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경기천년, 경기 역사 문화의 전개] (23) 경기(京畿)를 지도에 그리다

세계지도의 수입과 제작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세계관은 중국을 중심으로 ‘화(華, 중국)’와 ‘이(夷, 오랑캐)’를 구분하는 것이었다. 지도는 그런 세계관을 담아내는 대표적인 수단이었다. 신라 때 최치원은 일찍이 당나라에 유학해 현지에서 제작한 지도를 보고 그 감정을 시로 읊었다. 중국의 지도는 고려 이전부터 수입됐을 것이다. 고려 중기에 이규보(1168∼1241년)는 ‘화이도(華夷圖)’라는 지도를 보고 “만국의 삼라만상이 두어 폭 종이에 펼쳐졌는데 우리나라는 모퉁이의 한 작은 덩어리 같다”고 읊었다. 고려 말에 이색(1328~1396년)도 “새벽에 태산 꼭대기에 오르니 동해가 사발만하다. 구부려 옛 사람의 자취 보고 지도를 훑어보았다”고 했고 정몽주(1337~1392년)도 ‘여진지도’를 보고 그 감회를 읊었다. 그들은 지도를 통해 고려의 위치를 파악하고 정체성을 확인했다. 그들이 본 지도는 금나라나 원나라에서 제작한 지도였을 것이다.

1482년(성종 13) 양성지(1415∼1482년)의 보고에 따르면 조선 전기의 세계지도로 중국에서 수입된 ‘대명천하도’와 자신이 제작 작업에 참여한 ‘대명도(大明圖)’가 있었다. 또 일본 관련 지도로 도안(道安)이라는 왜국 승려가 그린 ‘일본국지도’ ‘유구국지도’ 그리고 역시 자신이 수찬한 ‘일본지도’가 있었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1402년(태종 2)에 아시아·유럽·아프리카를 포함한 세계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가 조선에서 제작됐다. 좌정승 김사형, 우정승 이무와 이회 등이 참여한 이 지도와 양성지가 언급한 지도들이 어떤 관련이 있는지 자세히 알 수 없다. 이 밖에 세계지도는 중국을 통해 꾸준히 조선에 수입돼 16세기 전반에 ‘천해지도’ ‘대명여지도’ ‘천하지도’ 등이 국가에서 사용됐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와 함께 김만중(1637∼1692년)이 고증한 ‘천하지도’ 등도 제작됐다.

▲ 18세기중반의 동국대지도. 보물 제1538호.


고려시대의 ‘고려도(高麗圖)’와 ‘경기도(京畿圖)’ 제작

고려시대의 지도 제작은 당시 유행했던 풍수도참과의 관계에서 먼저 생각할 수 있다. 왕실의 기운을 보충하기 위해 길지(명당)를 찾고 그곳을 구체적으로 비정하는 작업에서 지도 제작은 필수였다. 경기도 지역에서는 고려시대의 도읍인 개경을 중심으로 한 경기와 남경이 설치됐던 양주 일대, 몽고 침입으로 천도했던 강도(江都), 길지로 여겨진 삼각산과 장단, 예성강 일대의 지도가 제작됐을 것이다.

고려는 1002년(목종 5)에 거란에 고려지도를 보냈고 1148년(의종 2)에는 몰래 송나라에 고려지도를 보내려다 들킨 사람들을 처벌했다. ‘고려사’에서는 ‘고려지도’ ‘아국지도’ ‘본국지도’ 등의 명칭이 확인된다. 이들이 어떤 성격의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고려 영역 전체를 수록한 전도(全圖)일 것으로 보인다. 고려 말에 나흥유가 제작한 ‘본국지도’에는 “개벽 이래 제왕의 흥망과 강역이 나뉘고 합친 사적이 서술됐다”고 한다. 이들 지도에는 고려 역사의 출발부터 지도 제작 이전까지의 사적 등이 개략됐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연혁·거리·산천·주요도시·요충지·봉수·역·사당·산성 등에 대한 정보였을 것이다. 이들은 왕화(王化) 시행을 위한 필요불급의 내용이었다.

