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경기천년, 경기 역사 문화의 전개] (19) 한양과 개경으로 천도(遷都)와 환도

▲ 경복궁 근정전 전경.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한 이후 민심이 안정되지 않자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경복궁을 지었다.
13세기 중반 이후 100여 년동안 몽고 침입과 이후 원나라 간섭을 받는 상황이 지속되면서 황제의 나라임을 자처했던 고려의 삼경제(三京制)는 무너졌다. 1269년(고려 원종 10) 삼경의 하나였던 서경(평양)에서는 서북면병마사에 소속된 영기관(營記官)이었던 최탄(崔坦)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인근 고을과 함께 몽고에 귀부해 서경에는 몽고의 통치기관인 동녕부(東寧府)가 설치됐다. 남경(한양)의 경우에는 그 명목만 유지하다가 1308년(충선왕 즉위년)에 한양부(漢陽府)로 격하됐다. 고려의 도읍은 유일하게 국도(國都)인 개경만 남았다.

그렇지만 고려는 쉽게 다경제(多京制)를 포기할 수 없었다. 이것은 고려의 자존의식과도 관련이 있었다.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한양을 중심으로 천도(遷都) 논의가 계속됐다. 공민왕 때부터 우왕·창왕을 거쳐 공양왕 때까지 한양으로 도읍을 옮겼다가 개경으로 돌아오는 과정이 몇 차례 반복됐다. 또 홍건적·왜구 등의 침입을 막아내며 공을 세운 신흥 무장세력의 리더였던 이성계를 앞세워 정도전 등의 급진파 사대부들이 건국한 조선이 건국 직후 개경과 한양을 오가며 도읍을 옮겼던 것에도 이런 사정 역시 깔려 있었다. 조선의 한양은 그런 과정을 겪고서야 태종 때(15세기 초) 비로소 조선의 국도로 자리할 수 있었다.

풍수도참적인 측면에서 충분하지 못한 개경의 땅기운(地氣)을 보완하기 위해 고려 왕실은 건국 직후부터 많은 방법을 고민해야했다. ‘용의 후손인 고려는 12대가 지나면 망한다(龍孫十二盡說)’ ‘고려는 건국 120년이 지나면 수명을 다한다’ ‘개경의 땅기운이 언제 다할 것이다’는 등의 도참설은 고려 건국 이전부터 있었다. 이런 원초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거나, 대안 제시없이 고려의 사직은 지속될 수 없었다. 물론 그것을 풍수도참적인 측면에서 해석하는 것은 합리적이고 객관적이지 못했지만 국토의 균형적인 이용과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일부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고려 전기부터 남경이 삼경제의 하나로 대두된 것에는 이런 이유도 컸다.

고려 말에는 남경을 비롯한 현재의 경기 일원 곳곳이 천도를 위한 입지로서 주목됐다. 공민왕 때의 강화와 장단, 우왕 때의 연주(연천)와 회암(檜岩, 양주) 등이 그곳이다. 이 장소들이 천도지로 주목을 받게 된 것에는 개경과 가깝다는 지리적인 측면이 우선 검토됐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한양이 천도지(遷都地)로 주목된 배경에는 이미 문종·숙종 때인 11세기 전반부터 남경이 삼경제의 하나로 주목되면서 사회기반시설이 어느 정도 갖춰져 있었다는 점이 분명하게 작용했다. 후에 원나라의 과거시험(殿試)에서 차석까지 했던 이곡(1298~ 1351)은 1320년(충숙왕 7)에 한양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양은 경기 밖의 큰 도시로 예전에는 남경이라 부르며, 동경(경주)·서경과 솥발처럼 우뚝했다. 앞선 왕 때(문종·숙종)에 도읍한 곳이 됐고 산하가 웅장하며 사람들이 번화해 왕경(王京, 개경)에 견줄 만하다.” 한양의 사회간접기반은 굴곡이 있었지만, 일시적으로 건설된 것이 아니라 적어도 200여 년 이상에 걸쳐 형성된 것이었다.

