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경기천년, 경기 역사 문화의 전개] (17) 회암사, 무학대사와 그 스승들의 승탑

회암사는 고려 충숙왕 시절 1328년 지공이 창설한 사찰로 전하고 있는데, 이후 나옹선사가 1377년에 중흥불사를 진행해 대사찰로 발전했다. 이후 조선의 건국과 함께 태조의 스승인 무학대사가 주석했고 태조가 왕사의 접견을 위해 7차례나 행차했던 곳이었다. 뿐만 아니라 태상왕으로 물러난 태조가 한동안 머물기도 한 곳이다. 태조는 1402년(태종 2년)에 회암사에 머물며 대규모의 중건을 진행했을 뿐만 아니라, 무학대사를 위해 생전에 미리 승탑을 조성하게 했다. 이후 무학대사가 입적하자 탑에 안치하고 탑비를 세워 위로했다. 그 후 불교계에 대한 탄압이 가중됐지만 회암사는 예외로 특별조치가 취해지며 사세를 유지했으며 1472년(성종3년) 성종대에 다시 한 번 중창이 시도됐다. 중종대에 회암사에 대한 왕실의 보호가 쇠퇴했으나 다시 명종 즉위와 함께 문정왕후에 의해 보호조치가 취해졌다. 보우의 회암사 주지 취임과 함께 회암사는 다시 왕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는 사찰이 됐다. 임란 중에 많이 파괴됐고 순조대인 1800년 대에 폐사된 것으로 전해진다.

회암사의 초창과 관련된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나 회암사 중수기에 의하면 인도 출신 승려 지공(指空)이 천력연간(1328년∼1329년)에 고려에 머물면서 “천축의 아란타사와 같고 가섭불 때의 큰 도량과 같다”고 해 중창했다. 이후 1376년경에는 나옹선사가 대대적으로 중창한 결과 1만여 평에 달하는 넓은 사역을 지니고 있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목은(牧隱)이 찬한 ‘천보산 회암사 수조기(天寶山檜巖寺修造記)’에 의하면 모두 262칸의 건물과 더불어 높이가 15척이나 되는 부처가 7구, 10척 높이의 관음상이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넓은 사역과 수많은 건물과 불상이 존재했던 사지에 대해서는 1998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경기도박물관과 기전문화재연구원에 의해 발굴조사가 진행된 바 있다.

사역(寺域)내에는 회암사지 당간지주를 비롯해 맷돌(경기도 민속자료 제1호), 회암사지 승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2호), 당간지주(양주시 향토유적 제13호)등 다양한 석조 조형물이 건립돼 있다. 이들 석조물들은 발굴조사를 통해 드러난 회암사의 규모와 걸맞게 고려시대 후기로 부터 조선시대 전기에 걸쳐 조성됐다. 더불어 대부분의 유물은 사찰과 밀접한 연관을 맺었던 지공·나옹·무학대사와 연관된 것들이 대부분이기에 조선전기 석조 조형물의 일단을 파악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더욱이 무학왕사비 음기(陰記)에 의하면 “동국의 삼조사(三祖師)인 지공(指空)·나옹(懶翁)·무학(無學)의 부도와 사적비가 양주의 천보산 북쪽 벼랑에 있으니”라 기록돼 있어 고려말 조선초기 선종을 이끌었던 선사들의 승탑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들은 회암사의 동쪽 능선을 따라 상단으로부터 나옹·지공·무학대사의 승탑이 열을 이루며 배치되고 있다.

지공선사부도 및 석등(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9호)

지공선사부도 및 석등은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의 양식을 따라 건립됐다. 팔각의 지대석 상면에 일석으로 조성된 기단을 놓았다. 이중 중대석은 배가 부른 고복형(鼓腹形)의 형식을 보이고 있다. 탑신은 원구형으로, 표면에는 아무 조각이 없다. 옥개석은 낙수면의 경사가 완만하고 합각선이 두툼하게 표현됐다. 처마는 전각(轉角)에 이르러 살짝 반전돼 안정감 있는 자태를 보이고 있다. 상륜부에는 5개의 보륜(寶輪)과 보주(寶株)가 하나의 석재로 조성됐다. 이같은 승탑의 전면에는 석등이 건립돼 있다.