이첨(1345∼1405년)은 1396년(태조 5)에 역사책인 ‘삼국사략’를 찬술하면서 ‘삼국지도’를 제작해 고구려 백제 신라 역사의 앞에 이를 소개했다. 그리고 제작자를 알 수 없는 ‘고려지도’도 소개했다. “우리나라의 군현은 지도에 대강만 나타나 있고 자세하지 못해 상고할 수 없다. 삼국을 통합한 뒤에 비로소 ‘고려지도’가 생겼으나, 누가 만든 것인지 알 수 없다. 그 산맥을 보면 백두산에서 시작해 구불구불 내려오다가 철령에 이르러 별안간 솟아올라 풍악이 됐고 거기서 중첩돼 태백산·소백산·죽령·계립령·삼하령·추양산이 됐다. 중대(中臺)는 운봉(雲峯)으로 뻗쳤는데 지리와 지축이 여기서 와서 다시 바다를 지나 남쪽으로 가지 않고 맑고 깨끗한 기운이 서려 뭉쳤기 때문에 산이 지극히 높아 다른 산은 이만큼 크지 못하게 됐다. 그 서쪽으로 흐르는 물은 살수(청천강)·패강(대동강)·벽란도·임진강·한강·웅진(공주)인데 모두 서해로 들어가고 그 등마루 동쪽으로 흐르는 물 중에서 가야진(伽耶津)만 남쪽으로 흘러갈 뿐이다. 원래의 기운이 일어나 뭉치고 산이 끝나면 물이 앞을 둘렀으니, 그 풍기(風氣)의 구분된 지역과 군현의 경계를 이 그림만 들추면 모두 볼 수 있다.”

또 양성지는 고려 중엽 이전에 제작된 ‘오도양계지도’의 존재를 말하고 있다. 이첨이 말한 ‘고려지도’는 양성지가 언급한 ‘오도양계지도’와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는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하는 산줄기와 물줄기 등 여러 가지 인문지리 정보가 담겨 있었다. 이런 ‘고려지도’는 명나라와 조선의 국경을 획정하는 근거로 사용됐다. 이런 전국지도의 제작은 주현(현재 시군)을 단위로 하는 지방지도와 그 다음 단계인 도지도(道地圖)를 바탕으로 이뤄진다. 즉 고려시대에 왕도(王都)인 개경을 아우르며 이를 지지하던 경기를 그린 경기지도 역시 이른 시기부터 제작돼 활용됐음이 분명하다.

▲ 16세기중반의 조선방역지도. 국보 제248호.



조선 건국과 경기의 재편성, ‘경기지도’

전통사회에서 국왕은 자신의 국토에 있는 하늘과 땅의 움직임을 모두 관장했다. 천문도와 지도 제작은 그 결과였다. 역시 양성지의 보고에 따르면 14세기 후반 이전에 제작된 전국지도는 이회의 ‘팔도지도’(태종), 정척의 ‘팔도지도’(세종) 등 변경지도는 정척의 ‘양계대도(兩界大圖)’ ‘양계소도(兩界小圖)’, 양성지의 ‘제주삼읍도(濟州三邑圖)’ ‘요동지도’ 등 상당히 많다. 고려 말 몇 차례에 걸친 경기제의 개편과 확대로 이를 뒷받침하는 지도의 정비 역시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경기지도’의 제작이 필요했다.

특히 신왕조 건국 직후부터 건국 세력은 지도 제작에 관심이 매우 높았다. 1402년(태종 2) 5월과 1413년 8월에는 ‘본국지도’가 왕에게 바쳐졌다. ‘본국지도’는 전국의 거리를 그린 표와 함께 바쳐졌다는 점에서 내용이 보다 구체적이다. 이 지도들은 1402년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 그려져 있는 조선지도와 서로 영향관계에 있을 것이다. 이 같은 전국지도의 제작은 신왕조의 급선무 중에 하나였고 그것은 팔도지도는 물론 각 주현의 지방도 제작에 영향을 끼쳤다. ‘경기지도’는 이런 분위기에서 최소한 경기좌·우도를 통합해 ‘경기’라 명칭한 1414년을 전후한 시기에 제작됐을 것이다. 20년 후의 사례이지만 1434년(세종 16)에 ‘본국지도’에서의 잘못된 정보를 살피고자 각도의 수령과 감사에게 해당 지역의 산천·도로 등을 자세하게 그려 바치라는 왕명이 내린 것은 ‘경기지도’의 제작 가능성을 넓혀준다.

