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경기천년, 경기 역사 문화의 전개] (22) 교하노씨(交河盧氏)

파주 교하의 벌족(閥族)인 교하노씨

교하노씨의 본관인 교하(交河)는 경기도 파주시에 속한 교하읍이다. 당(唐)나라 한림학사 노수(盧穗)의 차남인 한림학사 노오(盧塢)가 8학사의 한 분으로 통일신라에 오자 국빈(國賓)의 예로 경기도 교하백(交河伯)에 봉작했는데, 이로써 교하노씨가 발원했다.

교하 노씨의 일세조(一世祖)는 노강필(盧康弼)이다. 그는 왕건이 고려를 건국할 때 도와 삼한벽상공신이 돼 금자광록대부 태자태사(金紫光祿大夫太子太師)에 올랐으며 선성부원군(宣城府院君)에 봉군(封君)됐다. 파주통일동산 내 고려대전(高麗大殿)에는 태자태사를 지낸 선성부원군 노강필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2세 노안맹(盧安孟)은 무신으로 상장군에 올랐다. 3세 노영순(盧永淳) 참지정사와 상서좌복야,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냈다. 부인은 이광필의 딸인 낙랑군부인(樂浪郡夫人) 이씨이다. 1170년 무신의 난 때 의종(毅宗)을 시종했으나, 대대로 무인가문의 자손이라해 화를 면했다. 4세 노탁유(盧卓儒), 7세 노연(盧演) 역시 무신이다. 8세 노경륜(盧景倫)은 고려후기의 문신으로 찬성사를 지냈다.

이후 고려조 문하시중으로 추증된 의열공(懿烈公) 노영수(盧穎秀)와 그의 아들인 첨의정승 노책(盧(바를 책))이 왕실과 통혼해 가문의 성세를 누리게 됐다. 교하노씨는 10세손 노책의 아들 4형제 때부터 4개 파로 분파됐다. 장남 노제(盧濟)는 서원군(瑞原君), 차남 노진(盧(빽빽할 진))은 창성군(昌城君), 삼남 노은(盧(언쟁할 은))은 경원군(慶原君), 사남 노영(盧渶)은 신양군(新陽君)에 봉군돼 4파의 파조로 추숭됐다. 문하시중 노영순의 후손인 노지유(盧智儒)는 4군파와 같은 시대에 홍건적의 난에 무공을 세워 신창군(新昌君)에 봉군됐다. 이로부터 분관해 후손들이 신창노씨(新昌盧氏)로 계승하고 있다.

교하노씨 가문의 성세는 조선초기에도 이어졌다. 특히 13세 공숙공(恭肅公) 노한(盧(이문 한))부터 16세 대제학 노공필(盧公弼)까지 이어지는 창성군파 공숙공계의 성세는 타 가문에 비할 바가 아니다. 15세 문광공(文匡公) 노사신(盧思愼)은 성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인물이다. 제13대 노태우 대통령은 창성군파 공숙공계의 17대손이다. 이밖에도 알성문과에서 장원급제를 한 노직(盧稙) 등 많은 충효열사의 인물이 이 가문에서 배출됐다.



여말선초에 왕실과 통혼한 대표적인 명가

여말선초의 벌족 대부분은 토착세력을 기반으로 훈구세력과 통혼함으로써 가문의 성세를 주도했다고 할 수 있다. 교하노씨는 특히 고려 왕실과의 통혼이 눈에 띈다. 9세 의열공(懿烈公) 노영수(盧(이삭 영)秀)는 고려의 문신으로 이부상서와 밀직사좌승지를 지냈다. 원나라 간섭기에 몽골어 통역관으로 시작해 문하시중까지 지낸 평양군(平壤君) 조인규(趙仁規)의 딸과 혼인해 세력의 발판이 됐으며 후에 충선왕도 조인규의 딸을 왕비로 맞음으로써 왕과 동서지간이 된다. 10세 노책(盧: ?~1356) 왕현(王(햇빛 현))의 딸인 경녕옹주(慶寧翁主)와 혼인했다. 충목왕 때 좌정승으로 경양부원군(慶陽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딸이 원나라의 순제비(順帝妃)가 됐다.
▲ 교하노씨 창성군파 망송사대제

창성군파 파조인 11세 노진(盧(빽빽할 진))은 공민왕 시해 사건에 연루돼 네 아들과 함께 처형당했으나, 훗날 사위가 공양왕에 오르면서 제효공(齊孝公)으로 추증됐다. 순비 노씨(順妃盧氏)는 바로 노진의 딸로 공양왕의 왕비이다. 1389년 정창부원군이 이성계 일파에 의해 공양왕으로 추대되자 순비 노씨는 왕비가 됐다. 공양왕은 노씨를 위해 의덕부를 설치하고 관속을 뒀다. 소생으로는 세자 왕석과 숙녕, 정신, 경화궁주가 있다. 순비는 이성계 일파에 의해 폐위된 뒤에는 공양왕과 함께 원주로 유배됐고 남편을 따라 고성, 삼척 등지로 유배를 다녔다. 1394년 공양왕이 사약을 받을 때 함께 사사됐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교하노씨는 왕실과 통혼했다. 13세 노한은 좌의정 민제(閔霽)의 사위로 태종과는 동서간이다. 14세 노물재(盧物載)의 부인은 심온(沈溫)의 딸로서, 소헌왕후의 동생이다. 15세 노사신은 노한의 손자이며 할머니는 원경왕후의 여동생으로 태종의 처제이다. 어머니는 소헌왕후의 여동생으로 세종의 처제로 2대에 걸쳐 왕실과 인척관계이다.



