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영국, <산>, 1997, 캔버스에 유채, 132×132cm, 경기도미술관 소장
먹으로 한지에 그리는 그림이 전부였던 시절, 서양의 미술이라는 것이 아예 낯설었던 시절, 우리 근대 미술의 초창기 화가들은 기회가 닿는 대로 일본 유학을 했다. 당시로서는 일본만이 유일하게 서양의 근대적 문물을 접할 수 있는 통로였고, 미술가들에게도 그것은 동일하게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유화물감과 캔버스를 사용하는 새로운 그림과 종교적 도상의 범주를 벗어나는 조각 작품은 이전까지 전통적인 제작 방식과 주제에만 익숙해 있던 사람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일본을 통해 새로운 문화를 배우기는 했지만, 당시 우리 예술가들은 서양의 방식을 고스란히 따른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이 새로운 미술을 자연스럽게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낼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특히 눈에 보이는 모습을 똑같이 재현해내는 구상(具象) 미술과는 달리 사물의 선이나 면을 조형적으로 구성하거나 색채의 조화를 추구하는 등 시각적 요소들의 다양한 조합으로 하나의 조형적 질서를 만들어내는 추상(抽象) 미술을 우리의 방식으로 만들어내는 일은 그야말로 난제였다. 서양미술의 개념을 받아들이고 익히기도 바쁠 시기에 말이다.

유영국은 김환기와 함께 그 시절 우리나라의 추상미술을 이끌었던 선구적인 화가였다. 그는 산과 길, 나무 등의 자연적 소재를 추상적으로 단순화하여, 이를 화면을 구성하는 요소로 사용했다. 완만한 곡선과 강렬한 색채로 이루어진 자연으로부터 온 단순화된 시각 요소들은 자연이 그 스스로 아름답듯이 그림 속에서도 여전히 아름다운 구성을 이루어낸다. 특히 ‘산’은 작가가 무척 애착을 가졌던 대상이다. 그가 그림 속에 담아낸 산은 그의 고향 울진에 있는 집 뒷산과 치악산을 비롯한 우리나라의 산이다. 우리의 산세가 그대로 추상화된 그의 그림 속에서 산은 예상치 못한 색채의 향연을 선사하는 순수한 조형이 갖는 아름다움을 드러내 보여준다.

7평 남짓한 작은 작업실에서 하루 8시간 이상을 꼬박 작업했던 유영국은 작업에 매진하기 위하여 대학교수라는 일자리도 접었다. 말년에는 죽은 뒤에 절대 본인의 이름을 내건 미술관이나 미술상을 만들지 말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그의 작품의 근간은 우리만의 고유한 미술, 우리에게 유효한 미술을 찾는 일이었다. 평생을 걸쳐 수행하듯 순수한 조형을 찾아 산을 그려온 화가답게 그의 삶도 작품처럼 군더더기 없이 투명한 한 점의 추상화 같다.

황록주 경기도미술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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