석등은 평면 방형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 기단부의 구성 중 상대석은 하단을 경사지게 처리했다. 화사석은 2매의 판석을 놓아 구성해 화창(火窓)은 앞뒷면에만 개설돼 있다. 옥개석은 사모지붕의 형태로 낙수면의 경사가 완만하고 합각선이 두툼하게 표현됐다. 추녀는 수평을 유지하고 있다. 정상에는 복발(覆鉢), 보륜(寶輪), 보주(寶株)가 있다. 인근에 위치한 탑비에 (전략)壬子九月十六日 以 王命樹浮屠於檜岩寺(후략)”라 기록돼 있는 점으로 보아 1372년에 부도와 함께 건립된 것으로 판단된다.

나옹선사부도 및 석등(유형문화재 제50호)


지공선사 부도의 상단에 위치하고 있다. 부도는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의 양식을 따라 건립됐는데 팔각의 지대석 상면에 기단을 놓았다. 기단의 각 부재는 하나의 석재로 이뤄졌는데 중대석은 배가 부른 고복형(鼓腹形)의 형식을 보이고 있다. 원구형으로 조선된 탑신의 표면에는 아무 조각이 없다. 옥개석은 낙수면의 경사가 완만하고 합각선이 두툼하게 표현됐다. 처마는 전각(轉角)에 이르러 살짝 반전됐다. 상면에는 4개의 보륜(寶輪)과 보주(寶株)가 하나의 석재로 조성된 상륜부가 있다.

석등은 평면 방형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 기단부의 각 구성은 각각 하나의 석재로 이뤄졌는데 모두 방형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화사석(火舍石)은 2매의 판석을 놓아 구성해 화창(火窓)은 앞뒷면에만 개설돼 있다. 화창의 전면에는 기둥이 모각돼 있다. 옥개석은 사모지붕의 형태로 낙수면의 경사가 완만하고 합각선이 두툼하게 표현됐다. 추녀는 완만한 U자형을 그리다 전각(轉角)에 이르러 반전(反轉)되고 있다. 정상에는 연화문이 새겨진 받침과 복발(覆鉢) 및 보주(寶株)가 있다. 부도 앞에 건립된 선사의 탑비가 1381년에 건립된 점으로 보아 석등 역시 비슷한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 무학대사승탑
회암사지 무학대사승탑(보물 제388호)


조선초기의 왕사였던 무학대사(1327년∼1405년)는 1398년에 주지직을 사임하고 용문사로  들어갔으며 1402년 다시 회암사 주지에 임명됐으나 다음해 물러나 금강산 진불암으로 들어가 머물다가 1405년 4월 금장암으로 옮겨 그 곳에서 9월11일에 입적했다. 태조실록 및 회암사 묘엄존자 무학대사비 등에 의하면 태조는 1397년 경기도 백성을 징발해 미리 무학대사의 부도를 조성했다. 1405년 입적한 이후 1407년에 회암사의 탑에 안장했고 1410년 7월 시호(諡號)를 내렸다고 기록돼 있다.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의 양식을 지닌 승탑으로 외곽에는 팔각형의 난간을 마련했다. 난간은 장대석을 사용해 2단의 기단을 쌓고 각 모서리에는 상면에 보주(寶珠)가 있는 방형의 동자주(童子柱)를 세웠다. 동자주의 사이에는 장방형의 판석을 끼우고 상면에 난간주를 돌렸다. 부도의 지대석은 8각의 각 면에는 굵은 구름문양을 새기고 있다. 하대석은 편구형으로 상면에 복엽8판의 복연(伏蓮)을 새겼는데 각 모서리의 끝에는 귀꽃이 조식돼 있다. 중대석은 고복형(鼓腹形)으로 각 면에는 내면에 화문이 있는 안상(眼象)이 조식돼 있다. 상대석의 하단에는 복엽8판의 앙연(仰蓮)이 조식됐고 각 면에는 장방형의 액(額)내에 당초문을 조각했다. 탑신석은 원형(圓形)으로 구름과 용을 가득 조각했는데 용의 머리와 비늘 등이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다. 옥개석은 낙수면의 경사가 완만하고 합각선의 끝에는 용머리가 장식돼 있다. 정상에는 연봉형 보주를 놓았다. 무학왕사비 음기(陰記)에 의하면 “동국의 삼조사인 지공·나옹·무학의 부도와 사적비가 양주의 천보산 북쪽 벼랑에 있으니, 무학의 비는 태종 10년(1410년) 경인에 임금께서 문신 변계량에게 명해 글을 짓게 하고 공부가 써서 두 왕사의 탑 아래에 세웠는데 지금(순조 때)은 절은 폐허되고 비만 남아 있다. 비석이 파괴됐으므로 순조 28년(1828년) 왕명에 의해 예문관 대제학 김이교가 전말을 추기(追記)해 다시 세웠다”고 기록돼 있다. 전면에는 쌍사자석등(보물 제389호)이 건립돼 있다.