▲ 한양천도를 주도한 태조 이성계의 어진.
고려 말 한양 천도(遷都)와 개경 환도(還都)

천도란 도읍을 옮기는 일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왕조가 바뀌면 천도는 이뤄진다. 전왕조의 도읍은 신왕조의 개창을 반대하며 재기를 위한 세력들의 근거지가 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왕조가 바뀌지 않고 천도를 한다고 하더라도, 옛 도읍은 구세력의 중심지였다. 고려시대 천도 논의와 그 과정에서 실무를 맡았던 관청은 서운관(書雲觀)이었다. 서운관에서는 하늘의 운행을 관측해 천운을 알아내고 여기에서 올지 모를 흉사에 대한 비책(秘策)을 마련했다. 따라서 천명(天命)과 관련한 천도의 실질적인 준비를 여기에서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공민왕 때에는 한양을 비롯해 백악(白岳)·강화·충주·평양 등을 대상으로 천도 논의가 있었고 백악으로의 천도가 실행됐다. 남경으로의 천도 논의는 공민왕을 자문했던 승려였던 국사(國師) 보우(普愚)가 중심이 돼 1356년(공민왕 5)에 처음 이뤄졌다. 이때 있었던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반원(反元) 정책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홍건적의 침입으로 지지부진해지면서 실행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3년여에 걸친 논의는 자연히 그 기반 시설의 준비가 이뤄지게 했다.

우왕 초기 천도 논의의 핵심은 다른 때보다 급격하게 늘어난 왜구의 침입 때문이었다. 서해와 남해, 개경 인근은 물론 물길을 통해 깊숙이까지 침입하는 왜구를 대비하기 위해서 도읍의 입지는 해안이나 강변을 끼지 않은 내륙이 검토됐다. 임진강 상류인 철원과 연천이 그곳이었다. 1378년(우왕 4)에는 좋은 땅기운을 가지고 있는 인근 지역의 땅기운을 빌려 개경의 땅기운을 북돋기 위해 운영됐던 삼소(三蘇, 3곳의 길지) 중에서 북소(北蘇, 북쪽의 길지) 기달산이 있던 장단과 좌소(左蘇, 왼쪽(서쪽)의 길지)인 백악도 거론됐다. 1379년(우왕 5) 가을에는 회암(양주)이 대상으로 떠올라 그 지세를 관찰했다. 여기에는 천도 논의를 통해 불리한 정국을 돌파해 분위기를 일신하려고 했던 우왕의 의지를 반영하고 있었다. 또 1382년 2월에 있었던 서운관에서의 '한양으로의 천도 건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때의 건의는 “깊은 내륙으로 국도를 옮겨 적에게 약점을 보여서는 안 되고, 기근으로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는 상황에서 국도를 옮기는 것은 오히려 민원만 살뿐”이라는 당시의 권력자였던 이인임의 반대로 실행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경은 항상 개경을 대체할 수 있는 천도지로 주목되고 있었다.

1390년(공양왕 2) 9월, 한양으로의 천도는 마침내 이뤄졌다. 이때도 천도에 앞서 ‘예성강의 물빛이 붉고 끓어오르기를 3일 동안 계속했다’ ‘태백성(太白星, 별이름)이 낮에 나타나 하늘에 뻗쳤다’는 등의 하늘과 땅에서의 이변(異變)이 보고됐다. 그리고 천도가 단행됐지만 다음해 2월 개경으로 환도함으로써 한양은 고작 5개월 동안만 고려의 도읍으로 자리했다. 이때의 천도가 공양왕을 압박하기 위한 이성계 세력이 주도한 것이었는지, 이성계 세력의 압박에서 벗어나 정국 변화를 모색하려던 공양왕이 주도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자세히 말하기 어렵다. 다만 천도 직전에 시내에서 모든 토지문서가 불태워지는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던 국왕이 ‘예부터 왕실에서 전해오던 사전(私田, 개인 소유의 토지)에 관한 법률이 자신에게 이르러 모두 혁파되는 것을 슬퍼할 수밖에 없었다’고 ‘고려사절요’에서는 기록하고 있다. 한양으로의 천도가 어떤 상황에서든 불가피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공민왕 때부터 한양은 천도의 땅으로 주목됐다. 하지만 그것이 실행된 것은 공양왕 때 5개월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 전기부터 삼경의 하나였던 남경(한양)에는 문종 이후 국왕의 행차가 이뤄져 도시가 형성됐으며 고려 말에는 천도할 곳으로 주목돼 사회기반시설이 꾸준하게 정비되고 있었다. 이것은 새로운 왕조 조선의 국도로서 한양이 선정될 수 있었던 우선 조건 중에 하나였다.