문종은 1450년에 지도의 정확성을 높이기 위해 “각 도로 해금 주군(州郡) 간 거리를 상세히 기록하라”는 왕명을 내렸고 그런 결과 중의 하나가 예조참판 정척(1390∼1475년)이 수찬한 ‘양계지도’였다. 지도 제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해당 고을의 동서남북이 다른 고을까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의 문제였다. 만약 네 방위로 이를 바르게 잡을 수 없다면 12방위의 나침반을 사용해서라도 정해야 했다. 그리고 해당 고을 안에 있는 명산·대천·큰고개·옛 관방·옛 도심 등이 어느 방위의 어느 땅에 있는지 상세하게 기록해야 했다. 결국 전국이든 도 단위 지도이든 가장 중요한 것은 정확한 측량을 바탕으로 제작한 지방도였다. 1467년(세조 13)에도 척(尺)으로 재어 도성지도(都城地圖)를 제작했다. 이것은 경기에 속해있던 군현에 그대로 적용됐고 그렇게 제작된 지방도를 경기감영에서 수합·고열해 ‘경기지도’가 제작됐다. 지도의 제작에서 정확성 다음은 편리성이었다. 1451년 7월에 앞서 정척이 수찬한 ‘양계지도’ 중의 일부로 파악되는 ‘평안도지도’에 대해 “내용이 자세하지만 너무 커서 펴보기에 어려우니 군현·요충지·명산·대천을 대략 그려 편하게 볼 수 있도록 하라”는 왕명은 이를 의미한다.

‘경기지도’의 제작은 단종 때에 확인된다. 1456년(세조 2)의 기록에 따르면 양성지는 왕명으로 1453년(단종 1) 겨울부터 수 년 동안 팔도지도와 ‘경기지도’를 살피고 있었다. 그 내용은 경내의 산천과 도로 등에 관한 것이었다. 1454년(단종 2) 10월 사간원은 경기가 농사의 때를 놓쳤으니 지도 만드는 일을 늦춰달라고 건의했다. 이에 단종은 왕화(王化)의 우선 시행 지역인 ‘경기’만 시험적으로 운영하라는 명을 내렸다. ‘경기지도’의 제작 작업이 진행됐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제작은 지리지의 편찬과 연결돼 있다. 조선 건국 이후 1456년 이전에 편찬된 지리지로는 ‘세종실록지리지’의 저본이 된 ‘신찬팔도지리지’가 있다. 지리지의 편찬에서 최소 단위가 주현(시군)이었고 그 내용의 범위는 인문지리정보의 종합이었다. 그 과정에서 각 군현을 단위로 하는 지방지도의 제작은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이를 도별로 묶은 도지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경기지도’는 이런 과정에서 출현했다.

지도는 일차적인 통치 자료였다. 전국 군현의 합병에 지도는 적극 이용됐다. 1455년(세조 1) 11월에 경기관찰사를 역임한 박원형 등을 참석시켜 경기로부터 논의를 시작한 주군(州郡)의 합병 문제에 ‘본국지도’가 사용됐다. 여기서의 ‘본국지도’는 전도 형태의 것이기보다는 전국지도가 앞에 실리고 경기를 포함한 8도 지도가 함께 실린 것 보다 상세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조선 전기에 이런 과정들이 반복되며 완성된 결과물이 1463년(세조 9) 11월 정척과 양성지 등이 수찬한 ‘동국지도’였다. 이 지도는 현존하지 않지만 1557년 또는 1558년에 제작된 ‘조선방역지도(朝鮮方域地圖)’가 그 계통으로 제작됐다.

‘경기지도’의 존재는 1414년 경기 좌·우도의 통합을 전후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군현의 합병에 대한 논의는 지도 없이 이뤄질 수 없었다. 군현의 크기, 인구, 토지, 사방 경계 등에 대한 정보는 그 논의 대상의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경기에 속한 각 군현의 지도가 먼저 제작됐고 이를 바탕으로 ‘경기지도’가 만들어졌음을 의미한다. 이 같은 지도는 병조에 속한 무비사(武備司) 등을 통해 지속적인 보완을 통해 완성도를 높여갔다. 하지만 조선 전기에 지도는 거의 민간에서 유통되지 못했고 관부(官府)의 주도로 편찬되고 보관됐다. 그 내용들은 병조는 물론 이조·호조·공조·예조 등 통치에 필요한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의 최신 정보가 종합돼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조선 전기의 ‘신찬팔도지리지’ ‘팔도지리지’ ‘동국여지승람’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관찬 지리지 편찬은 지방지도는 물론 도지도, 전국지도의 제작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조선의 지방행정체계 역시 이와 아울러 정비됐다.

김성환 경기문화재단 뮤지엄본부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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