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경기천년, 경기 역사 문화의 전개] (24)신륵사

▲ 신륵사 다층석탑.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천송리의 봉미산 자락에 위치한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전해오고 있다. 그렇지만, 현존하는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유물이 없는 점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창건된 사찰로 생각되는데, 나옹화상의 입적과 이에 수반된 여러 이적(異蹟)은 신륵사의 사세(寺勢)를 확장시키는데 큰 기여를 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러 영릉(英陵)의 원찰(願刹)로 확정됨에 따라 대대적인 불사가 진행되면서 전성기를 구가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신륵사는 고려 말에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면서 조선시대에 이르러 대찰로서의 면모를 지니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렇듯 고려와 조선시대를 아우르며 번성했던 신륵사에는 다양한 유물이 전하고 있다. 이를 구체적으로 보면 조사당(보물 180호), 다층석탑(보물 225호), 다층전탑(보물 226호), 보제존자석종(보물 228호), 보재존자석종비(보물 229호), 대장각기비(보물 230호),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보물 231호), 극락보전(경기도 유형문화재 128호)을 비롯해 삼층석탑과 석조부도 2기가 현존하는 바, 이들은 바로 신륵사의 寺格을 보여주는 직접적인 史料라 하겠다.


▲ 신륵사 다층전탑 문양전 = 연주문이 있는 반원 안에 화문(花文)을 조각한 모습. 벽돌 조립에 있어 통일신라 시대 전탑과 같이 촘촘히 놓인 것이 아니라, 벽돌 사이를 벌리고 그 사이에 백토를 발랐다.

다층전탑(多層塼塔)

신륵사 경내의 동남편 강가에 위치하고 있다. 높이 9.4m의 규모로 현존하는 국내 유일의 고려시대 전탑이다. 기단부는 화강암을 이용하여 7단으로 구축했는데 3·5·6·7단에서 체감을 이루며 층단형을 이루고 있다. 이 중 2층과 4층의 석재는 다른 부재보다 높게 조성되어 우리나라 일반형석탑에서와 같이 2층기단의 형상을 보이고 있다. 이처럼 기단 전체를 화강암으로 축조한 경우는 통일신라시대의 전탑에서는 볼 수 없는 특수한 용례라 생각된다. 기단의 상면에는 여러장의 화강암으로 구축한 낮은 1단의 탑신받침이 놓여있다.

탑신부는 모두 6층으로 마지막 층만 높이와 너비가 축소되었을 뿐 나머지 층에서는 일정한 체감비를 볼 수 없어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결여된 채 고준(高峻)한 감만을 주고 있다. 아울러 탑신부를 구성하는 벽돌은 연주문이 시문된 반원내에 당초문을 새긴 것과 문양이 없는 2종류가 불규칙하게 구축되어 있는데, 벽돌의 조립에 있어 통일신라시대의 전탑과 같이 촘촘히 놓인 것이 아니라 벽돌 사이를 벌리고 그 사이에 白土를 발랐다. 옥개석의 받침은 3층까지는 2단이며, 나머지 층은 1단씩 두었다. 낙수면 역시 1층은 4단임에 비해 나머지 층은 모두 2단씩 되어 있어 각 층의 경계선 정도의 역할만 하고 있다. 상륜부에는 벽돌로 조성한 노반 상면에 화강암으로 조성된 복발·앙화,보륜·보개·보주가 놓여있다.

