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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새 전이다. 집 근처 복지관을 이용하는 처(妻)가 대리서명을 했다. 지방재정 제도개선 반대 서명지(紙)에 내 이름 석자를 적었다. 묻지도 않고 사인까지 했다. 수원시에서만 매년 1천700억 원의 세금이 유출(流出)된다는 설명을 듣고 홧김에 저질렀다고 했다. 방법은 틀렸지만, 잘한 일이라고 칭찬했다. 처는 ‘지방재정규제방안’의 실체를 모른다. (행정자치부는 ‘개혁’이라고 분칠했지만, 민낯은 ‘규제’라서 바로잡았다) 쉽게 설명해주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도대체 무슨 얘길 하는지 모르겠어” 면박만 당했다. 행자부는 교활하다. ‘닭(국가)이 먼저냐, 알(지역)이 먼저냐’고 묻는다. 논리를 섞을수록 논리적 빈곤에 빠진다. 행자부는 치밀하다. ‘후려치기’, ‘갈라치기’, ‘줬다뺏기’ 부비트랩 3종세트를 설치했다. 전국은 분열됐다.

첫 수는 후려치기다. 행자부는 불가피하게 발생한 시·군간 재정 격차를 줄이는 가장 쉬운 길을 선택했다. 백주대낮에 뒷통수를 후려쳐서 빼앗은 뒤 나눠주는 방식이다. 제물(祭物)은 경기도민이 낸 세금이다. 수원·용인·성남·고양·화성·과천 6개 시(市)가 타깃이다. ‘작년에 경기지역 31개 시·군이 징수한 지방세는 모두 2조6천600억 원인데, 절반이 넘는 1조4천억 원(52.6%)이 6개 시(市)에 쓰여졌다’ 행자부의 여론몰이엔 빈틈이 없다.

다음 수는 갈라치기다. 행자부는 경기도민 세금 5천244억 원을 판돈으로 걸었다. ‘경기도가 정한 배분 기준만 살짝 바꾸면 시·군당 80억~350억 원씩 가져갈 수 있다’ 같이 빼앗아서 나눠먹자는 유혹은 강렬하다. 경기지역 시·군 공무원들은 실리와 의리사이에서 사분오열(四分五裂)한다. 행자부가 건넨 ‘독이 든 사과’는 뱉어내기엔 너무도 달콤하다. 저항하면 ‘탐욕’이라고 불도장을 찍어버리면 그만이다.

마지막 수는 줬다뺏기다. 권한 회수는 손바닥뒤집기다. ‘(경기도)조례에 위임한다’ 일곱 글자만 삭제해버리면 끝이다. 행자부의 쇼핑 목록에 오른 권한은 1년6개월 전 국무회의를 통과한 시행령이다. 시행령 재개정은 2할 자치의 1할 회귀(回歸)다. 곳간 열쇠까지 빼앗긴 지방 살림은 더 이상 비벼볼 언덕이 없다. 재정의 노예화는 중앙자치(中央自治)의 신호탄이다. 국무회의 멤버가 아닌 경기도지사는 속수무책이다.

행자부가 쓴 독(毒)은 만성지독(慢性之毒)이다. 쏘이면 손끝이 저릿하다. 하지만, 몸통은 따듯해지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중독성은 최강이다. 스쳐도 한 방이다. 치명적인 독성(毒性)은 경기도 전체를 말라 죽인다. 10년만 당하면 5조2천44억 원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재원이 탈(脫)경기한다.

행자부는 가장 단순한 공식으로 문제를 풀어보라고 현혹한다. 상대적으로 재정 여건이 넉넉한 6개 시(市)가 지방세를 독식한다. 5천244억 원을 25등분해봐라. 연 평균 210억 원씩 보너스가 생긴다. 넉넉잡고 10년이면 경기지역 31개 시·군의 재정격차는 어느정도 해소된다. ‘빈익빈부익부’ 구조는 깨트려야 한다. 혹세무민엔 여론몰이가 필수다. ‘경기도 조례도 정한 지금의 배분방식은 ‘부자 시(市) 몰빵 룰’이다’

이 정도는 나 같은 ‘수포자’(수학포기자)도 풀 수 있다. 수포자를 매번 좌절하게 만드는 것은 출제자가 파놓은 함정이다. 행자부는 정답을 오답으로 만드는 역설적인 등식(等式)이 있다는 사실을 감췄다. 국세(國稅)가 재원인 일반교부금과 지방세(地方稅)로 조성되는 조정교부금은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다. 국세가 늘어나는 만큼, 지방세는 줄어든다. 행자부는 결정적인 공식을 숨겨놓고 문제를 냈다.

도저히 이해가 안될땐 ‘단순무식’한 수포자 방식이 효과적일때도 있다. 경기도 지갑 속에 있는 6개 시(市) 몫 1조4천억 원을 25개 시·군에 나눠준다. 정부 금고에서 나와야 할 1조4천억 원은 고스란히 남게된다. ‘굳은 돈’은 경기도 몫이 아니다(不可遠). 불교부단체를 제외한 전국 170개 시·군·구의 몫이다(不可近). 예컨대, A군이 조정교부금 210억 원을 보너스로 받게 되면, 일반교부금 210억 원이 다른 지역으로 배분되는 식이다. 경기도가 제살을 깎는 동안 경기도민들이 낸 세금은 충청·경상·전라·강원·제주도민들에게 쓰여지게 되는 것이다.

치명적인 독의 종류를 알았으면 독공(毒攻)에 대비해야 한다. 행자부는 오늘 오후 2시 정부서울청사로 전국 부지사와 부시장·부군수를 불렀다. 지방재정전략회의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붙였지만 신종 규제를 공표하는 자리다. 전국의 우군(友軍)을 불러모아 놓고 ‘99(찬성) 대 1(반대)’의 여론재판을 하겠다는 뜻이다. 경기도 시장·군수들은 기로에 섰다. 실무 공무원들은 이미 독성에 취한지 오래다. 정원·조직·예산 어느 것 하나 뜻대로 할 수 없는 통제의 고통을 까맣게 잊었다. 박원순 서울시장처럼 ‘행자부 폐지’를 요구하고 오라는 강력한 지시를 내려야 한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 게임의 날이 밝았다.

한동훈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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