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이야 어찌 됐건 상관없는가?”라는 질문, 즉 목적과 수단의 정합성 문제는 오랫동안 많은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의 대상이었다. 플라톤과 마키아벨리를 거쳐 칸트와 이사야 벌린에 이르기까지 윤리학의 단골메뉴였던 것이다.

공리주의자들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본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소수가 희생되는 수단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유럽평화라는 공리를 위해 체코의 영토주권을 희생시킨 것이 도덕적으로 하등 문제될 게 없다고 본다. E.H. 카가 말한 것처럼, “(전체주의는) 만약 목적이 절대적이라면 그 목적에 부합되는 수단이 도덕적으로 문제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윤리적 근본주의자들은 공리주의자들과 생각이 달랐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만일 이걸 허용하면 목적 그 자체가 훼손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칸트는 인간이 그 자체로 목적이고, 인간을 수단으로 취급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것으로 용인될 수 없다고 믿었다. 간디나 킹 목사가 제국주의 또는 인종차별 같은 불의에 항거하면서도 폭력을 거부하고 평화적인 수단을 선택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어렵다. 어려운 윤리학 얘기 다 버리고 평균적인 우리나라 사람들의 입장은 어떨까 생각해보자. “원론 따로 각론 따로” 가 아닐까? 우선 원론부터 보자. 원론적으로 얘기해서, 목적만 정당하다면 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상관없다는 입장을 가진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부도덕한 수단이 도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없다”는 킹 목사 말씀이 여전히 존중되고 있는 거다.

구체적으로 자기 이해가 걸려도 마찬가지일까? 자신의 이익이 걸려있는 경우에는 본질을 훼손하는 불의한 수단까지 동원하기 일쑤인 게 우리 현실 아닐까?

지금 이슈가 돼있는 지방재정개혁도 마찬가지다. 행자부가 수원, 성남 등 6개시에 예산을 더 얹어주는 현행 조정교부금 제도를 폐지하려던 정책 말이다. 이 문제, 우선 행자부가 잘못했다. ①여소야대 국회에서 통과될 가능성도 없는 “법인지방소득세의 공동세 전환”을 개혁안에 포함시켜 발표함으로써 손실규모가 커 보이게 만들었다. 수원시의 경우, 조정교부금 폐지만으로는 1천800억 원이 아닌 716억(행자부 주장) 내지 863억 원(수원시 주장)이 줄어들게 된다. ②아무리 예산이 2조가 넘는 시라도 700~800억 원이 적은 돈이 아닐텐데 이걸 한 번에 폐지하겠다고 달려든 것도 문제다. 소비세율 인상 등 재원보전대책을 제시하면서 5년 내지 10년에 걸쳐 서서히 폐지했어야 맞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원시, 성남시 등이 택한 개혁 반대운동의 수단은 과연 정당한 것이었을까? 우선 온-오프라인에서 여론을 장악하고 개혁안에 찬성한다는 말은 꺼내지도 못할 정도의 분위기가 조성됐다. 격한 언사로 정부를 세금도둑인양 몰아갔고 자유로운 의견 개진이 어려운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이런 분위기 탓인지 주요언론들조차 찬성과 반대 양쪽 의견을 균형있게 다루지 못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청소년재단, 새마을회, 부녀회, 체육회 등 각종 단체는 물론, 버스회사처럼 시청의 지원를 받는 민간회사까지 동원해서 반대서명을 받고 플래카드를 붙이게 한 거다. 그 중 무엇보다 걱정스러운 것은, 동별로 구성돼 있는 주민자치위원회들도 “지방자치 역행하는 재정개혁 중단하라”와 동일하거나 유사한 플래카드를 일제히 붙이도록 요청받았다는 점이다. 어떤 자치위원은 필자에게 ‘우리가 시장의 부하직원이냐’는 볼멘소리를 해댔다.

이쯤 되면 독자들 절반 정도는 “무슨 소리냐, 그럼 우리 세금이 도둑맞고 있는데 가만히 있으라고?” 라고 외치면서 칼럼읽기를 중단하기 시작할 게다. 그러나 잠깐! 한 번 생각해 보시라. 원론에서는 다 찬성하시지 않았던가? 수단도 정당해야 한다고.

주민자치위원회가 어떤 기구인가? 수원시와 성남시 등이 지키겠다고 나선 지방자치의 최후보루 아닌가? 이 위원회는 시장의 보조기구도 아니고 시청의 하부조직도 아니다. 문자 그대로 주민의 일을 자치적으로 논의 결정하는 곳이다. 만일 수원시와 성남시 등이 지방자치의 본질적 기구인 이 위원회에 영향력을 행사해서 서명도 받고 플래카드도 내걸게 했다면 그거야말로 수단의 정당성을 포기한 것이고, 그거야말로 “남이 하면 스캔들, 내가 하면 로맨스” 아닌가?

박수영 아주대학교 초빙교수/(전)경기도 행정1부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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