▲ 개경 송악산 아래에 있는 옛 고려궁터 만월대를 배경으로 한 김홍도의 '만월대계회도'
조선 초 한양 정도(定都)와 경기제의 확대


고려 말 조선 초 신왕조 건국과 관련해서도 여러 도참설이 민간에 떠돌아다녔다. 대표적인 것이 ‘이씨가 나라를 얻는다(木子得國)’ ‘왕씨의 500년이 지난 후 이씨가 나라를 세워 한경(漢京)에 도읍한다’ ‘송도(松都)는 망한 군신(君臣)의 땅’이라는 것 등이다. 특히 두 번째, 세 번째의 도참설은 조선 건국 20년여 년이 지난 태종 때 한양으로의 천도에 대한 신료들의 반대가 극심했을 때 도읍을 옮기려는 논리로 적극 활용됐다. 반면에 건국 직후 2차례에 걸친 반란이 일어나는 등 불안한 정국이 운영되자 ‘이씨의 운수는 30년뿐’이라는 부정적인 참언도 떠돌았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신왕조 건국 후 공양왕의 한양 천도에 대해 “내 몸까지 위태하게 했다”고 해 그것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지만은 않았다는 사실을 회고했다. 그리고 또 “역성혁명을 한 군주는 반드시 도읍을 옮긴다”고 해 자신이 몸소 계룡산으로 가서 신도읍지를 살펴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물론 신왕조의 도읍 후보지로는 계룡산 이외에 무악·선점·송림·도라산·적성(파주) 등 다양한 곳이 거론됐다. 태조는 대부분의 장소를 친히 가서 살펴봤다. 그리고 한양은 우여곡절을 겪은 후 조선의 도읍으로 결정됐다.

그런데 개경은 신왕조 건국세력들에게도 왕도(王都)로서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정도전·조준 등 건국을 주도한 인물들은 급작스런 천도를 반대했다. 개경이 명당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전왕조의 세력이 남아있어 적지(敵地)와 다름없는 개경을 떠나는 것보다 대부분 천도에 따른 커다란 공역(공사)이 더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조선 건국 후 4년 동안의 논의를 거쳐 태조의 주도로 한양 천도가 결정됐음에도 불구하고 정종 때에는 다시 개경으로 천도했다. 자료에서는 태조 때 한양 천도를 반대했던 개경의 상인들이 상당수 개경에 남아있어 국가 경제의 운용에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후 왕위에 오른 태종은 태상왕(太上王)인 이성계의 한양 환도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개경 또한 포기할 수 없었다. 이때 제시된 것이 고려의 다경제였다. 1402년(조선 태종 2) 다시 신도(新都)인 한양으로 돌아가는 가부의 문제를 의논할 때 개경과 한양의 양경제(兩京制) 운영이 제시됐다. 그런 가운데 1403년 일시적이나마 개경은 또 도읍지가 됐지만, 태조 이성계의 강력한 한양으로의 환도 요구는 정국운영의 측면에서 태종에게 거스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1405년 10월 한양으로의 재천도가 이뤄졌다. 이후에도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조선의 국도로서 한양 정도(定都)는 비로소 마무리됐다.

고려의 경기는 공간적으로 남으로 이동해 조선의 경기를 이뤘고 그 범위는 확대됐다. 개경 중심의 13개 군현 단위가 구성하고 있던 고려시대의 경기가 조선시대에는 한양 중심의 38개 군현으로 구성됐다. 이것은 유교적인 왕화(王化, 왕의 교화)의 우선 시행지역이 표면적으로도 3배 이상 확장됐음을 의미한다.

고려의 국도는 조선의 경기에 편성됐다. 조선 국왕의 교화가 전왕조의 도읍에서 우선적으로 펼쳐졌다. 지리적으로 한양과 가깝다는 점에서 그리됐겠지만 개경에서 고려적인 요소들은 급격하게 조선적인 것들로 바뀌어갔다. 그런 가운데서도 개성에는 유수부(留守府)가 설치돼 경기의 다른 군현과 격을 달리했다. 여기에서 일정하게 고려의 다경제의 영향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김성환 경기문화재단 뮤지엄본부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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