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경기천년, 경기 역사 문화의 전개] (21) 글로벌, 다문화 경기인-변안렬

변안렬(邊安烈, 1334년 4월~1390년 1월16일)은 한마디로 고려의 충신으로 호국인물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는 무신으로의 활동이 많은 편이지만, 불굴가와 같은 시문이 남아있으며 진사시에 합격한 경력이 있다. 변안렬은 심양(瀋陽) 출신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심양 일대에 이주해 살았던 고려인으로 보아야 한다는 설이 유력하다.

변안렬의 본관은 원주(原州)이고 자(字)는 충가(忠可), 호(號)는 대은(大隱)이다. 그는 공민왕이 고려로 올 때 시종해 고려에서 공민왕의 개혁정치에 참여했고 왜구와 홍건적 등의 외적 퇴치에 혁혁한 공을 세웠던 인물이다. 단지 그가 ‘고려사’ 간신열전에 수록돼 있는 것만으로 고려에서 간신으로 활동했다고 이해해서는 절대로 안된다. 그가 간신열전에 수록된 것은 오로지 조선의 건국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쟁기념관에서 그를 고려시대의 호국인물로 선정해 추대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변안렬은 1351년에 진사시에 장원 급제했던 사실이 있는 것으로 보아 무용(武勇)과 함께 문재(文才)도 갖췄던 문무겸전(文武兼全)의 고려 충신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고려를 구한 무공

변안렬은 여러차례 왜구와 전투를 해 승리했으며 홍건적의 침입 때에도 이를 물리쳐 공신에 봉해졌다. 변안렬이 참전했던 전투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 보면 다음의 표와 같다.

특히 변안렬은 안우(安祐)와 함께 1359년에 침략한 홍건적을 패주시킨 공으로 2등공신으로 판소부감사(判小府監事)에 올랐고 1363년에는 공민왕이 홍건적이 점령했던 개성(開城)을 수복한 공으로 1등공신이 됐다. 그 뒤 예의판서(禮儀判書)가 돼 추성보조일등공신(推誠輔祚一等功臣)의 호를 받았으며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에 올랐다. 변안렬은 최영(崔瑩)과 함께 제주를 정벌한 뒤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문하평리(門下評理)를 역임했다.

우왕(禑王) 때 추충양절선위익찬공신(推忠亮節宣威翊贊功臣)의 호를 받은 뒤 양광전라도 도지휘사 겸 조전원수(楊廣全羅道都指揮使兼助戰元帥)로서 나세(羅世)·조사민(趙思敏) 등과 함께 왜구를 크게 물리치고 돌아와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승진했다.

1376년(우왕 2)에는 추충양절선위익찬보조공신(推忠亮節宣威翊贊輔祚功臣)로 행안산전투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르고 승리로 이끌었다. 그런데 변안렬과 관련한 무공에서 재검토해야 할 전투가 있다. 바로 1380년의 황산대첩(荒山大捷)이다. 이 전투는 고려가 왜구를 격퇴한 큰 전투인데 일반적으로는 이성계의 전공이 크게 부각된 승리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황산전투에서는 변안렬이 도순찰사인 이성계보다 더 책임이 무거운 도체찰사로 참전을 하고 있다.

그리고 전투 후에 나라로부터 받은 포상이 변안렬과 이성계가 동등한 금 50량을 받고 있는데, 변안렬의 전공이나 전투의 양상은 전혀 기록돼 있지 않다. 더구나 황산대첩은 ‘고려사’간신열전인 변안렬전에 이성계의 전공만이 아주 크게 부각돼 서술돼 있는 것이 역사서술에서의 편파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 이유는 변안렬이 이성계의 조선 건국을 부정하고 고려에 충신으로 남기를 고집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전공으로 변안렬은 커다란 세력을 형성하게 됐고 원천부원군(原川府院君)에 봉해지고 판삼사사(判三司事), 영삼사사(領三司事)에 이르게 됐다.

▲ 변안렬 불굴가비
위화도회군과 김저사건


위화도 회군(1388)은 변안렬 뿐만이 아니라 이 시기에 생존했던 인물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였다.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으로 고려의 정계는 크게 양분됐다. 우왕과 최영을 중심으로 한 요동정벌 지지자들과 위화도회군파는 대립이 더욱 심해졌고 특히 이 무렵에 제기된 조준의 전제개혁안은 정국이 더욱 가열화했다. 이때 변안렬은 이성계와 함께 회군파에 속했으며 조준의 전제개혁안에는 반대를 했다.

