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님 떠난 그 자리…농촌진흥청 터

▲ 농촌진흥청은 농림부 산하에 설치된 농촌진흥을 위한 사무를 관장하는 중앙행정기관이다. 1947년 농사개량원, 1949년 농업기술원, 1957년 농사원을 거쳐 1962년 농림부 산하의 외청인 농촌진흥청으로 독립하였고, 1973년 농수산부, 1987년 농림수산부, 1996년 농림부, 2008년 농림수산식품부를 거쳐 2013년 3월 농림축산식품부의 외청으로 변경됐다. 사진은 농촌진흥청의 전경.

오늘 다루려는 곳은 길거리는 아니다. 하지만 이곳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여기를 길로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을 줄 안다.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옛 캠퍼스와 농촌진흥청은 수원의 서쪽에 자리하고 있으면서 한 때 수원을 상징하는 중요한 장소였다. 서울대 농대 캠퍼스는 수원역에서 인천 쪽으로 뻗은 외길을 따라 가다보면 푸른 숲 속에 간간이 건물이 보이는 별천지처럼 보였고, 한국의 최고 엘리트들이 공부하는 건물들과 연습림은 낭만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 캠퍼스를 둘러싸고 있는 또 하나의 푸른 지대는 농촌진흥정의 각 종 연구소와 그 실험장의 임야들이었다. 이 지역은 요즘 아파트 단지와 상업시설들이 빽빽이 들어서면서 수원 서부지역의 풍경이 급하게 변하는 가운데서도 녹색공간이 아직 남아 있을 수 있게 그 터전을 마련해 주는 구실을 하고 있기도 하다.

서수원의 시민들은 여가시간 날 때 이 지역을 거닐며 산책하고 가족들과 단란한 시간을 갖기도, 젊었을 땐 데이트 코스로 다녔던 사람들도 많았으리라 생각한다. 서울대 농대 인근의 ‘푸른지대’, 농촌진흥청의 넓은 ‘잔디 운동장’과 ‘서호’, 그리고 봄날의 눈부신 벚꽃! 정문으로 들어가 후문으로 나와도 좋고 정문으로 도로 나와도 좋았다. 공공기관에서 지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수원시민이 사랑했던 쉼의 공간으로 오랜 세월 거기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남아 있다.

그런데, 이젠 그 터의 옛 주인들은 떠나고 새 주인들이 들어 와 여기저기 손보면서 여기를 어떻게 쓸까 궁리와 계획을 모색하고 있다. 모든게 예전 같지 않고 닫히고 막히고 어설퍼지고 있다.

우선, 근거지를 전주로 옮겨 간 농촌진흥청의 터를 보자. 거기엔 무엇이 있을까?

▲ 본관. 김정수 건축가 설계로 1961년 10월 준공. 1차 건축사업 때 만들어진 건물 중 유일하게 남아 있다. 정문으로 진입하면 2층으로 보이지만 실제 뒤쪽으로 한층이 더 있는 3층 건물이다. 가느다란 기둥이 받쳐주는 T자형 지붕이 길게 덮여 있어 경쾌한 인상을 준다.
최근 들어 수원은 마치 전자산업의 메카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인식돼 있지만 불과 10수년 전까지만 해도 ‘녹색혁명’ ‘농업 자주권’ ‘새마을 운동의 실현지’ ‘통일벼’의 탄생지로 국제적 농업연구의 중심지로 알려져 있었다. 남행열차를 타고 서울을 출발해 수원의 초입에 들어서면 오른 쪽 차창으로 볼 수 있었던 파릇파릇 드넓은 논과 호수, 가을엔 두 팔 벌리고 서 있는 허수아비, 이런 풍경은 서울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차창을 통해 들어오던 본때 없는 건물들에 싫증날 때 쯤 청정의 물결로 우리들의 시야를 청소해 주는 푸른 바다였다. 상행선 기차를 타고 이 곁을 지나면 이젠 숨 가쁜 삶의 현장으로 올라가 쉴 새 없이 뛰어야 한다는 각오를 다지기 전에 숨 고르기를 할 수 있는 터였다. 농촌진흥청의 실험 논들은..

