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경기천년, 경기 역사 문화의 전개] (14) 서울을 그린 그림들 ‘개성과 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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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선 作 '인왕제색도'

그림에 등장한 두 왕조의 도읍지-진경산수화와 기록화

21세기인 현재 지구에서 자신들의 조상이 세운 나라, 그 강토에 뿌리를 내려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어온 민족은 얼마나 될까? 오늘날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수도 이름이기도 한 서울, 사전에 명기된 서울이란 단어의 정의는 ‘한 나라의 중앙정부가 있는, 가장 중심적인 도시’이다. 한자로는 경도(京都)·경락(京洛)·경부(京府)·경사(京師)·경조(京兆)·도부(都府)·국도(國都)·도읍(都邑) 등으로 지칭되는데 순 우리말이 서울이다. 중국 송(960-1279)에 앞서 국토를 통일해 칭제건원(稱帝建元)한 고려(918-1392)는 광종 11년(960)때는 개경을 황제국가에 걸맞게 황도(皇都)라 지칭하기도 했으니 이는 당연한 귀결이다.

우리 민족이 이룩한 최초의 통일국가인 신라의 수도 경주는 1천 년, 중세와 근세의 서울인 개성과 한양은 500년 내외의 왕도이다. 도시의 발전에 따른 확장으로 면모의 변화를 가져왔으나 지난 역사 선조들의 숨결과 체취가 흥건하게 배인 고도(古都)들이다. 이는 인류 역사를 살필 때 흔한 일은 아니다. 문화의 중심지로 오래된 도시인 이곳들은 풍광 자체가 손꼽히는 아름다운 절승(絶勝)이자 도시 자체가 유적지이며 박물관이다. 계속 범위가 넓어져 규모와 모습이 변하나 오늘날도 남아전하는 고려시대 만월대(滿月臺)처럼 궁궐과 지상의 건물은 사라졌으나 유구와 유작지 등을 통해 규모를 헤아릴 수 있다.

동아시아 전통회화는 일견 비슷해 보이나 화풍에서 닮은 점 외에 차이점 또한 적지 않음을 간과하기 쉽다. 예술은 자연의 모방에서 비롯한다. 이에 아름다운 곳에서 아름다운 그림에 태어남은 동서양 구별 없이 자명한 사실로 걸작 명화가 이를 증명한다. 실경산수의 전통은 오래고 길다. 실경산수의 오랜 전통을 바탕으로 조선왕조 18세기 ‘조선의 그림 성인(畵聖)’ 정선(鄭敾·1676-1759)이 이룩해 파천황(破天荒)의전무후무한 고유색 짙은 독자적인 화풍을 진경산수(眞景山水)라 칭한다. 문인화가와 직업화가 구별 없이 모두가 대거 참여해 후기 화단을 크게 풍미해 강한 울림으로 유파를 형성했고 국경을 넘어 일본과 중국에 영향을 미쳤다.

그의 위대성은 단지 그림의 주인공이 우리 복식의 인물이며 우리 산천을 등장시킨 점에만 의의를 둠은 그를 국제무대가 아닌 한반도 지역화가로 가두는 근시안적인 소극적인 견해라 하겠다. 중국회화의 발전을 살피면 그들 왕조의 수도가 북방에 위치할 때 맑고 투명한 공기로 경물이 또렷한 선묘 위주(用筆法)인 화북산수로, 남송이후 남하 해 습하고 늘 안개가 껴 여백의 표현과 함께 물상의 윤곽이 흐릿한 번짐(用墨法)이 특징인 강남산수로 변모한다. 두 양식의 절충조화는 오랜 세월 중국 화가들의 화두요 숙제였다. 이 문제를 중국 아닌 이 땅의 정선은 나름대로 해결해 숙제를 풀었다. 우리의 영산(靈山) 금강산 묘사에 있어 화면 내 원경의 노년기 바위 위주인 골산(骨山)은 선묘로, 근경의 토산(土山)은 물기 많은 선염 위주로 묘사했다.

정선의 진경산수를 지역별로 살피면 금강산, 한양 내의 모습, 한강 주변의 풍경 등 크게 셋으로 나뉜다. 지도도 넓은 의미의 그림에 포함되나 조선 후기 그려진 진경산수를 중심으로, 기록화로 의궤도나 기록적 성격이 짙은 풍속화에 등장한 한양과 개경을 그림 중심으로 살피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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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세황 作 '송도기행첩' 中 개성시가
개성 부근의 명소-‘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과 박연폭

개성은 한양에 버금가는 명당으로 풍광 또한 수려한 곳이다. 하지만 고려왕조의 수도 개경을 담은 옛 그림은 한양에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수적으로 매우 적다. 재료 측면에서 바탕화면이 화재와 충식에서 자유롭지 못한 비단이나 종이인 점에서도 이유를 찾게 된다. 화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우리 문화의 황금시대로 지칭되는 진경시대 정선의 영향이 크게 감지되는‘송도사장원계회도’ 병풍과 18세기 중반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1713-1791)이 남긴 기념비적인 명품 ‘송도기행첩’이 현존해 아쉬움을 달랜다.

