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경기천년, 경기 역사 문화의 전개] (15) '글로벌 제너럴' 충렬공 김방경

20160522010077.jpeg
한국사에서 원간섭기는 글로벌한 시대적 분위기가 가장 짙었다고 할 수 있다. 원의 간섭을 받는 상황이긴 했지만 국제적이고 개방적이었던 원나라를 중심으로 활발한 국제교류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김방경은 원의 침공 이후, 원의 간섭이 시작돼 많은 변화가 있었던 기간에 생존했던 인물이다. 그의 인생을 보면 이러한 변화무쌍한 기간을 대변하듯 파란만장하면서도 시기시기마다 자신의 본분을 다했던 글로벌 고려인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하고 있다. 특히 그는 두 차례의 일본 원정군을 지휘했던 글로벌 제네럴(Global Genera)이었다.

출생과 활동

그의 본관은 안동. 자는 본연(本然),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민성(敏成)이며 아버지는 병부상서(兵部尙書)·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낸 효인(孝印)이다. 할아버지 민성이 양육했는데 도량이 있고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김방경 또한 강직해 1263년(원종 4)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로 있을 때 당시 권신 유천우(兪千遇)와 대립하기도 했고 상장군이 돼서도 굽히지 않는 성격으로 반주(班主) 전분(田份)의 미움을 받아 지방관으로 좌천되기도 했다. 그러나 김방경은 인망이 두터워 바로 형부상서·추밀원부사로 승진 임명됐다.

당시 시중(侍中) 최종준(崔宗峻)은 충성스럽고 직언을 잘하는 김방경을 총애해 큰일이 있으면 모두 그에게 맡겼다고 한다. 여러 번 자리를 옮겨 감찰어사(監察御使)에 올랐고 재물을 관리하는 우창(右倉)을 감독할 때는 재상의 청탁이라 할지라도 거절했다는 일화가 있다.

20160522010052.jpeg
충국(忠國)과 위민(爲民)


그가 태어났던 1212년은 최충헌의 아들 최우의 집권기였다. 김방경은 18세인 1229년(고종 16)에 음서(蔭敍)로 산원 겸 식목녹사(散員兼式目錄事)로 관직에 나아갔다. 그런데 이듬해인 1230년부터 몽골은 고려를 침공했는데, 고려는 이에 저항해 1231년에 최우는 강화로 천도해 항전을 계속했다.

그러나 김방경은 강화도에 들어가지 않고 몽골군과 싸웠다. 당시 강화도의 생활은 편안했으나, 육지에서는 몽골군에게 20만 명 이상의 포로가 끌려가는 등 피해가 심했다. 몽골군의 침고시기는 주로 가을이었으므로 추수기에 농민들의 수확물을 약탈 당했으며 흉년까지 겹치기도 해 굶어 죽은 시체가 즐비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 봉착한 김방경은 강화로 가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다. 백성들과 함께 육지에서 항전했던 것이다. 그가 1248년에 서북면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이 됐을 때 목민관(牧民官)으로서의 면모를 살필 수 있는 사례가 있다. 김방경은 몽골의 침략을 피해 백성들과 함께 위도(葦島·평안북도 정주)로 들어갔다. 김방경은 이곳에서 바다의 조수를 막기 위해 제방을 쌓았는데, 이 제방으로 간척지를 만들어 농사를 할 수 있었다. 또한 부족한 물을 구하기 위해 못을 만들어 비를 받아 저장해 우물 대신 사용해 백성들의 생활하는데 크게 도움을 줬던 것이다. 그의 충국과 위민 사상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용장(勇將) 김방경

김방경의 활동 중에서 가장 주목할 내용은 무장으로서의 역할이었다. 고려는 1258년에 김준(金俊) 등에 의해 60년 지속돼 오던 최씨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김준은 다시 임연(林衍) 등에 의해 제거됐다. 이때 국왕과 무신정권과의 사이에 개경으로의 환도를 두고 현저하게 입장이 달랐다. 당시 국왕 원종은 개경으로 돌아가고자 했으나 임연은 이를 거부하고 원종을 폐위하고 안경공 창(安慶公昌)을 옹립했던 것이다. 그러나 원은 원종을 복위시켜 이후 고려와 원나라와의 군사적 충돌이 일어날 것을 염려한 이장용(李藏用)의 천거로 김방경은 원나라에 사신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마침내 1270년 6월에 개경 환도가 강행됐다. 이때 무신정권의 조아(爪牙)였던 삼별초는 환도를 거부하고 난을 일으켰다. 삼별초는 배중손이 승화후 온(承化侯溫)을 왕으로 삼아 진도를 거점으로 한반도의 서남해지역에서 세력을 떨쳤다. 이에 고려 조정은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김방경을 상장군(上將軍)으로 임명했다. 원나라의 장수 아해(阿海)가 삼별초의 격렬한 저항으로 후퇴하려는 것을 김방경이 저지하면서 결국 삼별초 토벌에 성공했다. 이때 배중손과 승화후 온도 전사했다. 삼별초의 남은 세력은 김통정(金通精)을 중심으로 탐라(耽羅·제주도)로 거점을 옮겨 저항했다. 김방경은 1273년에 행영중군병마원수(行營中軍兵馬元帥)로 탐라의 삼별초를 토벌하고 시중에 올랐다.

