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경기천년, 경기 역사 문화의 전개] (20) 초상으로 남은 고려의 경기인물

초상왕국(肖像王國) 조선- 선명한 독자성과 높은 예술적 완성

사람얼굴이 조형미술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것은 그 역사는 사뭇 오래고 길다. 1971년 세밑에 비로소 그 존재가 알려져 우리나라 회화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반구대 암각화가에서도 동물이 주류이나 인물도 등장한다. 옷을 벗은 인물과 가면(假面) 같아 보이는 세모꼴 얼굴도 등장한다. 동서양 구별 없이 우리 인류가 가장 먼저 그린 소재는 사냥감이며 식량원인 동물이다. 점차 집단이 커지며 국가의 탄생과 더불어 국가를 잘 다스린 성군(聖君)과 포악한 군주인 폭군(暴君)을 그려 존경과 감계의 의미로 인물이 그려진다.

우리 옛 그림을 헤아릴 때 조선왕조 이전의 감상화 범주는 남아 전하는 것들이 매우 드물다. 바탕이 종이와 비단인 서화(書畵)의 보존상 어려움은 석물이나 도자기 그리고 금속으로 된 문화재들과 달리 충식(蟲食)과 화마(火魔)에 노출되면 대안이 없다는 점이다. 주지되듯 삼국통일에 앞선 당, 몽골, 왜, 만주족 등 간헐적인 대규모 외침으로 상당량의 서화와 전적(典籍)이 재로 변하고 말았다.

그려진 목적은 다르나 4세기 이후 근 300년에 걸친 기록화적인 성격이 짙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100기(基)가 넘는 고구려 고분벽화(古墳壁畵), 종교미술로 14세기 이후 것들이 주류이나 160점을 웃도는 고려불화(高麗佛畵)는 각기 고대와 중세 회화사의 흐름을 살필 수 있으며 그 수준 및 화풍을 짐작하게 한다. 이들 그림의 존재는 20세기, 특히 화려하고 섬세한 국외 유출된 고려불화는 1970년대 후반에 들어와 비로소 본격적인 조명이 이뤄졌다. 이들은 조선시대 감상화의 주류를 이루는 수묵담채(水墨淡彩)와 구별되는 화사하며 화려한 진채(眞彩)로 그린 채색화(彩色畵)들이다.

이들 그림과 더불어 우리 그림의 자존심을 대변하는 장르는 다름 아닌 초상화(肖像畵)다. 중국과 일본 등 한자문화권 영역을 넘어 서구와 비교할 때 예술적 완성도와 함께 그림의 됨됨이 등 특징이 뚜렷해 긍정적인 위상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경우 주인공 초상이 말해주듯 제왕의 상은 그 시작이 삼국시대까지 소급된다. 고려시대는 선종(禪宗)의 유행과 더불어 승상(僧像) 제작도 활기를 띠며 빈번해 졌다. 유교를 주체이념으로 건국한 조선왕조는 주인공은 제왕으로부터 공신(功臣), 일반사대부, 승려 등 활발하게 초상이 그려졌다. 다만 왕비를 비롯한 여성의 초상은 부부초상으로 그려진 조선 초 몇 점과 특별한 몇 예를 제외하곤 전무한 실정이다.

고려시대 초상화는 전래된 유작이 몇 안 된다. 이들 또한 한두 예를 제외하고는 후대 옮겨 그린 것들이다. 하지만 다시 옮겨 그릴 때는 초상화의 속성상 이전 것을 그대로 옮김이 일반적인 사실이다. 이에 후대 것들이라도 고려시대 초상의 형식이나 양식을 견지해 화풍에 대한 이해는 어느 정도 가능하다. 고려시대 초상까지는 힘들어도 조선시대 초상들이 오늘날도 계속해서 하나둘씩 새롭게 발굴된다. 이는 문중에서 정성을 다해 그야말로 ‘신주단지 모시듯’ 간직했기 때문이다. 선비의 나라인 조선왕조는 그야말로 ‘초상왕국(肖像王國)’으로 불림에 이의가 없다하겠다.

강민첨 초상
고려시대 인물화-진전제도로 크게 발전

‘한국미술사의 아버지’인 고유섭(高裕燮,1905~1944)이 1935년 발표한 ‘고려화적에 대해’(진단학보 3호)는 81년이 흐른 현재까지도 고려 회화전반에 관한 가장 충실하며 대표적인 논문이다. 전래된 작품이 드문 상황이기에 작품분석보다는 사서(史書)와 개인문집 등 문헌기록 중심으로 살필 수밖에 없는 한계점을 지닌다. 우리나라 중세인 고려시대 그림을 인물화·종교화·자유화·실용화 등 4분야로 나눠 그 흐름의 대세와 특징 및 미감까지 상세히 언급했다. 특히 회화의 시원이 인물화임을 전제로 해 이 분야는 어진·공신·기타 초상으로 분류해 살폈다.