강세황은 조선후기 대표적인 문인화가이자 평론가로 김홍도와 조선 삼대묵죽 화가에 꼽히는 문인화가 신위(申緯·1769-1847)의 스승으로 18세기 예원의 총수로 지칭된다. 32세 때 서울서 안산으로 이주해 61세 때 벼슬에 나아가 서울로 돌아가기까지 30년 가까이 머문 경기도 안산은 그의 학문과 예술의 배양토였다. 이곳에서 김홍도와의 사제의 연도 이뤄진다. 높은 학문과 장수 집안으로 조부부터 표암 자신까지 3대에 걸쳐 70넘도록 관직에 있었으니 김정희가 쓴 ‘삼세기영지가(三世耆英之家)’ 편액이 이를 알려준다.

부친 강현(姜?·1650-1733)은 표암을 64세에 낳았으며 표암은 17세에 맏아들 완을, 55세 때 다섯째인 막내가 태어난다. 시서화에 두루 능한 3절로 서화에 대한 적지 아니한 품평을 남겼다. 그는 여행과 사생을 통한 전통적인 문인화와 서양화풍의 원용 등 청신한 감각에 산수·인물·초상·화조·화훼초충·사군자 등 다양한 화목에 두루 손을 댔다. 문인화가의 사표이자, 당대 최고의 감식안으로 그는 회화사적 의의가 크다. 높은 학문과 장수 집안으로 조부부터 표암 자신까지 3대에 걸쳐 70세가 넘도록 관직에 있었으니 김정희가 쓴 ‘삼세기영지가(三世耆英之家)’ 편액이 이를 알려준다.

15세에 결혼한 부인 유씨가 1756년 5월 타계하자 그 이듬해인 1757년 7월 개성 유수 오수채(吳遂采·1692-1759)의 부추김으로 슬픔을 달랠 겸 몇 개월에 걸쳐 명승지를 유람하고 남긴 ‘무서첩’을 이 화첩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 화첩은 세상 사람들이 일찍이 보지 못한 것”이라 자신이 제사에서 언급했듯 새로운 화풍으로 회화사적 의의가 자못 크다. 거리에 따른 크기를 다르게 한 원근법, 농담차이의 면 처리에 의한 입체감 구사, 음영법의 원용 등 서양화법을 수용한 점이 주목된다.

첫 폭인 ‘송도전경’은 화면 상단 중앙에 위치한 송악산과 화면 하단의 남문루를 사이에 두고 전개된 송악의 시가지가 펼쳐진다. 기와집이 질서정연하게 자리 잡은 개성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송도의 동북쪽에 위치한 오관산 내 영통동 입구에 위치한 ‘화담’, 영통사 가는 길에 있는 ‘백석담’, 화담에서 영통사 가운데 자리한 ‘백화담’, 송도 동북쪽 성거산성 내에 있는 군량미를 비축하는 승창과 군기고와 화약고가 있던 ‘대흥사’는 아래서 위를 올려다보는 시점으로 묘사했고 천마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모인 성거산 방면에 있는 ‘청심담’, 영통동으로 향하는 길목인 ‘영통동구’, 대흥 산성의 남문과 문루와 그 너머 인달봉을 옮긴 ‘산성의 남초’, 대흥사 부근에 있는 임금행차 때 머무는 행궁인 ‘대승당’, 폭포 아래가 말구유와 닮은 성거산 대흥동의 ‘마담’, 마담과 가까운 곳으로 일행 4명에 그림을 그리는 표암 자신까지 등장시킨 ‘태종대’, 천마산과 성거산 사이에 있는 잘 알려진 ‘박연폭포’ 등 12점은 2폭이 한 그림을 이룬다. 이어 한 폭에 한 점씩 그린 태안승경 4점이 이어진다. 군량미 저장 창고인 ‘태안창’과 주변 ‘낙월봉’, 송도를 조망할 수 있는 ‘만경대’와 태안동문으로 들어서면 보이는 석벽인 ‘태안석벽’ 등이다.