20160522010050.jpeg
Global General, 김방경

김방경의 무장으로서의 면모는 2차례에 걸친 일본정벌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원의 세조는 삼별초를 토벌한 다음해인 1274년(충렬왕 즉위년)에 일본 정벌의 야욕을 포기하지 않고 고려에 그 준비를 강요했다.

김방경은 도독사(都督使)로서 원의 도원수 홀돈(忽敦)과 함께 고려에서 제작한 선박 900척과 고려군 8천 명이 포함된 4만여 명의 여몽연합군을 이끌고 참전했다. 원정군은 쓰시마섬과 잇키(壹岐)섬에서 커다란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큐슈(九州)의 하카타(博多·후쿠오카)지역에 상륙해 소하라(蘇原)의 지휘소를 점령하는 등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었다.

여기서 김방경의 공이 가장 뛰어났다. 김방경은 선박으로 돌아가자는 원 장수들을 만류하면서 마지막 총 공세를 준비하기 위해 잔류할 것을 권했으나 결국 연합군은 선박으로 돌아갔다.그리고 그날 폭풍으로 거의 모든 선박이 파손되고 많은 사망자와 실종자를 남긴 채 원정군은 퇴각했다. 원정 결과 김방경은 상주국(上柱國)이 됐고 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가 더해졌다.

글로벌 제네랄 김방경은 1281년의 제2차 일본정벌에 참여했다. 이 원정은 군사 14만여 명이 동원된 규모상으로 볼 때 세계사에서도 유래를 볼 수 없는 대규모 해상 원정이었다. 이 가운데 군사 10만여 명은 남송에서 차출됐다. 연합군은 잇키섬에서 만나 공격을 하고자 했으나 남송군의 출격이 지연돼 장소를 히라도(平戶)로 변경해 다카시마(鷹島) 일대에 이르렀을 때였다. 양군이 공격을 준비하던 중 폭풍이 불어 닥쳐 연합군은 변변한 공격 한번 해보지 못하고 퇴각했다. 이때의 참상을 ‘고려사’에는 ‘시체가 조수를 따라 포구에 들어와 포구가 이로 말미암아 막혀서 시체를 밝고 다니게 됐다’라고 전한다.

김방경은 일본원정을 통해 고려와 원에서 가장 신뢰받는 인물이 됐다. 2차 원정시에 보여 주었던 용장으로서의 김방경에 대해 ‘고려사’ 김방경 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당시의 상황은 남송군이 도착하지 않자 환국하자는 논의가 분분하던 때였다.

“왕의 지시로 3개월분의 식량을 가지고 왔으니 아직도 1개월분의 남아 있다. 남송군이 와서 함께 공격하면 이를 멸할 수 있다”라고 하니 감히 더 이상 말하는 장수가 없었다.

20160522010053.jpeg
가장 신뢰 받는 고려 사신


김방경은 반듯한 성품으로 많은 고초를 겪기도 했다. 1277년에 위득유(韋得儒) 등의 모함으로 원의 다루가치(達魯花赤) 석말천구(石抹天衢)에 의해 구금돼 거짓 자백을 강요받기도 했다. 이 일로 김방경은 백령도로 유배됐으나 원 세조에게 보낸 충렬왕의 상소로 무죄임이 밝혀졌다.

이러한 곧은 성격은 고려와 원나라 양쪽으로부터 신임을 받게되는 이유도 됐다. 즉, 김방경은 가장 믿을 만한 고려 사신이었다. 성절사(聖節使)로 원나라에 다녀왔으며 1273년 가을, 삼별초를 토벌한 뒤 김방경은 원나라로 가서 원 세조(世祖·쿠빌라이)의 환대를 받았다.

김방경은 중찬(中贊)이 올랐고 1280년에는 벼슬에서 물러나고자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원나라로부터 중선대부 관령고려국도원수(中善大夫管領高麗國都元帥)라는 직임을 받았고 1283년 삼중대광 첨의중찬 판전리사사 세자사(三重大匡僉議中贊判典理司事世子師)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이어서 첨의령(僉議令)이 가직되고 상락군 개국공 식읍 일천호 식실봉 삼백호(上洛君開國公食邑一千戶食實封三百戶)에 봉해졌다. 김방경은 1212년(강종 1)에 태어나 1300년(충렬왕 26)에 사망했으니 향년 89세였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김방경은 직언을 하는 곧은 성품의 관리이자 국가의 명에 따라 행동을 했던 충국의 귀감이며 애민사상을 가진 목민관이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원나라의 사신으로 심지어는 목숨을 내건 일본원정의 전장에 서슴지 않고 나서 국가에 충성하고 뜨겁게 백성을 사랑했던 글로벌 고려인이었던 것이다. 충렬이라는 시호는 그에 따른 합다한 조치였다.

이재범 경기대교수

저작권자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