수원은 정조대왕이 화성을 축조할 당시 원 화성의 주민들이 신도시 건설과 도시운영의 주축을 이루면서 안착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혜택을 주었던 정책 중에 농사지을 터전을 마련해 준 둔전과 서호, 축만제, 만석거 등이 근간이 돼 1차 산업(농업) 연구의 중심지가 됐다. 개항기를 거쳐 한반도를 유린하던 일본이 이 지역의 이러한 근거를 토대로 이른바 근대농업기술(식민지 조선의 사람들을 위한 연구라기보다 지배국 일본을 위한 여러 가지 방도를 찾는 일이었겠지만)을 이식하는 기관들을 여기에 만들었다. 일제의 조선총독부는 수원의 서호를 중심으로 ‘권업모범장(勸業模範場)’을 개설하고 근대농업, 육종을 교육하고 연구, 실험하는 기지를 구축했다. 이 기관에서 광복 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이 설립됐고 그 배후 단지로서 농촌진흥청이 설치돼 6.25를 거친 후 피폐해지고 곤궁하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기본적인 먹을거리 제공과 경작지 관리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는 근거지를 마련해 주었다.

▲ 도서관. 1967년 김희춘 건축가가 설계했다. 원래 1907년 벽돌로 지어진 도서관이 있었지만 6 25때 손상되자 철거 후 다시 지었다. 
전후복구의 작업이 어느 정도 완비되고 경제개발계획을 세워서 체계적 발전을 모색하던 때에 이승만 독재에 항거하며 생겨 난 민주화 열망으로 4.19가 일어나고 곧 이어 이러한 혼란을 정비한다는 명분으로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면서 강력한 국가주도 계획경제 체제가 이 나라에는 이어졌다. 마침 미국을 비롯한 국제기구로부터 전재복구의 재원과 물자가 한국으로 들어 왔는데 군사정부는 수원을 소출증대를 위한 연구기지로 설정하고 중요기관들을 설치했다. 이에 따라 서호주변에는 식량증대를 위한 연구기관들이 연이어 지어졌다.

농촌진흥청엔 순차적으로 많은 건물들이 지어졌는데 여기에는 당시 서울에서 활동하던 건축가들이 대거 참여해 상당한 수준의 건축디자인을 선보이고 있었다.


농촌진흥청 건물의 설계는 1958년, ‘한국 농업진흥부’ 사업의 일환으로 USOM(미국 전후복구 경제원조 조절단)측이 설계자를 선정해 당시 대한건축학회 회장 이균상(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건축가 김정수(종합건축사 사무소, 연세대 건축공학과 교수), 김중업(김중업 건축사 사무소, 홍익대 건축학과 교수)에게 공동으로 계약을 체결했는데 전체 마스터 플랜은 3인이 공동으로, 토목, 도로정비 공사는 이균상, 본관, 공보관, 대강당은 김정수, 교사는 김중업이 분담해 설계했다. 기숙사는 마스터 플랜에 계획돼 있어 기초공사까지는 돼 있었지만 공사비 관계로 중단됐다가 나중에 그 자리에 농업기계화 연구소가 지어졌는데 이 설계는 이광노(서울대 교수)가 담당했다.