교하노씨의 번창을 이끈 인물들

성현은 ‘용재총화’에서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벌족을 소개한 바 있는데 파평윤씨·한양조씨·이천서씨·여흥민씨·수원최씨·양천허씨·행주기씨 다음으로 교하노씨를 거론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교하현의 성씨조에서는 맨 처음에 노씨가 기록돼 있다. 인물편에는 우의정을 지낸 공숙공 노한과 그의 손자인 노사신이 기록돼 있다.

공숙공 노한은 호가 효사당(孝思堂)이다. 창성군의 삼남인 노균(盧鈞)의 외아들이다. 교하노씨 가문의 핵심인물이라 할 수 있다. 1403년(태종3년)에 좌부승지가 됐고 이듬해 이조전서·경기도관찰사를 역임했다.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다. 공양왕이 폐위되고 고모인 순비노씨가 정치적 화를 입게 되자 개성에서 한양으로 이사해 성장했다. 처남 민무구(閔無咎) 형제 사건에 연루돼 지금의 파주시 백학면 학곡리에서 18년간 은둔했다.

노물재는 부인이 소헌왕후의 동생으로 세종과는 동서지간이다. 첨지중추부사·동지돈녕부사 등을 역임했다. 회신(懷愼)·유신(由愼)·사신(思愼)·호신(好愼) 등 4명의 아들이 있었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됐다.
▲ 교하노씨 유래비

노사신은 교하노씨 가문의 명성을 최고조로 드높인 인물이다. 조부 노한은 좌의정이며 외조부 심온은 영의정이다. 이같은 가문의 배경과 탁월한 능력으로 본인도 성종 때 영의정을 지냈다. 유년시절에 홍응(洪應)과 함께 윤형(尹炯)에게 수학한 그는 학문에 조예가 깊어 문과 급제 직후 집현전학사로 발탁됐다. 이때 독서에 전념해 ‘진박사(眞博士)’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세조·성종의 총애를 받아 문치를 도와서 ‘경국대전’의 편찬을 주관했다. 또한 성종 때는 여러 사서(史書)의 편찬을 담당하기도 했다. 서거정(徐居正)·이파(李坡)와 함께 ‘삼국사절요’를 찬진하고 ‘동국통감’의 수찬에도 참여했다. 그리고 강희맹(姜希孟) 등과 함께 ‘동국여지승람’의 편찬을 총재했다. 이극돈(李克墩)과 함께 ‘통감강목’을 신증(新增)하고 서거정·어세겸 등과 같이 ‘연주시격’ ‘황산곡시집’을 한글로 번역하는 등의 많은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 시호를 문광(文匡)이라 한 것도 이런 때문이다.

노사신의 아들인 노공필(盧公弼)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고 영중추부사에 오른 인물이다. 충성심과 효심이 지극하고 일가친척의 관혼상제를 두루 살폈으나, 자신은 검소한 생활에 만족했다.



교하노씨와 흥망성쇠를 같이한 파주시 교하지역

교하(交河)는 ‘물이 교합한다’는 뜻을 지닌 지명이다. 바로 임진강과 한강이 교합되는 곳이다. 조선 광해군 때 이의신(李懿信)이 주장한 교하천도론(交河遷都論)의 대상지가 바로 이곳이다. 교하지역은 고구려의 천정구현(泉井口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때 교하군으로 개칭했다. 고려 때부터 조선 숙종 때까지는 교하현으로 존치했다가 이후 폐현되고 파주에 예속됐다. 1895년(고종32년) 23부제 실시 때 파주군에 편입됐다가 이듬해 다시 복구돼 경기도의 4등군 교하군이 됐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파주군에 편입돼 교하면이 됐으며 1996년 파주군이 시로 승격됐다. 최근에 교하지역에 신단지가 조성되면서 다시 각광을 받는 명당이 됐다.
▲ 노한 묘소(위), 노사신 묘소

교하노씨는 ‘교하’라는 지명과 함께 흥망성쇠를 같이했다는 생각이 든다. 신라 때 당(唐)나라의 노오(盧塢)가 8학사 가운데 한 사람으로 동래하면서 교하노씨의 발원이 됐다. 그리고 고려시대와 조선 초기에는 교하노씨와 함께 흥망성쇠를 같이했다. 조선 후기에 교하가 파주에 예속되면서 쇠미해졌듯이 교하노씨들도 전기에 비해 가문의 성세가 쇠락해진 편이다. 그리고 최근 교하지역이 신단지로 각광되고 있듯이, 공숙공파 가문에서 노태우 대통령이 배출됐다.

현재 파주시 파주읍 백석리에는 공숙공 노한과 문광공 노사신의 묘역을 비롯해 창성군파 공숙공계 후손들 묘소가 있다. 재실로 효사재가 있다. 본래 공숙공 노한의 묘역은 지금의 서울시 영등포구 대방동에 있었다. 노한이 1443년(세종25년)에 별세하자 이곳을 사패지로 하사받아 예장했다. 이후 공숙공계 후손들의 세장지로 전해왔다. 파주읍 백석리로 천장한 것은 일제통치시기인 1940년에 총독부의 강제수용으로 인한 것이었다.


홍순석 강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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