어진은 물론 현존하는 공신상 또한 찾아보기 힘들며 드문 예이나 고려시대 그림으로 전하는 고려시대 초상이 알려져 있다. 삼국시대 고분벽화 내의 주인공 부부와 다수의 인물들, 통일신라 이래 스님들의 진영과 사찰에 봉안한 어진 등에 이어 고려왕조는 특히 초상이 크게 발전한다. 고려왕조에서 어진을 모시는 경영전(景靈殿)과 사찰에 별묘(別廟) 등 진전(眞殿) 제도에 힘입은 바 크다. 도형공신(圖形功臣)이란 명칭으로 화상이 조성됐다. 태조 때 37공신 12장군, 현종·정종·문종·고종 때 등 공신당과 더불어 여러 사찰에 안치한 사실 등을 밝히고 있다.

비록 문헌에 기록만으로 전하나 궐내에 모신 원묘 외에 내전과 궐 밖 사찰 등에 어진을 모신 별묘와 능묘 근처 원찰사찰에도 진전을 뒀으니 모두 34위에 이르는 어진과, 비(妃)의 영정 등 상당량이 제작됐다. 10년 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연 ‘북녘의 문화유산-평양에서 온 국보들’(2006년6월13~8월16일)은 평양 조선중앙력사박물관이 소장한 중요문화재로 북한이 정한 국보 50점, 준 국보 11점이 포함된 총 90점이 출품됐다. 이 전시를 통해 공개된 ‘고려 태조상’은 1992년 태조 왕건릉인 헌릉에서 출토된 청동으로 제작한 조각상으로 드문 예이다.

묘지명을 비롯해 문집에 언급된 초상은 20여 점에 이른다. 귀주대첩을 이끈 강감찬(姜邯贊, 936~1021), 강민첨(姜民瞻, ?-1021)은 ‘이화에 월백하고...’로 시작하는 다정가(多情歌)로 지칭되는 시조 한 수가 잘 알려진 문신이며 학자인 이조년(李兆年, 1269~1343), 고려 말기 최고의 명필로 손꼽히는 이암(李巖), 1297~1364), 두문불출(杜門不出)의 연원인 두문동 72현에 드는 속하는 경은(耕隱) 전조생(田祖生, 1318~1355)과 그의 형 전록생(田祿生), 단심가(丹心歌)를 남긴 만고충신으로 정몽주(鄭夢周, 1338~1392), 조선 건국의 일등 공신으로 조선왕조의 이념과 체제를 정비해 조선왕조 500년 기틀을 다진 정도전(鄭道傳, 1342~1398)·조준(趙浚, 1346~1405)·길재(吉再, 1353~1409)·권근(權近, 1352~1409) 등 10세기 고려 건국부터 14세기 말까지 20명을 고유섭은 각종 문헌에서 찾아냈다. 이 중에는 비록 고려가 아닌 조선왕조에 들어와 이모한 것들이나 초상이 전해지는 이들도 없지 않다.

고려불화에 등장한 왕족 등 귀인들의 형용을 비롯해 몇 안 되나 고려 말 고사인물화, 공민왕(恭愍王, 1342~1386)의 수렵도 잔결(殘缺)에 등장하는 인물 등을 통해 고려시대 인물 묘사기법, 격조와 품격 및 화풍은 짐작은 어느 정도 가능하다.

“선친은 당시 유생들이 공부하는 기풍을 크게 일으키어 임금께서 분묘에 초상화를 그려 모시게 하셨다. 또 한 폭 초상화는 고향에서 빛나니 철마다 제사를 올리면서 큰 공로에 보답한다.”

1318년 <안향 초상>에 부친 아들 안우기의 찬문

▲ 정몽주 초상
고려시대 일반초상-조선 초까지 산 인물들이 주류

전래된 고려시대 인물초상화는 고려 말에서 조선 건국에 참여한 두 왕조에 걸친 인물들이 주류를 이룬다. 문헌에는 임금과 공신 외에 종실, 일반 사대부상, 서인(庶人)인 모친상을 그린 예도 확인된다. 하지만 한때는 고려 것으로 알려진 인물들도 그동안 초상화 연구결과 조선시대 옮겨 그린 것으로 재확인 된 것들도 없지 않다. 이들 초상은 특히 조선에 이르러 성리학과 더불어 충효(忠孝)를 바탕으로 한 조상숭배와 제사(祭祀) 등 국가차원에서 의례가 확립 되면서 초상화의 수용은 급증하게 된다.