그림 속에 화가 자신을 등장시킨 점, 수묵위주로 담청과 담황의 맑은 색조의 원용, 투시도법에 의한 시선집중, 과감하고 참신한 새로운 시도 등 벼슬 나가기 이전 40대 중반에 안산 시절 그린 중년의 대표작이자 그의 진경산수에 있어 최고의 명품으로 꼽힌다.



한양-주변 풍광과 왕궁 외

유유히 흐르는 한강 주변은 우리 고대 문명의 젓줄이다. 조선왕조에 앞서 암사동 유적지가 말해주듯 신석기 이래로 우린 민족이 똬리를 튼 곳으로 백제의 공주와 부여로 천도하기 이전 오랜 기긴 백제의 수도이기도 하다. 조선의 서울인 한양은 오늘날 강남과 강북의 구별이 한가인 것과 달리 청계천을 중심으로 북쪽이 북촌이며 궁궐도 이곳에 위치한다. 산악을 이용해 이를 에워싼 성벽이 알려주듯 그 규모는 크지 않았다.

정선이 남긴 걸작인 ‘인왕제색(仁王霽色)’을 비롯해, 그의 아틀리에에 등장한 자화상으로 비정하는 ‘글 읽다 남은 겨를(讀書餘暇)’과 ‘인왕산 골짜기의 그윽한 집(仁谷幽居)]’, 북악산 남쪽 기슭에서 서울 장안의 밤풍경을 내려다보고 그린 시적 정취가 짙은 ‘서울 장안의 안개 낀 달밤(長安烟月)’과 같은 위치에서 그린 ‘서울 장안의 안개비(長安烟雨)’는 이슬비 내리는 봄날 낮 풍광으로 남산과 그 뒤 원경으로 관악산·우면산·청계산 연봉이 이어진다.



중인의 등장-새로운 사회 분위기를 전하는 중인시사

사회에서 자신의 존재를 서서히 드러내며 근대를 향한 발걸음을 한 걸음씩 내딛는 중인들, 그들이 중심이 된 위항문학의 등장은 18세기 초 숙종 무렵으로 18세기 후반에 더욱 가시화 되었다. 인왕산 아래 옥류동에서 개최한 옥계시사(玉溪詩社)는 1786년 천수경(千壽慶·?-1818)이 주축이 돼 그의 집인 송석원(松石園)에서 모여 송석원시사 또는 서사(西社)로도 지칭된다. 이 모임을 담은 ‘옥계청유첩’은 이인문(李寅文·1745-1824 이후)과 김홍도가 1791년 낮과 밤 장면인 ‘송석원시회도’ 두 폭이 전한다. 시적 정취로 향토미를 극복해 문인화가에 뒤지지 않는 화격에 도달함을 어렵지 않게 읽게 된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수갑계첩(壽甲?帖)’과 ‘금란계첩(金蘭?帖)’이 대표적이다. 수갑계는 동갑 모임으로, 참석자는 1814년 윤달 2월에, 중인들로 태어난 해가 1758년으로 57세가 된 이들이다. 세자시강원의 서리를 맡은 서경창, 시문을 남긴 오득린, 박원묵 등 22인 동갑들이 중부 약석방에 위치한 정유상의 집에서 만남이다. 서문을 쓴 인물은 이조원(李肇源·1758-1832)중인 아닌 양반이다.

금란계는 안시민이 1857년 정사(丁巳) 음력 삼월 보름에 북한산 중흥사(重興寺)에 묵으면서 스님 및 벗들과 계모임을 연 후에 제작한 것이다. 대담한 산수묘사, 몰골법의 윤묵의 나무줄기, 필치를 중첩해 배경의 공간감을 살린 구성 등 남종화법의 그림과 본문 내용 모두 같은 해에 이뤄진 것으로 그린 화가로는 이한철(1812-1893년 이후)로 비정되기도 한다.

경주 포석정은 잘 알려진 유적으로 그 연원은 서성(書聖) 왕희지(王羲之·307-365)에서 비롯한다. 중국에서도 인공으로 곡수를 만들었으니 포석정은 이에 비롯된 것으로 봄이 옳을 것이다. 1853년 음력 3월3일은 왕희지가 회계 유상곡수에서 난정의 모임을 개최한 1천500년이 되는 뜻 깊은 날이다. 이를 기념하고자 조선에서 김석준(金奭準·1831-1915) 등 잡과인 역과·율과·음양과 출신 등 여항문인중인 30명이 한남동이나 옥수동 부근으로 추정되는 남산 아래 모였다. 의관을 갖추고 있어 사대부에 뒤지지 않은 의연함을 보여준다. 모임의 일원으로 화면에 그림을 그리는 뒷모습으로 표현한 인물이 그림을 그린 화원 유숙(劉淑·1827-1873)이다.


이원복 문화재위원·전 경기도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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