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경기천년, 경기 역사 문화의 전개] (18) 고려시대부터 이어온 명가 '용인 이씨'

▲ (왼쪽부터) 조선시대때 부자(父子)가 정승을 지낸 이세백 이의현과 6판서 중 한명인 이재학의 초상.
용인의 토성사족(土姓士族)인 용인이씨

용인이씨는 시조 이길권(李吉卷)으로부터 현재까지 약 1천100년 간 지속된 경기도의 뿌리 깊은 명문가이다. 고려시대부터 용인지역을 대표하는 토성으로 자리를 잡았고, 조선시대에는 500여 년 간 고관대작을 배출했으며 대제학·문형·청백리도 적지 않다.

‘신증동국여지승람’ 10권, 용인현의 성씨편에 용인현의 성씨로 ‘진(秦)’ ‘이(李)’ ‘송(宋)’ ‘용(龍)’ ‘엄(嚴)’씨가 소개돼 있다. 이 가운데 용인지역의 토성사족(土姓士族)으로 명맥을 계승해온 가문은 용인이씨 뿐이다. 추계추씨(秋溪秋氏)도 용인시 양지면 추계리에 본관을 둔 성씨이지만 실재하지 않는다. 용인이씨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기까지 문과 급제자를 지속적으로 배출하면서 중앙으로 진출했고, 이를 토대로 용인지역에서 명문거족으로 자리매김했다.

용인이씨의 시조 이길권(880~?)은 용인이씨 세보(世譜)에 의하면 신라 헌강왕 6년(880년)에 용인에서 태어난 것으로 전한다. 성품이 강직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남달리 학식과 재능이 뛰어났다. 특히 천문지리에 밝았다. 도선대사(道詵大師)와도 교분을 나누며 경륜을 닦았다고 한다. 훗날 왕건이 고려를 건국할 때 큰 도움을 줘 개국공신의 예에 따라 대우했다. 왕건은 그의 인품을 추앙해 “구성백 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 숭록대부 태사(駒城伯 三韓壁上功臣 三重大匡 崇祿大夫 太師)”의 품계를 하사했다. 이길권은 평소 부귀영화를 탐내지 않고 청렴하게 살았다고 하며 만년에는 고향인 용인으로 내려와 여생을 보내다가 고려 목종 때 세상을 마쳤다. 목종은 그에게 ‘안의(安毅)’라는 시호를 내렸다. 후손들도 그의 숭고한 뜻을 흠모해 시조로 모시고 그가 살았던 용인을 본관으로 정했다.

이길권의 후손들 가운데 2세 헌정(憲貞), 3세 정(靖), 4세 회(懷) 등이 개국공신의 후예로 주요 관직을 지냈다. 이들이 고려 때 관직에 있었음은 ‘고려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후 고려 중기, 후기에는 쇠미해졌다가 11세 이유정(李惟精)에 이르러 다시 가세가 일어났다. 이유정은 공부낭중(정5품)을 지냈다. 12세 이석(李奭)은 합문지후(종6품), 13세 이광시(李光時)는 동지밀직(종2품)을 지냈다.

▲ 용인이씨 발상지비
고려후기 용인이씨 가문을 일으킨 이광시(李光時)

시조 이길권 이후 용인이씨 가문의 성세를 부흥한 인물은 12세 이석(李奭·1225년~1293년), 13세 이광시(李光時·1268년~1345년)이다. 이석은 시강학사를 지냈으며 고려 원종을 모시고 원나라 세조쿠빌라이에게 세폐를 줄여줄 것을 건의해 받아낸 인물이다. 이 때 공적을 인정받아 태부가 됐다.

