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경기천년, 경기 역사 문화의 전개] (26) 새로운 왕조, 조선을 위한 새 그릇을 만들다

▲ 백자 항아리, 조선 15-16세기, 경기도박물관 소장
조선시대 사람들은 화려한 청자가 아닌 단아한 백자를 선호했을까? 백자를 본격적으로 만들기 시작한 것은 지금부터 600여 년 전이다. 당시 세계적으로 백자(Porcelain)를 만들 수 있었던 문명국가는 그리 많지 않았다. 유럽도 18세기 초에야 독일 마이센에서 연금술사 뷔트거에 의해 백자를 만들기 시작했다.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도 애용되고 있는 백자는 역사적 사건 속에서 그 필연적 사연을 찾아볼 수 있다.

백자(白磁)란 백토(白土)로 그릇의 형태를 만들고 그 표면에 여러 가지 장식을 한 다음 투명한 백색 유약을 입혀 약 1천300도의 고온에서 구워낸 도자기를 말한다. 조선시대는 백자의 시대라 할 만큼 전 기간 절제된 장식의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있는 백자가 유행했다. 그리고 그 형태와 빛깔도 왕조의 흥망과 궤를 같이 했다. 이렇게 긴 기간 동안 지속된 백자 유행의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조선의 통치 이념인 유교이다. 유교를 기본 통치이념으로 새 왕조를 일으킨 조선은 고려시대의 청자와는 다른 새로운 시대의 이데올로기에 맞는 그릇이 필요했다. 고려 왕조를 무력으로 전복시킨 조선은 개국의 합리화를 위해 숭유억불(崇儒抑佛)을 표방해 이데올로기의 대변환을 시도하는 한편 신왕조에 알맞은 개혁 정치를 펼쳤다. 특히 신흥 왕조의 전범(典範)을 보여야 했던 왕실에서 검약과 실질을 숭상하는 유교 이념에 따라 전 왕조의 유산인 청자 대신 백자를 하나의 상징물로 삼아 신속하게 백자 산업을 부흥시키고자 노력했다.
▲ 왼쪽에서부터 백자 청화 매조죽문 항아리(조선 15-16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국보 제170호/ 백자 청화 송죽문 홍치이년명 항아리(조선 1489년) 동국대학교박물관 소장, 국보 제176호/ 백자 병(조선 15-16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보물 제1054호

조선이 건국되고 왕실의 기틀을 마련하던 시기, 중국 경덕진(景德鎭)에서는 원말명초(元末明初)부터 이뤄진 기술 개발로 탄생한 새로운 경질의 백자와 청화백자가 유행하고 있었다. 맑고 티없는 백색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단단하고 잘 깨지지 않아 실용적이기도 한 새로운 백자는 조선 왕실의 유교 이념에도 부합하는 새 시대의 그릇이었을 것이다. 기존의 도자기 기술을 바탕으로 명나라 사신들을 통해 전해지는 새로운 백자에 자극받아 이를 만들기 위해 기술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특히, 청화백자는 백자 기술의 완성으로 최상질의 백자에 고가의 청화안료로 그림을 그렸다. 15세기 중반인 세조 연간 국산 청화를 개발하려는 노력으로 보아 이미 청화가 제작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조선 전기 도화서 화원이 직접 그림을 그릴 정도로 귀하고 제한적이었고 문기어린 유교적 이상을 표현하고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유교의 이념과 관련된 백자에 대해 살펴보면 이들의 필연적인 사연을 이해할 수 있다. 조선 전기 유교의 실행 방식인 예(禮)를 강조하면서 이를 위해 명기(明器), 지석(誌石), 제기(祭器) 등을 만들어야 했다. 이전 금속기로 만들어 사용하던 것을 규제하고 백자로 재질을 대체하도록 했다. 그리고 일상 용기에서 금은기의 사용을 규제하면서 왕실에서 사용하는 그릇도 대량 생산이 가능한 백자로 해 사치풍조를 없애고 검박한 생활을 몸소 실천하는 모습을 보였다.