이 전탑에 대해서는 금서룡(今西龍)이 고려말의 건립설을 제기한 이래 고유섭선생도 이를 지지하고 있는데, 인근에 위치한 ·신륵사동대탑수리비(神勒寺東臺塔修理碑)·로 보아 1726년(조선 영조 2)에 수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비문의 내용을 볼 때 이 전탑은 첫째, 나옹탑이라 불리웠다는 기록으로 보아 전탑의 건립에는 나옹화상과 연관이 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나옹화상은 1376년 4월(禑王 2)에 회암사에서 문수회(文殊會)를 열었는데, 이로 인해 경상도 밀성군으로 추방되어 이송되던 중 신륵사에 이르러 5월 15일에 입적하게 된다. 따라서 나옹이 신륵사에 머문 기간은 길어야 한 달에 불과한 극히 짧은 시간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기간내에 전탑을 건립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된다. 오히려 나옹의 입적 후 일어났던 신비로운 이적은 신륵사의 사세를 확장시키는 계기를 가져왔고, 이로 인해 전탑이 건립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다층전탑은 신륵사와 나옹과의 관계를 보아 1376년을 건립하한으로 설정해도 무리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둘째, 신륵사의 연혁을 기록한 탑지(塔誌)가 봉안되어 있었다. 셋째, 사리는 밑바닥에서 수습했다는 기록을 보아 기단하부에 사리를 봉안했음을 알 수 잇다. 넷째, 1726년(조선 영조 2)의 수리시 경감(瓊龕)을 안치하고 다시 벽돌을 쌓아올렸다는 기록을 보아 이 때에도 사리는 기단부에 봉안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섯째, 제일 먼저 석대(石臺)를 수리했다는 기록을 보아 1726년 당시까지도 기단부의 모습은 현재와 같이 화강암으로 조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섯째, 건탑이래 성화연간(成化年間,1465-1487), 만력연간(萬曆年間, 1573-1620)에 이어 1726년(조선 영조 2)등 모두 3차례에 걸쳐 수리된 것으로 보인다.

일곱째, 전탑의 명칭은 비문의 내용으로 보아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지금의 신륵사다층전탑이 아니라 ·신륵사동대탑(神勒寺東臺塔)·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더불어 현재는 6층의 모습을 취하고 있지만, 건립당시의 모습이 변화된 까닭에 층수가 불분명하여 다층전탑이라 불리우고 있다. 하지만, 이 전탑은 본래 7층으로 건립된 것으로 추정한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의 탑파는 신라시대 모두 홀수의 층수를 이루고 있고, 고려말에 건립된 안양사의 전탑 역시 칠층으로 기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현재 6층의 모습에서 부재를 체감해 층수를 조절해 볼 때 7층으로 건립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이 전탑은 사찰의 동쪽 남한강변에 위치한 동대(東臺)에 건립되어 있어 남한강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조망권을 확보하고 있다. 한편 강에서 바라 볼 때 사찰은 가리워져도 전탑만은 시야에 들어오는 위치를 점하고 있다. 따라서 신륵사다층전탑의 건립에는 당시에 성행했던 산천비보사상을 기반으로 불력(佛力)에 의해 남한강을 오르내리는 뱃길의 안전운행과 강물의 평안함을 기원하고자 하는 목적이 내재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 신륵사 다층석탑 = 극락보전 앞에 건립돼 있는 석탑. 현존 석탑 대다수가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반면 백대리석을 주재료로 사용한 점이 특징이다. 상층기단 네 모서리에는 꽃잎과 연주문으로 장식했고, 각 면에는 생동감 넘치는 운용문을 조각했다. 일반적으로 불교와 연관된 조각을 하는 것이 통일신라시대 이래 전통이지만, 이 석탑은 그에 벗어나 구름과 용을 조각, 귀중한 연구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다층석탑(多層石塔)

극락보전 앞에 건립되어 있는 석탑으로 2층기단 위에 탑신을 올린 평면 방형의 석탑이다. 따라서 외형적인 면에서는 신라시대 이래 확립된 일반형석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는데, 층수가 불분명한 관계로 다층석탑이라 불리우고 있다. 한편, 현존하는 석탑의 절대다수가 화강암을 시용하고 있음에 비해, 백대리석을 주성재료로 사용한 점이 기존의 석탑과 다르다.

