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경기천년, 경기 역사 문화의 전개] (16) 경기도와 충청도를 잇는 가교 팽성

▲ 팽성읍객사 전경
오래된 옛 지명, 그러나 고단했던 팽성(彭城)

경기도 남쪽, 지금은 평택(平澤)에 위치하고 있는 팽성(彭城)이 지금처럼 경기도에 속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고구려부터 내려온 지명인 팽성이 평택으로 바뀐 것은 고려 태조 23년(940년)이다. 당시 전국 주(州)·부(府)·군(郡)·현(縣)의 명칭을 고쳤는데 이 때 팽성현이 평택현으로 바뀌게 됐다. 물론 이 평택이란 이름이 지금의 평택은 아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태종 13년(1423년)에 양광도(楊廣道)에 소속된 평택현을 충청(우)도로 편입시키며 현감(縣監)을 파견하기 시작했고 군사적으로는 홍주진관(洪州鎭管)에 소속시켰다. 이후 평택현은 치폐(置廢)를 거듭하다가 연산군 11년(1505년) 6월에 주변의 직산·진천·아산현과 더불어 경기도에 속하게 됐다. 이해 11월에 진천·직산·아산·평택 등 5역(驛)을 성환도(成歡道)라 부르고 역승(驛丞) 1원을 두도록 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 해인 중종 1년(1506년)에 격하됐던 충공도(忠公道)를 다시 충청도로 개칭하고 경기도에 이속됐던 4개 현도 충청도로 이속시켰다. 선조 29년(1596년)에는 평택현을 직산현에 합부시켰으나 주민들이 복구를 요구함에 따라 광해군 3년(1610년)에 회인현(懷仁縣)과 함께 다시 복구됐다. 이처럼 자주 그 행정구역이 바뀌게 된 것은 팽성이 경기도와 충청도 사이의 위치한 입지적 조건과 재지세력의 부재로 그 지역을 지키고자 했던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415년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보면 호수(戶數)가 179호이고 인구는 704명이며 토지는 2천234결(結)이었다. 이에 비해 1740년대의 ‘해동지도(海東地圖)’에는 호수는 1천379호로 약 7.7배 증가한 반면, 토지는 1천879결로 오히려 감소됐다. 이러한 현상은 1760년대의 ‘여지도서(輿地圖書)’에서도 확인된다. 결국 인구는 늘어나지만 토지는 오히려 감소하는 현상이 보이는 것이다. 이는 평택의 전답이 대체로 여러 궁가(宮家)의 면세 등의 이유로 세금을 내지 않는 전답이 반이나 돼 실제 세금을 내는 전답의 규모가 상당히 작았기 때문이며 이에 따라 재정도 궁핍했다. 이러한 상황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복구책에 힘입어 전답이 개간되기 시작해 조금씩 늘어났지만, 줄어드는 경우도 있었다. 이후 고종 33년(1896년)에 13도제가 성립되면서 평택군은 충청남도로 편입됐다.

1914년에 시행된 조선총독부령 제111호 ‘도(道)의 위치관할 구역 및 부군 명칭 위치 관할 구역’에 따라 지방행정구역이 대대적으로 바뀌게 됐다. 이때 평택군 동부는 경기도 진위군 부용면으로, 서부는 진위군 서면으로 편제되면서, 평택군이 경기도로 편입됐다. 1932년에는 진위군 부용면과 서면을 합쳐 팽성면으로 해, 평택으로 바뀐 지 약 1천 년만에 다시 그 이름이 되찾았다. 다시 1938년에 진위군을 팽택군으로 개칭함에 따라 팽성면은 이제 거꾸로 팽택군에 속하게 됐다. 1986년 평택군 평택읍이 평택시로 승격하면서 평택지역은 평택시, 송탄시, 평택군의 3개의 행정구역으로 분리됐고 다시 1995년 5월10일에 통합돼 현재의 경기도 평택시가 확정됐다.

