음서로 관직에 나갔다가 무인집정 와중에서 나라가 혼란스러워지자 고향인 죽주로 유배돼 회곡(檜谷)에서 살았다. 이후 경상도의 민란을 선유하는 공을 세웠고 금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최충헌이 집정했던 때 대표적인 문한이었던 이규보와 교유해 그가 죽은 후 이규보는 박인석 초상에 화상찬(畵像讚)을 지었다. 박인석의 막내였던 박서(?~?)는 고종 18년(1231년)에 서북면병마사로 나중에 처인성에서 사살되는 살리타이가 이끄는 몽고병을 귀주성에서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에 몽고는 그를 죽일 것을 고려 조정에 요청했지만, 그는 이를 피해 고향인 죽주에 내려와 있었다. 그러다가 고종 23년에 죽주방호별감이었던 송문주가 몽고군에 맞서 죽주산성에서 지휘한 전투에서 송문주를 적극 도와 죽주성 승첩을 이끌었다.

또 박정유의 동생인 박정혁 계열인 박전지(1250년∼1325년)는 원종 때 조정의 문병을 장악했던 이장용의 외손이다. 공경자제를 간택해 원나라 조정에 들어오게 하라는 황제 쿠빌라이의 명령을 시행하는데 으뜸으로 천거돼 원나라에 가서 여러 관직을 지낸 후 돌아왔다. 충선왕 즉위년(1298년)에는 충선왕이 설치한 사림원(詞林院)을 총괄했다. 그의 아들인 원(?∼1341년)은 과거에 급제해 군부판서를 지내고 과거를 주관했으며, 충열왕 때 첨의중찬을 지낸 홍자번의 손녀와 혼인했다. 이외에 박문화(?~?)와 충선왕 때 대언을 지낸 그의 동생 박효수(?∼1337년), 박송생(?~?) 삼형제는 충렬왕 때 과거에 급제해 문장가로서 죽산 박씨의 명성을 이었다. 그리고 그 전통은 조선 세조 때의 문병으로 영의정을 지낸 박원형(1411년~1469년)에게서 보이듯 후대로 계승됐다.

김성환 경기문화재단 뮤지엄본부 경영협력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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