▲ 옛 담배인삼공사 연초제조창. 농촌진흥청 정문을 들어서 서호를 바라보며 후문쪽으로 나가면 보이는 건물. 1971년 설립 운영하다가 2003년 담배생산시설을 폐쇄한 이후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전체 공사는 1959년에 착공해 1962년에 완료됐다. 이 중에 남아 있는 것은 본관 건물로, 김정수의 설계로 1961년 10월에 준공됐다. 진흥청 정문으로 진입하면 2층 건물로 보이는 데 실제로는 뒤쪽 아래쪽으로 한 층이 더 있어서 총 3층의 건물이다. 원래는 현재보다는 작은 규모로 지어졌으나 나중에 좌우로 펼치는 형태로 증축을 했다. 현관 외부에는 가느다란 기둥이 받쳐 주는 T자형의 가벼운 지붕이 길게 덮여 있어 경쾌하면서도 이 건물로 다가서는 사람들에게 다정한 인상을 주고 있다. 이 경쾌함은 건물 본체로 이어져 옆으로 긴 띠 모양 창과 하얀 벽선으로 인해 더욱 즐거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그리고 한 층 아래에 뒤편으로 펼쳐진 넓은 초록색 운동장과 서호의 푸른 수면을 배경으로 마치 가볍게 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는데 이는 건물 전면을 싸고 있는 수평적으로 끊어짐 없이 이어지는 긴 띠 창과 역시 하얀 색으로 길게 이어진 수평벽면 때문인데, 자세히 들여 다 보면 기둥들이 창문으로부터 떨어져 있음을 할 수 있다. 창틀을 기둥에 붙이지 않고 위아래 인방들에 바로 연결해 유리창이 건물 끝에서 끝까지 이어지도록 하기 위해 건축가는 이러한 방법을 선택했다. 지금은 전설 속의 인물처럼 회자되는 세계적 건축가 르 꼬르 뷔지에가 주창했던 근대건축이 갖춰야 할 몇 가지 원칙 중에 ‘평활한 입면(외벽)’ ‘수평으로 긴 창’이라는 조항을 여기에서 충실히 실행했다고 볼 수 있다. 농촌진흥정 부지 내의 1차 건축사업 때 만들어진 건물 중에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이 본관 건물이 유일하다. 그런데 이 본관과 이웃해 정면 오른 쪽에 도서관이 있다.


이 도서관은 1967년에 김희춘(서울대 건축학과 교수)이 설계했다. 원래 1907년에 벽돌로 지어진 도서관이 있었는데 6.25를 겪으며 손상된 건물을 1955년 철거하고 1968년 신축 도서관 1층을 완성했다. 이어서 1970년에 3층까지 완성했는데 건물 전체가 모더니즘의 정결한 표현으로 구성돼 있으며 현관 앞의 캐노피, 창문 주변의 테두리, 특히 윗 인방을 두텁게 곡면으로 처리한 것은 당시에 콘크리트라는 재료를 사용해 건물을 투박하고 거칠게 보이도록 지었던 ‘브루탈리즘’의 마지막 세대에 해당하는 유산이라 생각한다. 내부의 개가식 서가가 있는 부분에는 되도록 서쪽으로부터 들어오는 햇빛을 최소화하기 위해 창의 면적을 작게 하고 3,4층의 통상적인 방에는 일반적인 창을 설치해 안정감을 갖도록 했다. 본관의 개방적이고 경쾌한 느낌과 도서관의 폐쇄적이면서 안정적인 분위기가 농촌진흥청 경내에 들어서면서 바깥의 소란한 세상과 다른 세상으로 유도하는 장치물로서 우리들을 반겨줬다.

▲ 하늘에서 내려다 본 농촌진흥청 일대 모습.


이제 수원하면 떠오르던 농촌진흥청은 떠났다. 수원과 농업을 1차 산업을 이어 주던 익숙했던 님이 떠난 자리를 이제는 다른 주인이 이사 들어 와 있다. 이곳이 앞으로 어떻게 바뀌어 나갈지 잘 모르겠다. 소유자에 따라 생각이 다르니 앞으로 생각을 잘 정리해야 할 텐데, 아직 우리는 땅(토지)은 값을 메겨 투자의 대상으로 봐야만 하는 재물로 취급하기에 여기의 유산들이 어떤 운명에 처해질지는 아무도 확실하게 얘기할 수 없다. 단지 우리들의 가까웠던 과거의 유산을 모두 처분해 버리고 나서 ‘외국은 옛것이 많아 남아 있어’ ‘부러워’ ‘그래서 그거 구경하러 해외여행 가자’ 등 이런 우를 우리세대에서 범하지 않기를 빌며 오늘도 농촌진흥청 정문을 들어서 서호를 바라보며 후문 쪽으로 나가면 옛 농민회관과 길 건너 옛 담배인삼공사의 연초제조창 건물들을 만날 수 있다. 이 유산들을 또 어떻게 될 것인가?

다음 주엔 서울대 농대 옛 캠퍼스를 둘러 보자.

윤인석 성균관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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