따라서 유달리 부침이 많았던 팽성이 부자동네로 살았던 일은 거의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 지방 유교정치를 대표하는 시스템인 객사(客舍)가 유지된 점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조선시대 중앙집권제의 지방 실천 장소, 객사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객사(客舍)는 사신(使臣)의 숙박시설 및 접대 장소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후 유교적인 질서를 구현한 조선시대에는 그 기능이 다소 변했다. 바로 유교적 질서에 따른 중앙집권적 통치체제가 완비되면서 각 지방읍치에서도 이러한 시스템을 보여주는 시설이 필요하게 됐는데, 바로 객사가 역할을 한 것이다. 따라서 사신의 숙소 및 접대라는 기능에 더해 매월 음력 초하루날과 음력 보름인 삭망(朔望)일에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객사의 정청(正廳)에 모시고 궁궐을 향해 망배(望拜)하는 장소로서의 기능이 부가됐다. 따라서 객사는 지방에서 중앙집권 시스템이 보이는 가장 중심적인 건물군이자 중요한 의식장소가 됐다. 따라서 이러한 시스템의 완성을 위해 지방에서 객사를 수리 내지는 건립했을 것이다.

객사의 기본적인 구성은 왕을 위한 의례를 행하는 장소임과 동시에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의 유숙을 위한 기능이 충족돼야 했다. 따라서 중앙에는 3칸의 정청을 둬 전패(殿牌) 또는 궐패(闕牌)를 모실 수 있도록 하고 그 좌우에 온돌방과 마루로 구성된 2칸 내지는 3칸의 동헌과 서헌을 두어 관리의 숙박과 접대가 가능하도록 했다. 또한 객사로의 출입을 위해 남쪽에 가운데가 높은 솟을대문을 설치했고 경우에 따라 동·서헌 앞에 낭무(廊?) 또는 익랑(翼廊)을 설치하는 경우도 있었다.

팽성읍객사의 역사

팽성읍객사는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팽성에 위치한 객사다. 언제 건축됐는지 알 수 없지만 ‘평택지(平澤誌)’의 기문(記文)편 중 송윤경(宋胤卿)이 기록한 ‘객사조성각석기(客舍造成刻石記)’가 남아 있다. 내용에는 송윤경이 1485년에 평택현감이 돼 객사를 새로 만들고자 해 1488년에 완성한 기사가 있다. 기사의 내용 중 규격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고 해 완전하게 구성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이러한 부족함 때문에 조선 중종대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객사에 관한 기록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영조대에 간행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客舍 十四間’으로 기록돼 있다. 역시 영조대에 간행된 ‘평택읍지(平澤邑誌)’에는 심익선(沈益善·1662~1665년)군수 때 규모를 넓혀 동헌(東軒)·서헌(西軒)·중대청(中大廳) 등이 갖춰졌으며 그 뒤 훼손된 부분을 이무영(李舞英·1700~1706년) 군수가 새로 고쳤다고 한다.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양조장으로 개조 사용됐고 이후 주택으로 사용되던 객사를 평택군이 매입해 1994년에 그 면모를 일신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 정청의 지붕(윗 사진). 용마루 양쪽 긑의 용두상이 건물 위상을 높여주고 있다. 아래 사진은 정청 지붕 안쪽 초익공 모습.
팽성읍객사의 위치와 구성


조선시대 객사는 일반적으로 읍성 내에서 가장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이는 망궐례(望闕禮)를 행하는 장소로 마을 수령들이 업무를 보는 동헌(東軒)보다 그 위계가 더 높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팽성읍객사의 위치는 이러한 내용과 조금 차이가 있다. 대체로 평탄한 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평택 주위에는 높은 산이 없고 부용산(芙蓉山)이 주산이다. 이 주산을 북쪽에 두고 주요 시설이 배치되는데 중앙에 향청, 내아, 동헌, 사창의 건물이 위치하고 그 남서쪽으로는 향교가, 남동쪽으로 객사가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위치는 객사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그만큼 적었던 측면도 있겠지만 이미 중심부에 관아건물이 자리잡고 있고 나중에 객사를 만들면서 관아를 중심으로 향교와 대칭적인 위치에 배치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특히 객사를 구성하고 있는 건물도 중대청과 동헌, 서헌과 문간채만 있어 이러한 배치도 동서낭무(廊?)가 있고 내·외삼문을 모두 갖추고 있던 다른 객사보다는 그 격이 떨어짐을 알 수 있다.