이광시는 고려가 원나라의 지배하에 있었던 기간에 판전의사사(정3품)을 지냈으며, 원나라를 돕는 세력에 맞서다 여러 차례 귀양을 다녀온 인물이다. 일찍이 충선왕2년(1310년)에 김사원(金士元)과 함께 황후를 책봉한 조서를 반포하기 위해 원나라 사신으로 온 팔찰(八?)에 의해 투옥된 바 있다. 충숙왕 때는 왕을 대신해 국청사에서 대반일(大半日)에 향촉을 바쳤다고 한다. 그가 밀직사의 우대언을 역임했다는 사실에서 그의 정치적, 사상적 성향을 가늠할 수 있다. 이광시의 배위는 연창군부인 죽산박씨이며 계배는 행주기씨인데 이들 가문과의 통혼은 그의 관직 생활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외조부 한강(韓康)은 충렬왕 때 판삼사사와 찬성사(2품)을 지낸 인물이다.

이처럼 고려후기에 이석-이광시 부자의 관직과 활동, 그리고 타문벌과의 통혼 관계는 용인이씨가 조선초기의 거족으로 거론될 수 있는 밑바탕이 됐다. 성현의 ‘용재총화’에서 15세기 당대의 거족으로 76개 성씨를 거론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용구이씨(龍駒李氏)는 13번 째의 거족으로 기록돼 있다. 참고로 용구(龍駒)는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용인으로 개칭됐다.

▲ 부원군 이중인 시제
고려말 ‘두문동 72현’으로 추숭되는 이중인(李中仁)

용인이씨의 중시조인 14세 이중인(李中仁·1315년~1392년)은 판도판서인 이광시와 덕양부부인 행주기씨의 5남 중 3남으로 태어났다. 배위는 천안전씨로 대제학 전신(全信)의 딸이다. 공민왕 때는 홍복도감의 판관을 지내며 유교와 불교의 예제에 밝아 공민왕비인 노국대장공주의 장례를 집행하기도 했다. 고려가 멸망하던 당시에는 개풍군 광덕산의 두문동에 들어가 나오지 않음으로써 이른바 ‘두문동 72현’ 가운데 한 사람이 됐다. 조선건국 세력들이 고려조 인사들의 동조를 얻기 위해 관직을 제수하고 회유할 때 구성부원군(驅城府院君)에 봉작됐으나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이중인의 장남인 15세 이사영(李士穎·?~1396년)은 고려시대 문과에 급제해 형조전서 등을 역임했다. 포은 정몽주가 피살된 후, 이에 연루돼 이색·이숭인 등 56명과 함께 남원에 유배됐다. 그리고 부친의 유훈에 따라 이사영은 물론 16세 이백찬(李伯撰·1359년~1415년)도 조선왕조에 벼슬하지 않았다. 이후 17세 이승충(李升忠·1398년~1481년)부터 용인이씨의 큰댁 참판공파를 이루며 용인시 수지구 일대에서 600여 년 간 동족마을을 형성해 전통을 잇고 있다.

이중인의 차남 15세 이사위(李士渭·1342년~1402년) 역시 부친의 유훈에 따라 조선왕조에 벼슬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고려유신들의 간곡한 원류 때문에 개성유수(종2품)를 맡게 됐다. 훗날 부친의 뜻을 지키지 못했음을 못내 한스럽게 여기며 지냈다고 한다.

이사위의 장남인 16세 이백지(李伯持·1361년~1419년)는 태종 때 청백리에 녹선됐다. 그는 고려말 우왕11년(1385년)에 문과 급제해 태종의 신임을 받아 성주목사·승정원 대언·강원도 관찰사를 지냈고 세종 때에는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다. 이백지는 이수강(李守綱·1378년~1458년)·수령(守領)·수상(守常)·수례(守禮)·수의(守義) 등 5남을 뒀다. 17세인 이들에 이르러 용인이씨는 8개파로 분파됐다. 이길보(李吉補)는 백지의 증손으로 두 차례에 과거에 급제했으며 벼슬이 경기관찰사에 이르렀다. 아우 우보(祐補) 역시 과거에 급제해 벼슬이 홍문관직제학에 이르렀다. 이수강의 손자 3명, 즉 이기(李基)·이적(李績)·이윤형(李允亨)이 문과 급제한 이래 조선왕조에서 무려 70명에 가까운 급제자를 배출했다. 그 뒤로 부자가 정승을 지낸 이세백(李世白), 이의현(李宜顯)과 같은 인물이 있으며, 세 명의 재상과 네 명의 판서를 한 집안에서 배출하기도 했다. 조선후기에는 이숭우(李崇祐) 이재학(李在學) 이규현(李奎鉉) 이참현(李參鉉) 이원명(李源命) 이돈상(李敦相)이 모두 판서를 지내 ‘6판서집’으로 불려지기도 했다. 중종 때 성리학자인 이담(李湛), 선조 때 명장인 이일(李鎰), 그리고 철종 때의 화가 이재관(李在寬) 등이 모두 용인이씨의 후예들이다.

