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노숙소녀 살인사건, 익산 택시기사 살인사건, 삼례 나라슈퍼 강도사건, 무기수 김신혜 사건의 공통 키워드는 강력, 재심, 박준영이다. 4건 모두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강력사건이었고, 재심이 결정됐고, 담당 변호사는 박준영이다.

박준영(43). 국내 최고의 ‘재심 변호사’로 평가 받는다. 재심(再審)이란, 확정된 판결을 무효화하고 다시 원점에서 재판하는 것으로, 과거사 규명 사건에서는 종종 있었지만 일반 형사사건에서는 극히 이례적이다.

큰 재심 사건을 맡아 잘 나가는 줄 알았던 박 변호사가 사무실 월세를 못내 문 닫을 처지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 사연을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에 10일 낮 1시40분께 수원지방법원 인근 사무실을 찾아갔다. 그의 사무실은 불이 꺼져 있었다. 유리문 속으로 비친 사무실 안은 짐을 싸고 있는 흔적이 곳곳에 보였다. 10여 분 후 모자를 쓰고 면바지에 티셔츠를 입은 그가 나타났다.

-사무실 월세를 못내 문 닫는다는데 사실인가.

“맞다. 사무실 월세를 못내 보증금을 까먹고 있다. 보증금도 얼마 안 남았다. 사무실을 유지하기 힘들어서 문을 닫아야 할 것 같다.”

-소문이 돌면서 사무실 유지 후원기금 모금 움직임이 있고, 박 변호사에게 뜻이 전달된 것으로 알고 있다.

“어제(9일) 찾아오셨다. ‘조금 일찍 알았더라면 우리가 도와서라도 수원을 떠나지 않게 할 수 있었다’며 안타까워했다. 수원에 남아달라고 하고, 도움을 줄 수 있다고도 했다. 염태영 시장도 전화를 해서 수원에 남아달라고 했다.”

수원에서 활동 중인 전·현직 교수, 시의원, 시민들이 박 변호사 사무실 유지에 뜻을 모으고 있다.

-수원을 떠나 서울로 간다고 하던데 남을 여지는 없는가.

“서울 이랜드복지재단에 신청서를 내서 지원이 결정됐다. 나도 살아야 하니까. 지원 결정을 뒤집어엎는다는 것은 쉽지 않다. 어제까지는 서울로 가야겠다고 결심했는데 스토리펀딩 준비하고, 술 한 잔 먹고 일어나 보니 하룻밤 사이에 세상이 바뀌어 있더라. 솔직히 서울로 갈지 말지 고민이 된다. 내 의지로 안 가겠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고 재단 쪽에서 양해해 줘야 하는 부분도 있다.”

그는 4건의 재심 사건을 맡으면서 한 푼의 수임료도 받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 돈을 쓰면서 변론하고 있다. “어렵고, 억울해 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받을 수 없다”는 게 박 변호사 소신이다. 그는 사무실 월세를 못 내게 되자 서울 이랜드복지재단에 신청해서 사무실을 공짜로 쓰고 여직원 1명 월급을 보조 받는 것이 결정된 상태다. 다행스럽게 박 변호사는 수원에 남기로 했다고 광복절인 15일 알려왔다.

-수원 노숙소녀 살인사건은 어떻게 맡게 됐나.

“2006년 수원에서 변호사를 시작했다. 2007년 여름 ○○○변호사 사무실이 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변호사가 1년간 외국에 나가게 된 것이다. 월세만 내는 조건으로 사무실을 열었다. 개업은 했는데 일이 없었다. 먹고 사는 길은 국선(國選)밖에 없었다. 그 당시는 변호사들이 국선 사건을 기피했다. 전국에서 국선을 가장 많이 했다. 수원 노숙소녀 살인사건도 국선이었다. 2008년 1월 재판부에서 변론을 맡아 달라고 연락이 왔다.”

그는 완도에 있는 고등학교를 나온 고졸 출신 변호사다. 수원에는 연고도, 인맥도 없다. 변호사가 된 후 서울에서 취업이 안 돼 수원까지 밀려 왔다. 그런 그가 수원에서 ‘운명’같은 수원 노숙소녀 살인사건을 맡았다.

-수원 사건이 재심 변호사의 ‘길’로 접어들게 한 것인가.

“수원 사건은 아이들과 노숙자에게는 불행이었지만 나에게는 큰 기회를 준 사건이다. 운명처럼 다가왔다. 수원 사건을 통해 재심 사건을 처음 접해 봤다. 익산 택시기사 살인사건, 삼례 나라슈퍼 강도사건, 무기수 김신혜 사건도 수원 사건이 연결고리가 됐다.”

-굵직한 재심 사건을 연달아 맡았는데 사무실 월세를 못내 문을 닫는다는 게 이해가 안 된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빚에다가 수입이 없으니(웃음) 사무실 월세를 못 낼 정도로 어렵다. 개업한 뒤 만든 한도 1억 원짜리 마이너스 통장도 9천700만 원으로 꽉 찼다. 적금 깨서 살고 있다. 익산 택시기사 사건을 제작하는 영화사에서 돈을 지원 받았다(금액은 영화사 측 입장이 있으니 비공개 해달라고 했다). 그 돈을 은행에 고스란히 갖다 바쳤다.”

그는 현재 2억8천만 원의 은행 대출이 있다. 9월 1일까지 대출금을 분할상환 하라는 문자 메시지를 은행에서 받았다. 그는 문자 메시지를 보여줬다.

-재심 사건을 계속 맡을 것인가.

“재심 사건은 돈을 보고 맡은 게 아니다. 지금 4건의 사건을 준비 중이다. 엄청난 사건도 있다. 그의 사무실 한쪽 벽에는 재소자나 그 가족들이 보낸 사연 깊은 편지들이 빼곡히 붙어 있다. 책상에도 쌓여 있다. 모두 억울함을 호소하며 도움을 간청하는 사연들이다. 그날도 편지 2통이 왔다.

박 변호사는 보증금 3천만 원에 월세 55만 원짜리 집에 살고 있다. 부인은 전업주부다. 지방에 있는 처가도 어렵다. 셋째가 태어났다. 14일 백일 사진을 찍는다고 했다. 그런 그가 돈이 되는 사건은 쳐다보지 않고 돈도 안 되는 재심 사건에 매달린다. 전문변호사로서 돈 버는 데 전문성을 쓰고 싶지 않다고 한다. 호구지책(糊口之策)으로 자신의 삶과 그동안의 일을 주제로 한 글을 포털에 올리고 이를 읽고 공감한 독자들이 이 기사에 후원금을 내는 스토리펀딩을 시작했다.

정철승 변호사가 페이스북에 “억울하게 죄인이 되어 옥살이를 하고 전과자가 된 형사사법절차 피해자들의 권리지킴이 박준영 변호사가 결국 망했다. 이런 의로운 변호사 한 명 정도는 우리 시민들이 마음을 모아 먹고 살 걱정은 없게 해줘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올린 글이 가슴을 파고든다.

‘법은 약자를 보호해야 합니다. 준영생각’이라고 새겨진 그의 명함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김광범 기획이사/

저작권자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