고려 때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를 함께 그린 부부상을 비롯해 만고의 충신인 정몽주 등 고려시대 인물이 주인공인 초상화는 고려시대 본으로 여러 차례 옮겨 그려졌다. 주인공의 재세연대로는 가장 올라가는 11세기 초 고려시대 명장으로 여진족과 거란족 격퇴에 크게 기여한 강민첨은 문종 때 공신각에 올랐다. 보물 제588호로 지정된 진주 강씨 문중 소장인 ‘강민첨 초상’은 1788년 지방에서 활동한 화가인 박춘빈(朴春彬)이 그렸음이 화면 내 묵서로 확인되나 고려시대 관복에 우안 8분면인 점 등 고려시대 공신상을 짐작하게 한다.

소수서원에 간직된 잘 알려진 국보 제111호 안향(安珦, 1243~1306) 초상에는 화면 내 아들 안우기(安于器, 1265~1329)가 1318년 지은 찬문이 있다.

또한 1763년 안극권(安克權)이 간행한 ‘회헌선생실기(晦軒先生實記)’에는 이 초상에 대해 여러 사실을 알려주고 있으며 고려시대 것으로 본 이 초상 역시 조선시대 16세기 중엽 이불해(李不害)가 그린 것으로 추정하기에 이르렀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안향 초상’은 엇비슷한 크기로 조선후기에 옮긴 그림이다.

▲ 이제현 초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국보 제110호인 ‘이제현 초상’은 안향의 제자인 이제현(李齊賢, 1287~1367)으로 그린 화가는 아쉽게도 원(元)의 진감여(陳鑑呂)이며 그린 해는 1319년이다. 왕위에서 물러난 이듬해인 1314년 충선왕은 연경에서 머물며 만권당(萬卷堂)을 설치해 진귀한 서적을 모으고 원 학자들과 교류했다. 이때 이제현을 부르자 원으로 간 이제현은 조맹부(趙孟俯, 1254~1322) 등 학자들과 교류했다. 1319년 33세인 충선왕을 모시고 중국 절강성을 여행할 때 이제현은 자신의 초상을 진감여에게 의뢰했다. 그려진 뒤 21년 뒤 쓴 시(詩) 등 제사가 있어 저간의 사항을 알 수 있다.

이제현의 제자로 권근과 변계량 등 후학을 키웠고 말년에 우왕(禑王, 1365~1389)의 사부인 이색(李穡, 1328~1396) 초상은 여러 벌 전한다. 고려 본은 확인이 힘드나 조선 초 1414년 권근(權近, 1352~1409)의 찬문으로 일찍 그려진 사실이 확인되며 1514년 등 후대 이모 본들이 여럿이나 같은 도상인 점이 주목된다. 가장 격조 있는 것은 충남 예산 누상영당에 안치된 한산이씨 대종중본인 보물 제1215호 ‘이색 초상’이다. 우안9분면에 고려 때 사모인 치관(豸冠)에 평상복의 전신교의좌상으로 1654년경 허의(許懿, 1601~?)와 김명국(金明國, 1600~1663이후)이 함께 제작한 것으로 전한다. 이를 비롯해 서울 목은영당과 서천 문헌서원 및 반신상 등 여러 본이 전하는데 같은 초본에서 유래한 것으로 사료된다.

▲ 염제신 초상
청렴결백하고 검소하며 명확한 판단력과 책임감 등으로 다섯 임금을 모신 염제신(廉悌臣, 1304~1382)은 파주 염씨의 중시조이다. 공민왕의 비 노국대장공주(?~1365) 사후 딸이 신비(愼妃)로 책봉돼 공민왕 장인이 된다. 보물 제1097호인 파주 염씨 나주문중 소장 ‘염제신 초상’은 공민왕이 그의 초상을 그렸음이 묘지(墓誌)에 나타나 있는데 이에 공민왕 전칭작으로 전한다. 미 표구 상태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일정기간 기탁됐다. 근자에 장황된 우안8분면 반신상으로 매우 낡고 오랜 화면은 표구 당시 보채가 이뤄졌으나 고려의 특징을 간직하고 있다.

정몽주의 초상은 고려 공양왕 2년(1390)에 그려진 사실이 확인되며 이를 모본으로 전국 서원에 안치됐다고 전한다. 경기도박물관 소장인 전신의자상인 ‘정몽주 초상’은 가정(嘉靖, 1522~1566)대로 시대가 16세기 중엽으로 올라 현존 최고작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1880년 이한철(李漢喆, 1808~1890 이후)이 그린 반신상이 전하나 이 둘 모두 좌안반신상으로 고려와는 구별된다.

이밖에 고려시대 인물로 고흥 성주이씨 문중 사당인 성산사에는 이조년을 비롯해 이포(李褒), 이인민(李仁敏), 이숭인(李崇仁, 1347~1391), 이직(李稷, 1362~1431), 이사후(李師厚) 등이 전하나 고려의 일반작인 우안인 이포 초상, 좌안 화풍 외의 얼굴도상의 형식이 제작시기를 선명히 알려준다.

이원복 문화재위원 전 경기도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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