▲ 용인이씨 족보
용인 이씨의 발상지인 ‘잔다리’ 마을

용인이씨는 이중인 이후 세대에서 11개파로 분파됐다. 그리고 이사영이 용인시 수지구 풍덕천동에 자리잡은 이후 현재까지 500여 년 동안 집성촌을 이뤄 살고 있다. 모현면 왕산리, 포곡면 신원리와 유운리 일대에도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용인이씨가 처음 용인에 자리 잡았던 곳은 지금의 기흥구 영덕동 잔다리 마을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시조 이길권의 작호가 ‘산성군(山城君)’ 또는 ‘구성백(駒城伯)’으로 칭해졌다는 점이 그 같은 개연성을 시사한다. 9세인 이인택(李仁澤)의 처가 ‘은성택주(殷城宅主) 용구진씨(龍駒秦氏)’라는 사실도 방증 자료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용인현의 대표적인 성씨로 진씨(秦氏)가 수록돼 있는데, 이인택의 처가 바로 용구진씨이다. 용인이씨와 용구진씨가 혼척을 맺었다는 사실은 두 가문이 모두 당대 용인지역의 호족이었음을 시사한다.

용인이씨의 세장지인 용인시 기흥구 영덕동을 속칭 ‘잔다리’라고 한다. 이는 ‘자은교(慈恩橋)’를 우리말로 부른 명칭이다. ‘잔다리’ 지명은 이인택과 연관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고려 인종 무렵 이인택은 무려 아홉 군의 군수를 두루 역임했으며 가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었다. 그의 선정은 온 고을의 백성을 감동케 해 널리 칭송됐다. 벼슬에서 물러나 지금의 잔다리 마을에 살았을 때 인근의 백성들은 그를 위해 집 앞에 다리를 놓았다. 다리가 완성되자 모두들 그의 인자한 성품이 자상한 어머니의 손길처럼 따뜻했다고 해서 ‘자은교’라고 불렀다. 그후 ‘자은 다리’로 불려지다 언제부터인가 ‘잔다리’로 변해 전한다.

‘잔다리’는 삼국시대 백제에 속한 용인지방 호족의 거점이요, 고려조와 조선조에는 집성촌을 이뤄 용인을 빛낸 명소였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지금은 잔다리 마을에서도 용인의 대표적 가문인 용인이씨를 만날 수 없다. 거의 모두가 타지로 거처를 옮겼으며, 최근에는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조성돼 있다. 현재 잔다리 마을에는 용인이씨발상지비, 이중인의 묘역과 신도비, 구성재(駒城齋)가 있어 용인이씨의 발상지임을 말해 주고 있을 뿐이다. 구성재는 재실로 용인이씨 문중의 회합이나 시제 때 사용하고 있다. 사당인 추원사(追遠祠)에는 시조 이길권을 비롯해 13세 이광시까지 14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의정부 송산사(松山祠)에서는 이중인 등 6명을 배향하고 있으며 파주통일동산 내 고려대전(高麗大殿)에는 고려후기에 절의를 지킨 이중인-이사영-이백찬 3대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홍순석 강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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