유교적 애민 사상의 전형을 보여준 세종대왕(1419-1450)은 왕실용 그릇인 어기(御器)를 백자로 전용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왕실의 비호에 힘입어 본격적으로 왕실의 백자를 생산할 전용 가마가 필요했다. 그 결과 1467년경 경기도 광주의 경안천(慶安川) 주변에 왕실 소용의 그릇을 담당하는 사옹원(司饔院)의 분원(分院)이 설치됐다. 사옹원은 대궐 내에 속해 있는 관청으로 왕의 식사를 바치는 일과 대궐 내의 음식 제공에 관한 일을 맡은 부서다. 이곳에서 왕실의 그릇을 굽는(어기번조·御器燔造) 분원 즉, 광주에 관이 주도해 그릇을 굽는 가마인 관요(官窯)를 운영한 것이다. 왕실이 있는 한양과 지리적으로 가깝고 땔감이 풍부한 무갑산의 자원 그리고 양질의 백토의 산지인 광주는 분원의 위치에 가장 적합한 곳이었다.
▲ 경기 광주 분원 가마터

분원의 설치 이후에는 그릇에 유교의 이념을 더 공고히 했다. 조선은 유교의 이념에 걸맞게 엄격한 신분제도를 고수한 나라였다. 왕이 사용하는 그릇과 왕세자가 사용하는 그릇을 구분해 만들었고 그릇의 재질, 문양, 품질에도 차이를 뒀다. 왕은 백자 중에서도 최상질의 백자를 사용했고 왕세자는 왕과 같은 백자에 청색의 유약을 입혀 만든 청자를 사용하기도 했다. 세조 시기 왕과 세자의 그릇을 구분하지 않고 섞어서 쓴 것에 대해 사옹원 별좌를 엄하게 벌하기도 했다. 또한 1555년 완성된 ‘경국대전주해’에서도 임금은 백자, 왕세자는 청자로 법으로 그릇의 사용을 규정하고 있다. 실제로 대전을 의미하는‘대(大)’, 중궁전의 ‘중(中)’, 세자전의 ‘세(世)’, 대군과 공주 이하의 처소를 의미하는 ‘처(處)’를 백자 바닥면에 새겨넣은 경우도 찾아볼 수 있어 철저한 신분에 따른 위계질서 속에 백자를 구분하고 있다.

조선시대 백자의 생산이 얼마나 중요한 국가적 사업이었는지는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의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경국대전에는 나라에 소속된 장인들의 숫자가 명시 되어 있는데 사옹원 소속의 사기장(沙器匠)으로 380명의 사기장이 배정된다. 사기장은 국가기관 소속의 그릇 만드는 장인으로 전국에서 선발된 최고의 기술자이다. 이들이 생산하는 그릇의 수량은 1천300죽 즉, 1만3천 개이며 이외에 궁중의 연회가 있을 때는 별도로 제작이 이뤄졌다. 이를 생산하기 위해 2월부터 10월까지 작업을 했고 공식적으로 봄·가을 두 차례 진상을 했다. 이러한 분원의 운영체제로 중앙 관요의 발달된 기술과 그릇 형태가 지방 가마에도 전달되고 조선시대 도자 사업을 이끌고 가게 된다. 분원은 설치 직후부터 조선시대 요업의 중추 기관으로 활약해 전국적인 백자 요업의 확산과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조선의 왕조가 지속되는 500년 동안 분원 제도는 지속됐고 광주는 최고 품질의 백자를 생산하는 지역이자 최신 유행과 기술의 보급처가 된다.
▲ 사궤장 연회도첩 중 내외선온도

조선 백자의 진수인 분원의 백자는 조선시대 이념인 유교의 정신세계를 가장 잘 표현한 산물이다. ‘꾸미되 사치스럽지 않고 질박하되 누추하지 않은 정도’의 중용(中庸)의 아름다움에 대한 철학은 500여 년 동안 변치않고 유행한 백자 제작의 힘의 근원인 것이다. 분원 백자의 맑고 투명한 백색과 단아하면서 당당한 형태를 대면하면 조선시대 왕실을 비롯해 선비들이 추구하고자 했던 이념의 미학인 ‘격조’의 아름다움과 만날 수 있다.

김영미 경기도어린이박물관 학예운영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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