그리고 1389년(창왕 1)에 일어난 이른바 김저(金佇) 옥사사건에 의해 변안렬과 이성계는 결별을 꾀하게 된다. 이해 11월에 김저(金佇)가 우왕을 여주에서 만나자 우왕이 울면서 말하기를 사이가 좋은 곽충보(郭忠輔)에게 이성계를 제거할 계획을 말하라고 했는데 곽충보는 이 사실을 이성계에게 직접 알렸다. 그리고 김저는 자백을 하면서 변안렬·우현보(禹玄寶)·이색(李穡) 등과 연루됐다고 한 뒤 옥에서 사망해 그 진실을 알 수 없게 돼 버렸다. 그러나 이성계는 이 사건을 반대파를 제거하는 결정적인 계기로 삼게 됐고 변안렬은 회군공신에 봉해지지 않고 죽임을 당한다. 그 뒤에 왕이 된 이성계는 변안렬에 대해 1393년 7월22일(을축)에 개국 공신에 책록토록 교지를 내리고 있다. “사망한 검교시중(檢校侍中) 변안렬은 2등공신 경보(慶補)의 예(例)가 해당하므로, 유사(有司)는 포상(褒賞)의 은전(恩典)을 행하라.”고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고려사’간신열전에 변안렬을 수록해 조선 건국을 반대했던 것에 대한 역사적 응징을 하기도 했다.

▲ 변안렬 신도비
불굴가와 우국충정


변안렬은 진사시에 합격한 문재를 갖춘 고려충신이자 왜구와 홍건적과 같은 외적들을 고려에 충성한 국제전의 걸출한 무장이었다. 또한 수군을 이끌고 최영과 함께 제주에 상륙해 난을 제압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서 건국세력에 동조하지 않고 고려에 충성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후대에 왜곡돼 군공도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한 현실과 역사의 양면에서 불운하게 됐다.

조선개국과 관련해 변안렬의 충절을 잘 나타내는 일화가 있다. 1389년(공양왕 1) 10월11일은 이성계의 생일이었는데 이날 변안렬과 정몽주를 제거하려고 했다. 변안렬은 사병 200명과 함께 다닐 정도로 세력이 강해 조선개국에 아주 걸리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리해 이성계는 자신의 생일을 핑계로 정몽주와 함께 변안렬을 초대했다. 이때 역성혁명에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던 이방원이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이런들 어떠하며 전런들 어떠하리’로 시작하는 ‘하여가(何如歌)’를 부르자, 정몽주는 ‘단심가(丹心歌)’로 화답했고 변안렬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불굴가(不屈歌)’를 불렀다. ‘원주변씨세보(原州邊氏世譜)’에 전하는 한역가(漢譯歌)의 내용을 소개한다.

내 가슴 콩(斗)처럼 구멍 뚫어 穴吾之胸洞如斗

새끼줄로 꿰어 늘리고 또 늘려 貫以藁索長又長

앞 뒤에서 끌고 당겨서 갈리고 또 찢겨져도 前牽後引磨且(창 알)

너희들 마음대로 하게 하지는 못하겠다 任汝之爲吾不辭

내 임금 빼앗는 일에 나는 따를 수 없다 有慾奪吾主此事吾不從

▲ 변안렬 묘역
그의 묘역은 남양주시에 있으며 경기도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조선 개국후 태조(이성계)는 변안렬의 후손들에게 관직을 내리려고 했으나 후손들의 사양으로 태종때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다. 이성계에게 변안렬은 동지이자 경쟁자이기도 했다. 심양에서 입국한 변안렬은 국제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던 무장이었으며 제주의 민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했다. 그리고 마침내 변안렬은 고려의 충신을 선택한 인물이었다. 당시에도 변안렬의 충절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정몽주는 변안렬의 제문을 다음과 같이 작성해 그의 우국충성심과 죽음을 애도했다.

임신년 정월 기망일은 고인 대은공이 순절하신 두번째 해입니다. 진실한 벗이며 시중 직책을 맡고 있는 영일인 정몽주는 술잔을 부어 공의 묘에서 아륍니다. 늠름한 것은 추상과 같은 공의 충열이요, 열렬함은 한낮의 해와(白日) 같은 공의 의절이었습니다. 이 밤에 큰소리로 우오니 어느 날이든 감히 잊겠습니까? 올리는 제수는 비록 많지 않으나, 마음으로 통하는 우정은 두터우니 바라건대 혼령께서는 오셔서 드시옵소서. 아! 원통하구나.

이재범 경기대교수



저작권자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