기단에서 탑신에 이르기까지의 각 층 부재는 각각 일석으로 조립되었는데, 이는 석재가 구하기 어려운 백색 대리석인데 기인한 것이 아닌가 한다. 방형의 지대석 상면에 2층기단을 놓았다. 하층기단의 하대석에는 단엽 40판의 복연이 조식되었고, 중대석의 각 모서리에는 화문(花紋)으로 장식하였는데, 각 면에는 파도문을 조식하였다. 갑석의 상·하면에는 앙연과 복연을 조식하였고, 중간에는 넓은 돌대를 형성하고 있다. 상층기단의 네 모서리에는 꽃잎과 연주문(連珠紋)으로 장식한 기둥을 모각한 후, 각 면에는 생동감이 넘치는 운용문(雲龍紋)을 조각하였다. 특히 구름무늬의 유려함과 용의 얼굴과 발가락과 더불어 몸체의 비늘에서 주는 사실적인 감각은 마치 승천하는 용이라 생각될 만큼 활기차게 조각하였다. 이처럼 상층기단 면석에 문양을 조식한 경우는 신라시대이래 건립된 석탑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그런데 대다수의 석탑에서는 팔부신중을 조식하고 있음에 비해, 이 석탑에서는 용과 구름을 가득히 조각해 특이한 면을 보이고 있다. 이같은 일면은 9세기에 건립된 석조부도와 불상대좌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고, 조선시대에 이르러는 부도의 탑신부를 용과 구름으로 가득 메꾼 경우를 볼 수 있어 비록 시대를 달리하는 석조물이지만, 양식상의 친연성을 엿볼 수 있다. 갑석의 하면에는 앙연이 조식되었고, 상면은 편평하게 처리하여 탑신을 받고 있다.

탑신석은 현재 8층까지 남아있는데 매층 우주(隅柱)가 모각되어 있다. 옥개석은 평박하고, 옥개받침이 낮게 조출되었으며, 상면에는 각형 1단의 탑신괴임대가 마련되어 있다. 추녀는 수평으로 흐르다 전각에 이르러 반전을 보이고 있는데, 각 층의 체감율이 완만하다. 찰주가 관통된 8층 옥개석의 상면에 소형의 탑신석이 있는 점으로 보아 본래는 더 많은 층수를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륵사가 세종 영릉의 자복사(資福寺)로서 성종 3년(1472)에 중흥한 사찰인 점과 세조 13년(1467)에 낙성한 원각사지10층석탑과 같은 석질인 점을 고려 할 때 대략 늦어도 1472년에는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조선시대에 건립된 석탑은 전국적으로 13기가 확인되고 있고, 이 중 신륵사다층석탑의 기단에 새겨진 운용문은 당대의 석탑과 문양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볼 때 석탑의 기단에는 팔부신중을 비롯한 비천상·안상·사자상등 불교와 연관된 조각이 등장하는 것이 통일신라시대 이래의 전통이다. 그런데 이 석탑에서는 이같은 전통에서 벗어나 구름과 용이라는 조식이 등장하고 있다. 이들은 주로 석비에서 귀부와 이수에서 등장했던 것으로 석탑에서 채용됨은 특수한 일례라 생각된다. 특히 운용문은 조각기법에 있어 얼굴과 비늘 그리고 발톱 등의 묘사에 있어 매우 정교하고 세련되었을 뿐만 아니라, 생동감 있는 표현은 구름무늬와 잘 조화를 이루어 뛰어난 작풍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 이 시기에 있어 용은 국왕을 상징하는 중요한 문장이었음을 볼 때, 신륵사가 지녔던 사격(寺格)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판단된다. 즉, 신륵사는 나옹화상의 부도와 대장경을 봉안했다는 ·신륵사대장각기·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 말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조선시대 초기에 영릉의 願로 확정되어 1472년(성종 3) 2월부터 10월까지 진행된 중수공사에서 200간의 건물이 완공되었다는 기록을 볼 때 신륵사의 사세는 이때가 최고 전성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신륵사다층석탑은 1472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운용문을 비롯한 여러 양식은 영릉의 원찰로서 국가의 보호를 받았던 당시의 시대상황에서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의의

신륵사에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석탑과 전탑, 석조부도, 석등이 현존하고 있어 일반적으로 사찰의 조영에 따르는 석조물의 대분이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크게 고려말 나옹의 입적과 조선초의 중창에 따른 건립으로 크게 구분될 수 있는데, 이를 통해 여말선초라는 역사적 변화기 조형물의 양상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즉 신·구양식이 혼재되어 나타남으로써 앞시대에 이룩한 조형물의 양식을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양식을 탄생시키며 우리나라 미술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같은 면은 전탑의 경우 문양전이 사용되고 있어 신라시대 이래 의 전통이 유지되고 있고, 사상적으로는 산천비보사상을 기반으로 건립되었음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아아가 백대리석으로 건립한 조선시대의 다층전탑 역시 양식과 더불어 기단에 부조된 용과 구름문양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신륵사의 위상이 어떠했는가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표상이라 하겠다.


박경식 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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