원래 작은 규모였지만 현종(재위 1659~1674년)때 크게 중창했고 영조 36년(1760년)과 순조 1년(1801년)에 중수했다. 근래 만든 8칸의 대문채가 있고 좌우로는 담이 이어져 객사 전체를 둘러싸고 있다. 대문채를 들어서면 중앙에 객사가 있는데 3칸의 정청을 중심으로 역시 3칸의 동헌과 서헌으로 구성돼 있다.

정청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전퇴를 두고 남면에 홍살문을 설치해 개방하고 나머지 면은 막혀있는 감실형의 실을 구성했다. 이 전퇴를 만들기 위해 중앙칸은 전면에 고주를 세웠는데, 고주의 전후로 퇴량과 대들보를 설치했다. 그러나 측면은 고주를 중심부에 설치해 종보를 직접 받고 있으며 고주의 양쪽에 보를 설치해 보 위에 각각 작은 기둥을 둬 종보의 무게를 받도록 했다. 또한 전면에는 초익공을 뒀으나 후면에는 보머리를 숭어턱으로 만들어 단순하게 처리했고 지붕 전면에는 부연이 있는 겹처마, 후면은 부연이 없는 홑처마로 구성했다. 전체적인 지붕형식은 맞배지붕으로 단순하게 처리했지만 용마루 양쪽 끝에 용두상(龍頭像)을 둬 건물의 위상을 높여주고 있다. 이 용두상은 다른 객사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것이다.

동헌과 서헌은 정청을 가운데 두고 대칭적인 구성을 하고 있다. 정청과 가까운 곳에 온돌방은 1×1.5칸을 두고 그 옆으로 우물마루 2×2칸을 구성했다. 온돌방은 앞에 툇마루를 놓았고 마루와 연결되는 문에는 중간부분에 문대를 설치했다. 아궁이는 정청 사이의 좁은 연결공간에 있고 굴뚝은 뒤에 배치됐다. 마루는 높은 기둥이 없는 5량형식으로 전체 통간이다. 그러나 마루와 방의 경계부분에 높은 기둥을 둬 방 앞에 반칸의 툇마루를 뒀다. 기둥부분의 머리양식은 민도리 형식이다. 지붕형식은 정청과 맞댄 부분은 맞배지붕이지만, 반대편은 합각지붕이다. 이 합각지붕을 만들기 위해 마루 측면 기둥과 대들보를 연결하는 충량을 설치하고 그 위에 합각지붕의 구조를 가릴 수 있는 눈섭반자를 설치했는데, 우물반자 형식으로 꾸몄다.

▲ 경기도문화재돌봄사업단 관계자가 서헌마루에 들기름을 바르고 있는 모습.
객사의 현대적 운용


팽성읍객사를 찾아간 날에 처음 맞이해준 것은 문간채 밖에 세워져 있는 포스터이다. 포스터에는 이러저러한 행사들을 안내하고 있어, 객사의 새로운 운영을 보여주고 있었다. 마침 이 날은 경기도문화재돌봄사업단에서 서헌 마루에 들기름을 바르고 있었다. 현대식 마루에는 니스를 칠하지만, 전통 마루에는 들기름을 발라 그 아름다움과 내구성을 유지할 수 있다. 평상시에는 관리상의 문제로 문이 닫혀있지만 들기름 바르는 덕에 마침 열려 있어 여기저기를 살펴볼 수 있었다. 문간채는 현재 사용이 되는 것으로 보이지 않지만 각 방마다 깨끗하게 정리돼 있었다. 다만 문간채와 객사 사이 마당에는 잡초만 무성했다. 베어낸 지 2주 만에 또 이렇게 자란다고 하니, 돌봄단이 열심히 관리하지만 잡초가 자라는 속도가 훨씬 빠른가 보다. 담장 내에는 감시카메라와 소방설비가 잘 갖춰져 있었다. 정청은 이제 전패나 궐패는 없지만 홍살칸 안은 깨끗하게 유지돼 있었다. 동·서헌도 잘 정리돼 있어 지금 당장 숙소로 사용해도 될 정도이다.

충청도에서 다시 경기도로 돌아온 지난한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팽성읍객사는 이제 이렇게 관리와 관심을 받으며 무심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아무쪼록 새로운 현대적인 의미의 객사로 시민들이 모여 즐기는 새로운 장소로 거듭 태어나길 기대해본다.

택경백 국립문화재연구소 건축문화재연구실 

김동성기자/estar@joongb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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