이 석등은 전체적으로 평면 방형의 형태를 보이고 있는데 간주석에 2마리의 사자가 배치돼 쌍사자석등이라 불리우고 있다. 방형의 지대석 상면에는 8판의 단판복연(單瓣伏蓮)을 조각했는데, 내면에는 여의두문을 조식하고 있다. 간주석에는 2마리의 사자가 마주보며 상대석을 받치고 있다. 양 사자는 뒷발을 웅크려 하대석을 딛고, 앞발과 머리를 올려 상대석을 떠받치고 있는 형상이다. 상대석의 하면에는 각형 1단의 받침이 조출됐고 측면에는 복엽 8판의 앙연(仰蓮)이 조식됐다. 화사석은 2매의 판석을 세워 구성해 2면에만 화창(火窓)이 개설됐다. 화사석의 네 모퉁이에는 원형 기둥이 표현돼 있다. 옥개석은 사모지붕의 형태로 각 모서리에는 합각선이 두툼하게 표현됐다. 정상에는 2단의 원좌(圓座) 상면에 보륜(寶輪)과 보주(寶株)를 놓았다. 무학대사의 입적이 1405년임을 보아 조선시대 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같은 쌍사자석등은 통일신라 말기부터 조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충북 중원 청룡사지쌍사자석등과 더불어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건립됐음을 알 수 있다. 더불어 이 석등의 가장 큰 특징인 사자의 형상은 단순화됐지만, 정통적인 쌍사자석등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특히 고려시대에 건립된 고달사지쌍사자석등에서 보여준 변화를 따르지 않고 있어 시공을 넘어 연결되는 문화의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주는 작품이라 생각된다. 뿐만 아니라 화사석에서 기존의 전형적인 양식을 탈피해 전·후면에만 화창을 개설하고 모서리에 원주를 모각한 양식은 회암사의 석등에서만 볼 수 있는 특수한 면으로 생각된다. 더욱이 옥개석 하면에 모각된 목조건축의 양식은 다른 석등에서는 표현되지 않았던 수법이어서 더욱 주목된다. 이를 보아 삼국시대 이래 건립된 석등의 양식은 목조건축에 기반을 두고 있음과 동시에 일반형이던 특수형이던 구분없이 모두 적용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의의

회암사지에서는 먼저 고려말 조선초에 있어 선종의 3대선사라 일컫는 지공·나옹·무학대사의 부도를 한 곳에 건립하고 있다는 점에 의의를 둘 수 있다. 즉, 산등성이의 가장 윗쪽으로부터 차례로 배치하고 있어 마치 가계묘와 같은 배치를 보이고 있다. 이 같은 예는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희귀한 일례라 하겠다. 더불어 무학대사 승탑에서는 통일신라시대 이래 팔각원당형 승탑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탑신을 원구형으로 변화시켜 구름과 용을 가득 조각한 수법등은 조선초기 석조문화의 창의성과 우수성이 돋보이는 예라 하겠다. 문화의 우수성이란 새로운 것의 창안에서도 찾을 수 있지만 앞 시대의 것을 계승 발전시키는 재창조가 더욱 어려운 일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나라 승탑의 발달사상에서 무학대사승탑이 차지하는 위치는 타 지역의 그것에 견주어 뒤지지 않았던 것으로 믿어진다. 더불어 석등에 있어서는 양식적인 면을 제외하더라도 위치상의 문제에 있어 중요한 변화가 이뤄지고 있다. 즉, 백제의 미륵사지에서 조성되기 시작한 석등은 가람배치상에서 금당이나 석탑의 전면에 위치하는 것이 법칙이었다. 그러나 회암사에 건림돼 있는 석등은 승탑 앞에 위치하고 있어 장명등으로의 이행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이같은 현상은 타 지역에서는 보기 힘든 유례로서 새로운 창안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결국 회암사의 석등이 지닌 위치상의 문제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대부분의 묘역에 장명등을 건립하는 모델을 제시한 것으로 생각된다.

박경식 단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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